|
🕊 아무리 기도해도 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언제나 우리 곁에서 함께 걷고 계십니다.
그분의 방식에 마음을 열고, 침묵 속에서 대화를 시작해 보세요. |
엊그제 태어난 것 같은데 어느새 초등학생이 된 조카가 있다. 여느 이모 삼촌들처럼 나 역시 하나뿐인 조카가 무척 사랑스럽고 소중하다. 그래서 조카를 만나러 가는 길은 늘 설렌다. 물론 본격적으로 놀아 주기 시작하면 금세 체력이 바닥나서 그 설렘이 잠시 사라지기도 하지만, 조카와 헤어지고 돌아올 때마다 아이가 눈에 밟히는 것을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조카 바보’인가 보다.
그런 조카일지라도 오랜만에 마주하면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 사춘기가 되면 더 그럴 것이다. 어린 조카에게 가끔 만나는 삼촌은 낯선 존재일 테다. 만나자마자 반가워하며 달려가는 나의 마음과는 달리 제 엄마 뒤로 숨거나 내 시선을 피하는 조카와의 ‘얼음장 깨기’에는 다소 노력이 필요하다.
“잘 지냈어?”, “요즘은 뭐 하고 놀아?” 하며 쉬지 않고 말을 건네 보지만 반응은 시큰둥하다. 괜히 서운하기도 하고, 내가 싫은가 싶어 마음이 상할 뻔한 적도 있다. 하지만 아홉 해를 지나며 나도 조금은 배웠다. 아이의 마음을 녹이는 데에도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 기술은 다름 아닌 기다림이다. 조금씩 다가가 아이가 관심 있는 것을 같이 만져 보고, 아이가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부모에게 알아내 말을 걸다 보면 얼음장이 조금씩 녹기 시작한다. 그리고 변화의 순간이 찾아온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 말 없던 아이가 슬며시 마음을 꺼내 놓는다. 때로는 “문 닫고 놀자.”라며, 누가 들을까 봐 방문을 닫고 자기만의 세계를 이야기해 주기도 한다.
돌이켜 보면 아이의 침묵은 거절이 아니라 대화의 시작이었다.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미 내 목소리를 듣고 나를 살피고 있었다. 그 침묵은 벽이 아니라 서서히 녹아드는 시간이었다.
침묵으로 말씀하시는 분
나는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인 신학을 공부하며 이를 사람들과 나누고 있지만, 사실 하느님과 주고받는 대화에 그리 능숙한 것은 아니다. “열심히 기도해도 하느님께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어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라며 나를 찾아와 자신의 영적 고민을 털어놓는 신자들의 마음이 그리 멀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사실 내 안에서도 같은 물음이 일어날 때가 많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늘 침묵하시는 것 같다. 설레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이야기를 쏟아 놓지만, 왜 그분께서는 묵묵부답이실까. “적어도 고통에는 응답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며 하느님을 채근해 보지만, 고통 속에서 그분을 간절히 찾을 때에도 그분께서는 무심하게도 나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예수님께서도 그 침묵을 경험하셨다. 바로 아버지 하느님을 향한 외침 한가운데에서였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죽음이 임박한 십자가 위, 극한의 고통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찾으셨다. 하지만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아들 하느님의 애원에 침묵하셨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라며 아들 예수님께서 꺼내 놓은 기도에도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그 침묵의 깊이를 다 헤아릴 수는 없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도 그 침묵의 깊이를 다 깨닫지 못하셨을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셨을 것이다. 아버지의 침묵이 당신과 나누는 대화였다는 것을, 아버지의 침묵은 아들인 당신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 침묵의 대화는 십자가 위에서 구원으로 드러났다. 침묵이라는 장막 뒤에서 구원이라는 장대한 역사가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함께 걷고, 듣고, 대화하시는 하느님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방식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다. 이렇게 어린아이의 마음도 다 읽을 수 없는 우리인 만큼, 하느님과 능히 소통한다는 것은 과연 교만일 것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이 있다. 어린 조카가 오랜만에 만난 삼촌의 말을 다 듣고 있었던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기도를 다 듣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성체 앞에서 지치고 괴로운 마음을 쏟아 놓고 돌아설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그분께서는 우리의 지친 마음과 함께하신다.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처럼 우리의 가려진 눈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우리 곁에서 함께 걸으신다.
그리고 우리는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고, 그제야 깨닫는다. 아무 응답 없이 침묵하시는 것만 같은 하느님이실지라도 그분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늘 듣고 계신다는 것을, 그분의 방식으로 우리와 대화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이다(루카 24,13-32 참조).
그분께서 자리하시는 곳
침묵은 부재가 아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또 하나의 언어다. 그분께서는 침묵 속에서 우리와 대화하신다. 우리는 즉각적인 답을 원하지만 하느님과의 대화는 1 더하기 1이 2로 떨어지듯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때로 우리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분께서 우리의 삶 한가운데에서 말씀하고 계셨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서 대화를 이루신다. 늘 곁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방식으로 대화를 시작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침묵에 실망하고는 하지만, 어쩌면 이는 그분의 대화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분께서는 침묵 속에서 더 깊은 이야기를 하고 계시고, 우리의 영혼을 어둠 속으로 이끄심으로써 더 깊은 빛으로 데려가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이를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영성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일을 마치고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왔을 때, ‘오늘은 좀 나아지겠지.’ 하고 기대하며 시작한 하루가 어제와 별다르지 않게 흘러가 버렸다는 사실을 마주할 때, 관계에서의 갈등이 온 일상을 잠식해서 마음을 힘들게 할 때, 하루 종일 육아에 시달리다가 겨우 아이를 재운 뒤 마음을 파고드는 공허함과 적막을 마주할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침묵 속에서 우리와 대화하기 위해 앉아 계신다.
대화의 시작
그분과의 대화는 침묵에서 출발하기에 그 침묵 속에서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 지친 마음, 답답한 마음, 잔뜩 엉켜 산란해진 마음을 그분의 침묵 속에 내어 둘 필요가 있다. 그렇게 침묵은 끝나지 않는 대화를 만들어 간다. 그분과의 대화는 거창한 말이 아니라 침묵 가운데 마음을 내어놓는 데서 시작된다. 그것이 기도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하느님을 흠숭하는 것이란 “하느님 면전에서 존경 어린 침묵을 지키는 것”(2628항)이라고 말한다. 침묵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가장 깊이 머무는 시간인 것이다.
“…….”
그러니 말줄임표처럼 비어 있는 그 자리에서 대화를 시작해 보자.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 곁에 계신다. 우리의 기도를 다 듣고 계신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아직 다 알지 못하는 침묵이라는 언어로 당신의 마음을 건네신다. 그러므로 침묵은 ‘계시지 않음’이 아니라 더 깊은 대화의 시작이다.
심재현 신부, 은성제 신부, 이한석 신부의 신앙 이야기를 담은
📢 지금 [가톨릭북플러스 인터넷 쇼핑몰]에서 만나 보세요!
🔗 함께 읽으면 더 좋은 아티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