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이야기를 쓰시는 하느님

영성과 신심

사랑의 이야기를 쓰시는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삶의 모든 순간을 통해 우리를 이끄신다

2026. 11. 02
읽음 46

2

0

🌈 우리의 삶은 기쁜 순간만으로도,

힘겨운 순간만으로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 모든 시간이 모여 한 사람의 역사가 되고,

그 역사 안에서 하느님과의 특별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당신은 지금 하느님과 어떤 사랑의 이야기를 쓰고 있나요?

지나온 시간에 새겨진 하느님의 사랑을 함께 묵상해 보세요.

 


 

이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는 말처럼, 우리 모두에게는 자기만의 역사가 있다. 자신의 역사를 돌이켜 보자. 때로는 한겨울처럼 모든 것이 얼어붙은 듯 차갑고 추운 날도 있고,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웃으며 추억하게 되는 날도 있다.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던 폭풍우가 지나가고 어느새 화창한 봄날이 찾아오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도 있다.

 

신앙인이라면 고통의 한복판에서 한 번쯤 이런 질문을 던져 보았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분을 잊는 순간, 우리 삶의 희망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희로애락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단 하나다. 바로 우리와 당신만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를 쓰고 싶어 하시기 때문이다.

 

사제이자 수도자로 살아가며 가장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 그것은 왜 신부가 되었느냐는 질문이다. 특히 청소년들을 동반하는 나로서는 더욱 자주 듣는 이야기가 있다. “신부님은 신부가 되지 않았으면 엄청 좋은 아빠가 되었을 것 같아요. 결혼도 못하는데 왜 신부가 되었어요?” 그때마다 나는 단순명료하게 “그냥 좋아서.”라고 대답한다.

 

이 짧은 답변 안에는 나의 산전수전이 다 녹아 있다. 사실 학창 시절의 나를 기억하는 친구들은 내가 사제가 되었다는 소식에 기적이라며 놀라워한다. 내가 사제가 된 것을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겠다며 직장에 연차를 쓰고 수도원에 확인하러 온 친구도 있었다. 왜냐하면 학창 시절 나는 공부와는 완전히 담을 쌓고 살았으며, 말을 지독하게 안 듣던 아이였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때에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던, 소위 말하는 폭주족이었다.

 

이런 내가 사제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친구들은 기적이라고 했다. 신앙이 없던 친구가 세례를 받는 일까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를 기적이라기보다 내 삶 속에 개입하신 하느님의 세밀한 사랑의 이야기라 말하고 싶다.

 


 

다시, 성당으로

 

나는 경남 마산 출신으로 신앙이 없는 집안에서 자랐다. 내가 처음 성당에 발을 들인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예비자 교리를 혼자 듣기 쑥스럽다던 친구가 함께하자고 했고, 나는 주말에 딱히 할 일도 없던 터라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학교 수업도 싫어하는 나에게 교리 시간은 말 그대로 고역이었다. TV 속에서만 봤던, 실제로는 처음 보는 수녀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 나라, 기도, 복음 이야기는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별 감흥도, 관심도 없는 교리 수업을 계속 듣자니 따분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수업을 그만둘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때마침 나를 성당으로 데려온 친구가 멀리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나는 ‘드디어 해방이다!’라는 기쁨에 가득 차 수업에 빠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녀님은 포기를 모르는 분이었다. 한 달 내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전화를 하셨다. 늘 상냥하고 친절한 그 목소리에 가기 싫다는 답을 할 수는 없었다. 결국 수녀님의 회유를 이기지 못해 성당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고, 6개월의 인내 끝에 중학교 3학년 주님 부활 대축일에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세례를 받은 후에도 성당에 나가는 일은 남의 신발을 신은 것처럼 어색했다. 수녀님의 소개로 주일 학교에 들어갔지만, 흥미가 생기지 않았을뿐더러 성당 친구들도 그다지 내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주일 학교에 세 번 정도 간 다음부터는 성당에 발길을 끊었던 것 같다. 대신 나는 오토바이에 빠져 지냈다. 함께 오토바이를 타던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성당과는 점점 더 멀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조차 잊고 지냈다.

 

나는 중학교 시절에 노는 것을 너무나도 좋아했다. 공부를 안 해서 성적은 늘 바닥이었고, 결국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그때 IMF 외환 위기가 닥치면서 우리 집안은 걷잡을 수 없이 기울었다. 아버지는 손수 지으신 집을 내놓으셨고, 우리 가족은 빚더미에 앉은 채 도시 외곽으로 밀려났다. 이날 이후 아버지는 술에 취해 어머니와 하루가 멀다 하고 다투셨다. 나는 이런 부모님의 모습을 보는 일이 싫어서 밤늦도록 오토바이를 타고 밖으로 겉돌았다.

 

매일같이 다투시던 부모님은 결국 별거하셨다. 집에는 아버지와 나 둘만 있었다. 나는 학교가 끝나면 설거지와 빨래, 아버지의 식사를 챙기며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웠다. 기댈 곳 하나 없던 그 시절, 내게 이 모든 일은 너무나 버거운 짐이었다.

 

늘 술에 취해 있던 아버지가 보기 싫어서 늦은 밤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배회하던 날이었다. 집 앞 놀이터에 앉아 밤하늘을 보는데, 문득 어떤 생각 하나가 한 줄기 빛처럼 떠올랐다. 바로 내가 세례를 받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었다.

 

다음날 나는 집 주변 성당을 찾아갔다. 마침 그날은 성모의 밤 행사 중이었고, 많은 신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성당 사람들은 내가 낯설고 왠지 불량해 보일 텐데도,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가족처럼 반겨 주었다. 또래 친구들도 나를 너무나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나는 그곳에서 따뜻함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되었고, 성당에 있을 때만큼은 근심을 잊고 행복할 수 있었다.

 


 

인생을 바꾼 기적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는 여전히 술에 취해 누워 계셨다. 어느 날 우연히 본 TV 다큐멘터리에서 소년 소녀 가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그 다큐멘터리를 보며 펑펑 울었다. ‘힘든 아이들이 저렇게 많은데, 나는 왜 내 신세만 한탄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에게 새로운 꿈이 싹트기 시작했다. 평생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살아가겠다는 꿈이었다.

 

그 무렵 어떻게 청소년들을 도울 수 있을지 고민하던 나는, 주일 학교 친구들과 놀아 주시던 본당 신부님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나도 사제가 되어서 저렇게 지내고 싶다는 마음이 샘솟았다. 공부와 담을 쌓고 지내던 나는 그때부터 공부라는 것을 시작했다. 전교 180등에서 전교 7등까지 성적을 올렸고,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철학 공부도 잘해야 한다고 해서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든 인문 서적들을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고를 다니던 내게 수능의 벽은 너무나도 높았다. 교구 성소 모임에 나갔을 때는 성소국장 신부님이 학교 성적과 가정 형편 등을 이유로 다른 길을 찾아보라고 거절하시기도 했다. 신학교에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던 시간과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된 것 같았다.

 

그렇게 꿈이 꺾인 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가기 전까지 배달과 막노동을 하며 돈을 벌었다. 하지만 성당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다녔다. 교리 교사로 봉사하며 주일 학교 아이들을 만났고, 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선배와 어른들에 대한 예절도 배웠으며, 레지오를 하며 기도에 맛을 들였다.

 

무엇보다 교리 교사를 하면서 주일 학교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내 마음속의 불꽃이 조금씩 살아났다.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살겠다는 마음의 불꽃이었다. 혹시 몰라서 인터넷에 ‘가난한 청소년’, ‘사제’ 등으로 검색을 해 보았다. 그때 ‘살레시오회’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수첩에 연락처를 적어 두었다.

 

그러던 2002년 9월의 어느 밤, 내 인생을 바꾼 사고가 일어났다. 나는 오토바이를 타고 신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때 반대편 차선에서 과속하던 차량이 나를 향해 달려와 그대로 들이받았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오토바이에 닿는 순간 ‘아, 나는 이제 죽었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오토바이의 핸들과 앞바퀴는 형체도 없이 날아갔지만, 나는 오토바이 몸체와 함께 오토바이에 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땅에 발을 딛고 서 있었다.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그때 첫 번째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살았구나.’ 싶은 안도가 아니라 ‘아,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의 도구로 쓰시려고 살려 주셨구나.’라는 생각이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다음날 바로 살레시오회 성소 담당 신부님께 연락을 드렸고, 신부님의 권유로 약 2주간 수도원 체험을 했다.

 

수도원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기도하며, 신부님과 수사님들이 오순도순 즐겁게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이곳이 바로 천국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내 눈앞에 펼쳐진, 내가 그토록 바라 온 삶을 보며 정말로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울림이 마음속에서 퍼져 갔다. 당시 원장 신부님이셨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께서는 “부족하지만 가능성이 보인다.”라는 말로 나를 받아 주셨고, 지금까지 이곳에서 살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랑의 역사

 

수도원에 입회한 후에도 하느님의 사랑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아버지는 완전히 술을 끊으셨고, 형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나는 그토록 갈망했던, 청소년을 위한 삶을 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하느님 사랑의 체험이라고 고백해 본다.

 

생각해 보면, 수도원에 들어오기 전에 아무 생각 없이 배우고 알게 된 것들도 수도 생활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공고를 다니면서 배운 용접 기술은 어느 공동체를 가든 유용하게 쓰이고, 고등학교 때 읽은 많은 책은 신학 공부에 큰 도움이 되었다. 교리 교사를 하면서 알게 된 레크리에이션 또한 사목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심지어 친구들과 오토바이를 타며 방황했던 기억은 청소년들을 만나고 그들과 어울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여러 어려움과 부족함, 결점이라는 소재를 통해 우리와 사랑의 이야기를 쓰고자 하시는 것이 아닐지 짐작해 본다.

 

사랑도 받아 본 사람이 할 줄 안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예수님의 사랑과 반대되는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는 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늘 같은 마음으로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신다. 우리 각자의 부족함을 통해서도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이야기를 쓰고자 하신다.

 

주님께서 앞으로 어떤 사랑의 이야기를 쓰실지 기대해 본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역사가 있다. 이 역사 안에서 우리가 하느님과 어떤 사랑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지 묵상하고 기억해 보기를 바란다.

 

“주님, 제가 방황할 때도 언제나 곁에 계셔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께서는 제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보다 저를 더 사랑해 주셨고, 제가 당신을 잊고 지낼 때 단 한순간도 저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매일의 일상에서 기쁠 때는 당신의 미소를 보게 하시고, 슬플 때는 당신의 따뜻한 품을 느끼게 하소서. 특별한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오늘 하루 숨 쉬며 살아가는 이 평범한 순간도 당신께서 허락하신 가장 큰 사랑의 기적임을 제가 잊지 않게 하소서.”

 



명형진 신부, 문재상 신부, 방종우 신부,

심재현 신부, 은성제 신부, 이한석 신부의 신앙 이야기를 담은

《사제들의 시대 공감》

📢 지금  [가톨릭북플러스 인터넷 쇼핑몰]에서 만나 보세요!

 

 

Profile
살레시오 수도회 소속으로, 현재 '서울시립청소년드림센터 교육팀'에서 청소년들과 동반하고 있습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합니다.

다른 분들이 함께 본 콘텐츠

시리즈총 14개의 아티클

NOW: 사제들의 시대 공감

사랑의 이야기를 쓰시는 하느님 | Catholic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