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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신앙생활 안에서도 자꾸만 타인이 달라지기를 바라곤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느님께서 변화시키고자 하시는 이는 바로 나 자신일 수 있습니다. ‘나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며 배우는 겸손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1700항에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이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인간의 존엄성은 하느님의 참행복에 대한 소명 안에서 완성된다. 인간은 마땅히 이러한 완성을 자유롭게 지향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적 행위로, 하느님께서 약속하시고 양심이 증명하는 선을 따를 수도,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은 자신을 형성하고 내적으로 성장한다. 인간은 육체적 생활과 영적 생활 전체를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한 재료로 삼는다.”
이러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많은 일을 통해 육체적 생활뿐만 아니라 영적 생활 전체를 성장시킬 수 있다. 하지만 때로 우리는 영적 성장의 기회가 될 일들을 귀찮고 불편하게 여기며 제쳐 두고, 불평과 불만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특히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타인에 대한 불편한 마음, 그들과의 크고 작은 갈등을 피하기 어렵다.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마음과 갈등 속에서 어느새 우리의 말은 타인에 대한 험담으로 흘러가기 쉽다. 어찌 보면 별것 아닌 일 하나가 오래도록 마음을 무겁게 하고, 미움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관계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어려움은 대개 자신의 자존심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겸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되는 생명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겸손은 라틴어로 ‘후밀리스humilis’라고 한다. 이는 ‘후무스humus’, 즉 대지에서 비롯된 단어다. 대지는 인간이 두 발을 딛고 사는 곳이자 가장 낮은 곳이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심지어는 생명까지 베풀어 주는 장소다. 이와 같이 겸손한 사람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생명을 회복할 수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처럼 겸손은 ‘받아들임’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는 관계에서 어려움이 닥치면 “상대방이 나와 맞지 않아서 그렇다.”, “저 사람은 자신만 안다.”, “참으로 꼴불견이다.”,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라는 식으로 평가하고는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평가는 다름 아닌 자신에게서 비롯된다. 나의 기준에 맞지 않아서, 혹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혹은 나보다 더 잘났기 때문에 누군가를 비하하거나 험담하게 되는 것이다. 상대방이 나와 맞지 않다고 해서 그가 나에게 맞춰야 할 이유는 없을뿐더러, 그가 아무리 거슬리고 우스워 보일지라도 그의 진짜 속내는 하느님만이 알고 계신다.
예전에 독일의 바이올린 장인 마틴 슐레스케의 《가문비나무의 노래》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작가는 가문비나무가 부드럽고 연해서 악기를 만들기에 더없이 좋은 나무이지만, 모든 개체가 다 같은 성질을 가지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어떤 것은 수분이 많고, 어떤 것은 생각보다 너무 연하며, 또 어떤 것은 거칠고 단단하기에 악기로 가공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악기를 만드는 장인들은 나무마다 다른 특성을 이해하고, 그 재질에 맞춰 가공하여 훌륭한 소리를 내는 악기를 완성한다고 한다. 나무가 장인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장인이 나무에 맞추어 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가문비나무와 장인의 이야기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장인은 나무의 결을 거스르지 않는다. 나무마다 밀도와 탄력, 결의 방향이 다르다는 사실을 먼저 받아들이고, 그 차이를 지우기보다는 이해하려 한다. 하물며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다.
“상대방이 나와 맞지 않다.”라는 말은 인간이 지닌 교만을 잘 나타낸다. 교만은 자기중심적인 사고의 원인이며, 영적 성장의 큰 걸림돌이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교회는 교만을 죄의 뿌리이자 근원으로 여긴다(로마 1,18-32 참조).
그러니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겸손일 것이다. 겸손은 나 자신을 비우는 데에서 시작한다. 자신을 비운다는 것은 마음에 공간을 남겨 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공간에 타인에 대한 사랑을 차곡차곡 쌓기 시작한다면, 이는 영적 성장의 좋은 재료가 될 것이다.
나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신앙생활
타인을 받아들인다는 것, 더 나아가 원수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을 닮은 본성을 지니고 있다. 이 본성대로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하느님께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무조건 더 잘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자신을 다시금 하느님께 맡기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병사들은 하느님께 청해서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힘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왔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승리가 아닌 세상의 승리로 바뀌었을 것이다.
이처럼 자신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일이 아무리 벅차고 쉽지 않더라도,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느님께 맡긴다면 분명히 지금까지와는 다른 생활이 시작될 것이다.
신앙생활의 깊이는 얼마나 오래 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충만하고 가치 있는 생활을 했는지에 달려 있다. 타인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그 사람이 변화하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를 받아들일 수 있는 큰마음을 달라고 청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겸손한 자의 기도다.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것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대지와 같이, 제게 다가오는 이들의 모습이 어떠하든 그들을 그대로 품게 해 주소서. 나무의 특성을 이해하고 그에 맞춰 악기를 깎는 장인처럼, 저 또한 타인을 바꾸려 하기보다는 그들의 다름을 받아들여 아름다운 생명의 소리를 내게 하소서.”
명형진 신부, 문재상 신부, 방종우 신부,
심재현 신부, 은성제 신부, 이한석 신부의 신앙 이야기를 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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