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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왜 고통 앞에서 가장 먼저 “왜?”라고 묻게 될까요? 시련의 의미를 지금 당장 알 수 없을 때, 어떻게 믿음을 이어 갈 수 있을까요? 언젠가 드러날 하느님의 뜻을 향해 조용히 희망하는 법을 함께 묵상해 보세요.⛵ |
글을 쓰는 일은 독자들과 나누는 대화와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무슨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까?’ 하고 생각합니다. 성체 앞에서 기도할 때 떠오르는 생각들, 일상을 스쳐 가는 사유의 조각들, 그 모든 것이 대화의 주제가 되고 글감이 됩니다. 저는 그렇게 글을 통해 독자들과 이야기해 왔고, 여전히 하고 있습니다.
“신부님, 시련에 관한 이야기를 써 주실 수 있을까요.”
편집부의 부탁을 받은 저는 모니터를 마주하고 자판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의 마음은 그리 가볍지 않습니다. ‘시련’이라는 단어는 제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삶의 순간을 다시 돌아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저는 이 주제를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제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것은, 독자분들이 지닌 시련의 무게를 제가 짐작할 수 없다는 데에서 오는 부담감이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여러분이 지닌 시련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시련은 다양한 형태와 무게를 지니기에, 각자에게 다가오는 시련의 모습은 결국 ‘온전히 자신만의 것’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짊어진 삶의 무게가 다르기에, 그 고통이나 슬픔도 지극히 개인적이겠지요. 그렇기에 제가 누군가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분명 거짓이나 기만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글을 써 내려가려 합니다. 이 주제를 붙잡고 오랫동안 묵상하다 보니, 제가 글을 쓰려는 이유가 단순히 원고 청탁이 들어왔기 때문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치유자이신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싶습니다. 제가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할 수도, 치유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리하실 수 있으시겠지요. 제가 다른 이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느님께서 독자분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저의 묵상과 삶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건네는 이야기가 단순히 자기만족을 위한 말들이 아니기를, 가벼운 위로나 공허한 언어의 잔치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의미를 묻는 시련과 고통에게
다양한 형태와 무게를 지닌 시련이지만, 모든 시련에는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련은 언제나 견디기 힘든 괴로움을 가져다준다는 것이지요. 시련을 겪는 사람은 각기 저마다의 이유로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필연적으로 ‘의미에 대한 물음’을 낳게 됩니다.
인간은 이해를 추구하는 동물입니다. 그러므로 시련 속에서 고통을 체험하는 사람은 결국 ‘대체 이 고통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묻게 되고, 그 답을 찾지 못하면 더 큰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의미가 있는 고통이라면 조금은 감내할 마음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의미를 알 수 없는 고통이라면, 그 ‘고통의 무의미함’ 때문에 더욱 괴로워 몸부림치게 됩니다.
그렇다면 시련과 고통의 의미에 대한 이 근원적인 물음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알 수 없다.”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고통의 의미를 찾을 수 없을 때 더 큰 고통이 찾아온다고 해 놓고 그 대답이 “알 수 없다.”라니, 조금 이상하게 들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알 수 없다.”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지요.
제가 기억하는 저의 첫 번째 시련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찾아온 외로움이었습니다. 원래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던 어머니는 형과 저를 낳으시고 일을 그만두셨다가,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다시 강사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집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일터에, 어머니는 학교에 계셨습니다. 세 살 위의 형은 초등학교 고학년이라 저보다 한참 늦게 집에 들어왔습니다.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낡은 주택은 오후 내내 텅 비어 적막만이 흘렀습니다. 텅 빈 집에 들어가는 것이 싫어서 방과 후에도 친구들과 자주 놀러 다녔지만 늘 그렇게 놀 수만은 없었겠지요. 같이 놀 친구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집에 돌아와야 하는 날이면 저는 텅 빈 집에 들어가기가 너무 무섭고 싫어서 늘 마당에서 책을 읽었습니다. 형과 부모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며, 마당의 수돗가 옆에 슬리퍼를 깔고 앉아 내리쬐는 햇살 속에서 책을 읽던 아이. 그것이 제가 기억하는 저의 어린 시절 모습입니다.
저는 지금도 그 텅 빈 집이 주던 적막감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제가 자리 잡고 앉아 책을 읽던 수돗가, 바닥에 깔고 앉던 슬리퍼, 따사롭게 저를 비추던 햇살, 그 모든 것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생각납니다. 물론 더 어린 시절에도 크고 작은 고통은 있었을 것이고, 몸과 마음을 다치기도 했겠지요. 하지만 제가 느꼈던 부정적인 감정들 가운데 이 외로움만큼 오래도록 계속되고,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 외로움이야말로 제 인생에 찾아온 첫 번째 시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흩어진 시간의 연결고리
이 시간은 사실 그다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신학교에 들어와 저 자신을 성찰하며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 바로 그 시간을 통해서 저를 당신께로 불러 주셨는지도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텅 빈 집에 홀로 있는 것이 너무 싫었던 작은 아이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마당에 앉아 집에 있는 책들을 잡히는 대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재미있는 책은 열 번, 스무 번을 읽었고 나이에 맞지 않는 어려운 책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었습니다. 그렇게 그 아이는 독서에 재미를 붙였고, 불교계 중학교에 올라가 불교 관련 서적들을 읽으며 깨달음과 진리에 대한 깊은 갈망을 지니게 되었으며, 논산 대건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사제직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만약 대건고등학교에 가지 않았더라면, 아니, 그보다 더 전에 불교 중학교에 가지 않았고 불교 서적들을 읽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책에 관심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 연결고리들 가운데 하나라도 빠졌다면 저와 사제직은 아주 먼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 모든 것은 ‘텅 빈 집에 들어가기 싫어 마당에서 책을 읽던 어린 시절의 외로움’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제 인생에 찾아온 첫 번째 시련이, 그리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그 시절이 바로 성소의 시작이라니, 너무도 역설적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너무도 깊고 심오해서, 우리는 삶에 담긴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합니다. 때로는 뒤를 돌아보아야 그 의미가 온전히 드러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깨닫는다면, 우리는 고통의 무의미함이 주는 괴로움에 몸부림치지 않고, 아직 우리에게 감춰진 하느님의 신비를 향한 희망으로 굳건히 서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언젠가 보여 주시리라는 것
문득 이집트로 팔려 갔던 요셉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창세 37-50장 참조). 늘그막에 아들을 얻었다는 이유로 요셉을 편애했던 아버지 야곱의 행위(창세 37,3 참조)는 공정하지 못한 처사일지도 모릅니다. 그 이유로 요셉을 시기하고(창세 37,4 참조), 그를 노예로 팔아넘긴 형제들의 행위(창세 37,12-36 참조) 역시 분명한 잘못입니다. 그리고 이집트로 팔려 가 노예 생활을 하던 요셉, 그에게 이 모든 일들은 크나큰 시련이요 고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없었더라면, 7년의 대기근이 닥쳤을 때 온 가족이 꼼짝없이 굶어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요셉은 이 모든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라는 것을 설명하며, 형제들이 과거에 저질렀던 잘못을 용서합니다(창세 45,1-15 참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시련에서 오는 고통을 감내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인생은 고통의 바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물론 하느님을 믿는다고 해서 이 고통의 바다가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고통과 시련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바다를 넘어가는 길은 하나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홀로 헤엄치며 전력투구하는 사람에게 바다는 고통 그 자체이지만, 사랑하는 이와 함께 믿음이라는 배를 타고 항해하는 사람에게 바다는 행복한 여정일 수도 있습니다.
시련과 고통의 의미를 물으며 몸부림치는 모든 이가 ‘지금은 그 의미를 알 수 없지만, 언젠가 하느님께서 그 의미를 밝히 보여 주시리라.’라고 희망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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