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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분 안에 만나는 자캐오 이야기와 루카 복음의 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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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긴 여정이 이제 끝을 향합니다.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 쉴 틈 없이 복음을 선포하며 걸어오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마지막 목적지인 예루살렘 가까이에 이르셨습니다. 수천 년 전,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첫발을 내디뎠던 도시 ‘예리코’. 그 현장에서 예수님께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야자나무 성읍, 예리코
예리코라는 이름은 고대 가나안어 ‘예라흐(Jerach)’에서 유래한 것으로, ‘달’이라는 뜻을 지닌 신비로운 도시였습니다. 예라흐는 당시 가나안 지역에서 숭배되던 ‘달의 신’을 가리켰습니다. 이 도시의 현대 아랍어 이름인 아리하(Ariha)는 ‘향기’ 또는 ‘향수’라는 뜻을 가지며, 오아시스의 꽃을 가리키거나 셈어 어근인 ‘바람’ 또는 ‘영혼’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리코는 기원전 9000년경부터 존재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입니다. 이 도시는 요르단 계곡에 있으며 해수면보다 약 250m 낮은 곳에 있습니다. 동쪽으로는 요르단강이 흐르고, 서쪽으로는 예루살렘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사해가 있습니다. 고대 예리코는 요르단강을 건너 메소포타미아나 아라비아 반도로 향하는 길목을 지키는 전략적 거점이었으며, 이집트와 고대 근동 문화를 잇는 가교였습니다.
토양의 염분이 높고 지형이 건조하지만, 산맥의 틈새에서 솟아오르는 풍부한 샘물 덕분에 각종 과실수가 우거진 천연 오아시스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곳을 “야자나무 성읍”(신명 34,3)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도시가 처음 성경에 등장한 것은 민수기 22장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 예리코 앞 요르단강 건너편 모압 벌판에 도착했을 때의 상황을 묘사합니다. 모압 임금 발락이 이스라엘인들을 저주하기 위해 예언자이자 점쟁이 발라암을 부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발라암은 이스라엘인들을 저주하는 대신 그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예언합니다(민수 22-24장).
이곳은 정복의 땅이기도 했습니다.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그들이 맞닥뜨린 첫 번째 관문이 바로 예리코였습니다. 당시 예리코 점령은 일반적인 군사 작전과는 다르게 하느님께 대한 “순명의 의식”이었습니다. 칼 대신 계약의 궤를 메고 뿔 나팔을 불며 성벽을 돌았을 때 예리코의 성벽은 무너졌습니다(여호 1-6장).
이제 신약의 예수님께서는 무력으로 성을 정복하는 정복자가 아니라, 잃어버린 이들을 찾으러 오신 구원자로서 예루살렘 입성 전 마지막 관문인 예리코를 지나가십니다.
이름 뒤에 숨겨진 외로움, 세리 자캐오
예수님께서는 예리코 근처에서 눈먼 이를 고쳐 주신 후 길을 서두르시고(마태 20,29-34; 마르 10,46-52; 루카 18,35-43), 그 길목에서 자캐오를 만나십니다.
자캐오라는 이름은 ‘순결한 자’, ‘죄 없는 자’를 뜻하는데, 이는 사람들이 그를 “죄인”(루카 19,7)이라고 부르는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그는 세관장이었습니다. 세리 집단의 수장이었던 자캐오는 예리코를 통과하는 수익성 좋은 무역로에서 관세를 징수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루카 복음서가 쓰이기 이전부터 로마는 직접 세금을 징수하는 관행을 중단하고, 대신 세금을 징수할 권리를 최고 입찰자에게 팔았으며, 그 입찰자는 다시 세금 징수 업무를 다른 사람들에게 하청을 주었습니다. 세율이 어느 정도 정해졌을 수도 있지만, 이는 매우 다양했고 세리들은 종종 자신들이 빼돌릴 수 있는 만큼 착복하기도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세리들에게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루카 3,13) 한 것은 세리들이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려는 경향이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당시 세리들은 이러한 부정직함 때문에 “죄인들”로 언급되곤 했습니다(루카 5,30; 7,34; 15,1; 18,13 참조). 따라서 세리들의 수장인 자캐오에게는 늘 부정적인 시선이 따라다녔습니다.
그는 부유했지만, 공동체 안에서는 철저히 소외된 존재였습니다. 누구도 그를 이름처럼 “순결한 자”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돈은 많았지만, 마음 둘 곳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배경에서 그는 단순히 예수님을 구경하려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고 싶어 하는 간절한 갈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오늘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하지만 자캐오 앞에는 커다란 장벽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자신의 “작은 키”였습니다. 그의 강렬한 열망은 그가 세리들의 수장이라는 지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무에 오르는 수고까지 감수하게 했습니다. 돌무화과나무는 평지에서 자라며 잎이 잘 떨어지지 않고, 짧고 굵은 줄기와 넓게 퍼지는 큰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르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가 예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군중”이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애쓴 것은 그의 간절함을 보여 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노력을 방해하는 군중들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어린아이들 사이에 장벽을 쌓았던 것처럼(루카 18,15), 군중은 자캐오를 예수님에게서 떼어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지점에서 걸음을 멈추십니다. 군중 속에 가려져 있던 한 사람, 세상이 죄인이라 낙인찍은 그 사람과 눈을 맞추십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이 아닌 부자, 일반 백성이 아닌 세리, 그리고 의로운 사람이 아닌 죄인으로 여겨지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
여기서 “오늘”은 단순한 시간이 아닙니다. 루카 복음에서 “오늘”은 구원이 즉시 이루어지는 은총의 때를 뜻합니다(루카 2,11; 4,21 참조). 자캐오는 서둘러 내려와 “기쁘게”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흥미로운 대비 하나를 발견합니다. 바로 앞 장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어떤 부자 권력가”의 이야기입니다(루카 18,18-27). 그는 모든 계명을 지켰지만,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슬퍼했습니다(루카 18,22-23).
하지만 “죄인”이라 낙인찍혔던 자캐오는 달랐습니다. 비방하는 군중의 목소리가 여전했지만, 자캐오는 그들의 비난 대신 예수님의 말씀에 응답했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스스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내놓겠다.”고 선언합니다. 또한 혹시라도 남의 것을 횡령했다면 “네 곱절로 갚겠다.”는 파격적인 약속까지 덧붙입니다(루카 19,8).
루카 복음이 강조하는 자선의 핵심은 “받은 것에 보답할 수 없는 이들에게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베푸는 사랑”입니다(루카 6,34-35; 14,12-14 참조). 자캐오는 이를 몸소 실천한 것입니다. 슬퍼하며 돌아간 부자와 기쁘게 재산을 나눈 죄인 세리 중, 과연 누가 구원의 문을 열었을까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자캐오를 보며 선포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루카 19,9)
이 말씀은 자캐오를 “죄인”이라 비난하던 군중을 향한 강력한 반박이자 자캐오를 위한 변호입니다.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단순히 유대인이라는 혈통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죄인의 삶을 살았을지라도, 이제는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여 신실한 행실을 보임으로써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백성임을 입증했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자캐오 한 사람을 넘어 그의 온 집안에 내렸습니다. 공동체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던 죄인이 다시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로 온전히 회복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사람의 아들”로 정의하십니다(루카 19,10).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반드시 거쳐야 했던 첫 관문 예리코에서, 예수님은 이제 자캐오 같은 “잃어버린 이들”을 구원하며 당신의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캐오의 집에 머무신 “오늘”(루카 19,5)은 “구원의 오늘”(루카 19,9)이 되었습니다.
진흙탕 속에서 비치는 별을 보듯
진흙탕 속에서도 빛나는 별을 바라볼 수 있듯이, 남들이 모두 나를 비난하고, 나 자신마저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그 굴욕의 순간에도 구원은 시작됩니다.
작은 키에, 예리코의 세관장이었고, 죄인이라고 비난받던 자캐오였습니다. 사람들이 벽이 되어 그가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을 가로막았지만,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그의 열망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자캐오는 나무 위로 올라가 그분을 보았고, 기쁨에 가득 차 자선을 베풀겠다고 약속한 뒤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 삶도 때로 자캐오와 닮아 있습니다. 잘 풀리지 않는 일, 건강 문제, 타인의 시선 등 “작은 키” 때문에, 또 때로는 사람들이 쳐 놓은 장벽 때문에 주님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이 우리가 힘을 내어 나무 위로 올라가야 할 때입니다.
나의 구원자를 만나기 위해 몸을 낮추고 나무에 올라갈 준비가 되어 있나요? 내가 가장 작아졌을 때, 비로소 주님과 눈을 맞추고 구원자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 문헌
- J. A.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I–IX: Introduction, Translation, and Notes, AYB 28, Yale University Press, New Haven (CT) – London, 2008.
- J. B. Green, The Gospel of Luke, NICNT, Wm. B. Eerdmans, Grand Rapids (MI) 1997.
- L. Nigro, Gerico. La città millenaria, Editore Ulrico Hoepli, Milano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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