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만드는 마음

영성과 신심

이야기를 만드는 마음

문학 소년, 글쓰기로 위로를 전하는 사제가 되기까지

2026. 08. 18
읽음 330

12

3

💭우리 마음에서 피어나는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전해져 위로가 되고,

또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

내 마음속에는 지금 어떤 이야기가 피어나고 있나요?

 


 

아주 어렸을 때, 내가 처음으로 상을 받은 것은 동시 대회였다. 동시童詩, “어린이다운 심리와 정서, 생활을 아름답고 짧게 표현한 시라는 사전적 의미에 얼마나 부합하는 시를 썼는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쨌든 처음으로 받은 상장을 들고 집으로 뿌듯하게 뛰어가던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만약 자녀를 키우며 아이가 살아갈 방향을 미리 정해 주고 싶다면, 아주 어려서 실력이 다들 고만고만할 때 상을 주면 된다. 그러면 그 아이는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 일이 원동력이 되어 작은 희망을 품고 살아가게 될 테니.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나 역시 첫 상장을 받아 들고는 내가 남들보다 더 뛰어난 문학적 능력을 가졌다고 믿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렇게 나의 글쓰기는 시작됐.

 

글쓰기는 이야기를 연료 삼아 또 다른 이야기를 탄생시키는 작업이므로 나에게는 경험이 필요했다. 하지만 초등학생까지의 짧은 삶에 무슨 경험이 있었겠는가. 친구와의 관계, 온 우주 같던 장난감의 세계, 흔들리는 꽃과 나무, 바람과 바다 같은 것을 보고 느꼈지만, 이런 것이 특별한 경험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게 전혀 다른 삶을 알려 주는 경험의 원천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책이었다.

 


 

산타가 두고 간 문학의 씨앗

 

썩 달갑지는 않았지만 산타들은 크리스마스 때마다 트리 아래에 책을 두고 갔고, 나중엔 동화 전집까지 가져다 놨다. 그 무거운 책 상자를 옮긴 산타의 노고를 가늠할 나이는 아니었지만(지금 생각해 보면 산타가 얼마나 짜증이 났을까 싶다), 그래도 이미 받은 선물을 읽지 않을 수는 없었으므로, 별수 없이 책을 읽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지금은 절판된 《메르헨 전집》이다.

 

55권으로 구성된 이 시리즈에는(지금 생각해도 산타의 노고에 눈물이 날 정도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깊이 있는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잘 알려진 《말괄량이 삐삐》, 《찰리의 초콜릿 공장》, 《패딩턴》이 있었고 그 외에도 상상력을 자극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공룡알이 별처럼 집에 떨어져 부화한다든가, 마법사 할머니가 이웃집에 산다든가, 몸이 티스푼만큼 줄어드는 능력이 있다든가. 나는 풍부한 이야기들 속에서 마음껏 헤엄칠 수 있었다. 첨벙첨벙.

 

마지막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은 《세계 문학 전집》이었다. 현실에서도 일어날 법한 또 다른 경험의 문이 열린 셈이었다. 이제 나는 청소년쯤 되어서야 이해할 수 있을 이야기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산타의 선물이 더 이상 도착하지 않게 되었을 때(산타할아버지는 한숨 돌리셨으려나?), 나는 어느덧 이야기를 만들고싶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면 지금까지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들의 이름, 국적이 적힌 초상화들이 나란히 걸려 있었고, 그 끝에는 주인을 찾습니다. 국적: 한국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더 이상 선물이 오지 않아 용돈으로 구입한 소설책을 손에 쥔 채, 물끄러미 그 액자를 바라보고는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소 오만하면서도 귀엽게, ‘언젠가는 내가?’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그렇게 나는 서서히 문학 소년이 되어 갔다.

 


 

사제도 결국 이야기를 한다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막 주목받기 시작한 작가들, 지금은 누구나 알고 있는 김영하, 김연수를 비롯한 여러 작가의 글을 탐독했고 자연스럽게 소설가를 꿈꾸게 되었다. 아름다운 문장이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았고 계절의 변화도, 사람의 마음도 글을 통해 표현할 수 있음을 날마다 새롭게 깨달았다. 경험하지 못한 세계는 여전히 방대했기에, 나는 소설을 통해 세상을 배웠고 점점 더 글쓰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문제는, 세상의 책을 모두 읽을 기세로 글을 탐독하며 대학 콩쿠르를 전전하던 나에게 또 다른 꿈, 사제의 길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고민하던 나에게 어느 날 어머니께서 조용히 말씀하셨다.

 

"작가가 되면 사제를 할 수 없지만, 사제가 되면 작가가 될 수 있단다."

 

그 말씀 때문이었을까. 나는 결국 사제의 길을 선택했다.

 

신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여전히 많은 책을 읽었다. 나의 세계는 더욱 넓어졌다. 철학과 신학은 때로 지루했지만 또 다른 경험의 영역이었고, 수많은 성인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가작가의 꿈은 서서히 크기를 줄여 갔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이야기들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어느덧 수년 차의 사제가 되었다.

 

그렇다면 어머니의 말씀은 옳았을까? 사제로서 살아온 시간이 쌓일수록 그 말씀이 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제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고 그런 의미에서 저마다 한 명의 작가다. 논문을 비롯한 여러 원고를 쓰는 교수 신부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나 역시 본당에 부임해 강론과 훈화를 준비하던 시절에 수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동시에 사제는 이야기를 읽는 사람이다. 사람들의 마음속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 하느님 말씀을 이야기로 풀어내야 한다. 체험을 이야기로 전해야 하며, 그 중심에는 언제나 이 있다. 지나가는 계절들, 개인의 아픔과 기쁨, 그 모든 이야기 속에서 누군가를 위로하며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 그렇다면 사제들은 모두 작가인 셈이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

 

글을 쓴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일이기도 하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전한다 하더라도, 그 안에는 반드시 창조의 과정이 들어간다. 문장의 구조를 세우고, 단어의 질감을 고르고, 감정의 농도를 조절하며 적절한 비유를 선택하는 일. 같은 체험을 하더라도 저마다 다른 문장으로 그것을 이야기할 테다. 그러한 점에서 글을 쓰는 것은 세상을 창조하는 일, 하느님의 창조로 빚어진 인간의 창의력으로 그분의 질서에 어울리는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일이다.

 

또한 글쓰기는 위로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무릇 사제가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성찰하고 그 내용에 먼저 설득되어야 한다. 그 과정을 거치지 않은 글은 공허한 문장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돌아보며 글을 쓰다 보면, 누군가를 위로하고자 시작한 글에서 오히려 자신이 위로받는 순간을 만나기도 한다. 때로는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도 있다. 비록 잠시일지라도, 내가 받았던 위로를 전하며 누군가의 눈빛을 밝히는 일은 퍽 감동스럽다.

 

글을 쓰는 것이 창조이자 위로라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마음을 어렴풋이 가늠하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시며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우리의 마음속에서 이야기들이 피어나고, 서로 말하고 듣고 쓰게 될 것을 당연히 예견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너무 어둡거나 아픈 것이 아니길 바라셨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창조물들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

 

이렇게 쓰고 나니, 전집을 들고 다니느라 고생한 산타들에게 신세를 좀 갚았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좋은 문장을 쓰지는 못하더라도 소임을 하며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그들의 노고가 헛된 것은 아닌 셈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내가 만들어 갈 이야기, 번역하게 될 이야기, 읽게 될 이야기는 또 어떤 것일까. 세상에는 아름다운 문장이 얼마나 많은가! 노벨상을 받을 형편은 안 되지만 그럼에도 내가 쓰고 듣고 만나게 될 수많은 이야기들을 생각하면 다시 마음이 두근거린다

 


 

 

명형진 신부, 문재상 신부, 방종우 신부,

심재현 신부, 은성제 신부, 이한석 신부의 신앙 이야기를 담은

《사제들의 시대 공감》

📢 지금  [가톨릭북플러스 인터넷 쇼핑몰]에서 만나 보세요!

 


 

🔗 함께 읽으면 더 좋은 아티클

 

 

 

Profile
서울대교구 사제. 로마 라테란대학교 알퐁소대학원 윤리신학을 전공했습니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며, 윤리신학을 신자들이 흥미롭고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른 분들이 함께 본 콘텐츠

시리즈8개의 아티클

NOW: 사제들의 시대 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