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특집 ④ 사랑, 그것은

가톨릭 예술

월간 특집 ④ 사랑, 그것은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2025. 0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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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을 표현하는 유용한 도구

 

현재 청소년 문화라고 하지만, 나의 학창 시절에도 다이어리 꾸미기가 유행이었다. 아니, 유행이라기보다는 당연한 일이었다고 해야 할까. 그 시기, 남학생이고 여학생이고 다이어리는 당연한 필수품이었다. 친구들과의 약속을 써넣고, 구입해야 할 것을 적고, 간단한 일기를 쓰고, 스티커 사진을 붙이고. 세상은 이런 문화를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다이어리 바인더에 꽂을 수 있는 연예인들의 사진 혹은 예쁜 속지를 판매했고 인기에 민감한 학생들은 그것을 구입해 서로 교환하곤 했다.

 

아아, 이렇게 말하면 나이 든 사람처럼 들리겠지만, 그 시절은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이었다. 삐삐나 메시지만 간단히 주고받을 수 있는 핸드폰이 있기는 했지만 그조차도 소수에게만 보급된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요즘 시대처럼 자유롭게 메시지를 주고받고 SNS를 통해 서로의 일상을 공유할 수 없었던 셈이다. 그러다 보니 그 시절은 지금과 비교하면 누군가에게 마음을 표현하거나 상대의 일상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인간은 어떻게든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존재. 그렇다면 도대체 저 소년에게 혹은 저 소녀에게 어떻게 내 마음을 전할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을 당시의 청소년들은 다이어리에서 찾았다. 앞서 말했듯 다이어리는 속지를 서로 교환할 수 있는 링 바인더 형태였으므로 마음을 전하기 용이한 도구였다. 청소년들은 단정한 글씨를 속지에 적어 서로의 마음을 교환했다.

 

그렇다면 속지에 무엇을 적었을까? ‘내가 너를 좋아해’, ‘너는 내 소중한 사람이야라고 대놓고 적으면 좋았겠지만, 그럴 만한 용기가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마음을 전달하기에 가장 좋은 도구는 시의 형태일 수밖에 없었다. 미처 직접 말로 할 수 없는 다양한 은유와 비유가 있는 감성 어린 말들의 나열은 직접적이지 않으면서도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도구였던 셈이다.

 


 

변하지 않는 사소함으로

 

그렇게 해서 학생들은 또박또박 시를 적어 서로에게 건넸다. 만약 상대가 너 왜 이런 시를 나에게 적어 줬어? 나는 너 별로야.”라고 말하면, “그냥 내가 좋아하는 시라 적은 거야. 오버하지 마.”라고 둘러댈 수 있다는 점도 한몫했으리라. 그런데 만약 서로의 마음이 통한다면? 상대는 오래오래 그 시를 읽고 또 읽어 아예 통째로 외워 버릴 것이다.

 

아아, 이것도 너무 옛날 사람 같은 말이겠지만, 그래도 말해야겠다. 카세트테이프는 너무 들으면 늘어져 버리지만, 곱게 쓰인 시는 결코 늘어지거나 사라지지 않았다. 만약 다이어리를 잃어버린다 해도 괜찮았다. 평생 그 시는 마음에 남아 지워지지 않을 테니.

 

그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하던 시는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였다. 왜 내가 이 시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누군가가 내 마음에 남겨놓은 발자국이겠지. 안 그래도 옛날 사람티를 잔뜩 낸 마당에 오래된 첫사랑을 운운하기엔 좀 민망하지만, 그렇다. 나는 내 다이어리에 단정하게 꽂힌 한 소녀의 글씨를 읽고 또 읽었다. 그렇게 이 시는 내 마음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자국을 남겼다.

 

그런데 시라는 것은 참 신기하다. 처음에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만이 와닿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청소년기를 지나 신학생이 되었고 심지어 사제가 된 지금도 그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사랑이란 워낙 고귀한 감정이어서 그런 걸까. 이제 이 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려 주는 도구가 되어 내 묵상의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 <즐거운 편지>는 크게 두 개의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그중 첫 번째 파트는 다음과 같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이보다 더 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글귀가 또 있을 수 있을까? 이는 사랑하는 이를 묵묵하게 바라보는 이의 처절한 마음을 덤덤하게 표현한다. 그 마음을 풀어 보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너를 사랑하는 내 마음은 날씨처럼 너무나 당연한 일이야. 마치 해가 뜨고 지고 바람이 부는 것처럼, 너의 평범한 일상에 공기처럼 떠 있어. 하지만 네가 괴롭고 힘들 때, 그때 나는 변함없는 그 사소함 속에서 네 이름을 가만가만 부를 거야. 네가 너무 지치지 않기를 괴롭지 않기를 바라며.’

 

이러한 마음은 인간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마음이리라. 인간을 창조하고 먼저 사랑하여 선한 길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하느님의 마음. 하지만 인간은 나약하기에 때로는 하느님을 잊고 괴로움을 느끼며 슬프게 흐느낀다. 심지어 악한 길로 나아가기도 한다. 그 괴로움을 볼 수 없어 당신의 외아들까지 내어 주시는 하느님의 마음. 그러한 하느님의 마음은 공기와도 같이 너무나도 일상적이다. 우리가 괴로움 속에서 헤맬 때 하느님은 사소함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미사 안에서, 복음 안에서, 보내 주신 이웃의 손길에서 가만가만.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이어지는 두 번째 파트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사랑은 이제 더욱 극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대를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사랑을 한없는 기다림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라는 것. 즉 이 사랑은 보답을 바라서가 아니라 한없이 기다릴 수 있기에 그저 지속될 수밖에 없는 사랑이다. 상대가 내 사랑을 받아 주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다. 나는 변함없이 그를 사랑하고 기다릴 것이니. 즉 상대를 사랑하는 것은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낼 수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수많은 기다림까지 사랑하기 때문이다.

 

성서 속에서도,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은 수없이 많은 죄를 저지른다. 이웃을 죽이고, 하느님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원하며,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분노하며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기적을 내놓으라 종용한다. 누군가를 보내 메시지를 전해도, 이집트의 탈출과 같은 거대한 기적을 베풀어도 더 큰 기적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그러한 인간을, 하느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사랑한다. 그저 그 수많은 기다림까지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죄를 저지른 인간에게 징표를 새겨 주시고 또 다른 사소한 기적들을 베풀어 우리를 살게 하시며, 외아들까지 보내 주신다.

 


 

눈처럼 내리는 사랑

 

다음은 두 번째 파트의 다음 구절.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골짜기가 우리 인간의 외롭고 힘든 세계라면 눈은 하느님의 사랑일 테다. 나약하고 힘든 시기를 보내는 인간에게 하느님의 사랑은 눈처럼 퍼부어진다. 그것을 인간이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중요하지 않다. 그저, 변함없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변함없는 사랑이 퍼부어질 뿐이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면 하느님의 사랑은 그친다.

 

하지만 반드시 그치는 이 사랑은 완전한 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눈이 그치면 꽃이 피어나고, 괴로운 시간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속에서 마치 자연의 이치처럼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또다시 환희의 시간은 가고 견디기 힘든 시간이 오고, 하느님의 사랑이 눈처럼 퍼부어지리라. 한마디로,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하다. 자연의 순환처럼 계절이 반복되듯, 언제나 변함없이 사소함 속에서 영원하리라.

 


 

즐거운 편지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는 종종 뜨거운 감정, 두근거리는 감정을 사랑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때로 세속의 사랑은 육체적인 행위를 떠오르게 하고 상대방에 대한 기대를 동반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 사랑이란 기다림이다. 설사 내 마음에 응답이 없더라도, 상대가 너무 괴롭지도 외롭지도 않기를 바라는 마음. 힘든 시기를 보내는 모습을 바라보며 여전한 사랑으로 가만가만, 이름을 속삭이는 기다림. 공기와도 태양과도 같이 일상에서 언제나 함께하는 따뜻한 마음. 그런데 이 사랑을 더욱 극적으로 드러내는 건 사실 이 시의 제목 즐거운 편지이다.

 

한없이 변함없는 기다림의 마음은 즐거움으로 표현된다. 이는 사랑의 마음이 얼마나 큰지 확실히 각인시킨다. 상대를 향한 하염없는 기다림에도 그 마음은 즐겁다. 그의 존재가 있기에 내가 사랑할 수 있으므로 즐거운 것이다.

 

이 지점에서 하느님의 사랑은 더욱 극적으로 느껴진다. 괴로워하는 인간을 보며 마음 아파하면서도 사랑할 수 있기에 즐겁다고 말할 수 있는 그 하느님 사랑의 위대함. 끝내 길 잃은 양을, 돌아온 탕자를 끌어안는 아버지의 즐거운 마음. 그렇다면 이러한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에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까? 그저 일상 속 소임에 최선을 다하는 길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그 사랑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알기에 퍽 난감하기만 하다.

 
 
Profile
서울대교구 사제. 로마 라테란대학교 알퐁소대학원 윤리신학을 전공했습니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며, 윤리신학을 신자들이 흥미롭고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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