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위가 한풀 꺾이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이는 듯한 계절입니다. 한여름이 지나간 자리, 우리 마음의 여백을 시 한 편과 함께 채워 보세요.
가을의 문턱 9월, 이달에는 시가 지닌 위로와 울림을 함께 나누려 합니다.📙 |
가을! 중후한 멋과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결실의 계절. 우리의 가을은 봄여름을 거쳐 자연이 주는 아주 멋진 색색깔의 옷을 갈아입는다.
이른 봄, 부산에서 경주 산골에 있는 대안 학교로 출근하는 날이면 도시에서 볼 수 없는 광경을 보는 행운이 온다. 땅에서는 아지랑이가 아롱아롱 피어오르고, 봄볕으로 물든 산과 들은 꽃구름과 연두 구름이 내려앉은 듯 화사하다. 매주 같은 길로 가지만, 그때마다 온갖 꽃들이 하루가 다르게 꽃망울을 터트리며 피어난다. 노란 산수유가 나를 반겨 주고, 하얀 입쌀을 뿌려 놓은 듯한 조팝나무가 뒤를 잇는다. 그다음에는 노란 민들레가 손을 흔들고, 짙은 분홍의 물봉선도 얼굴을 내민다.
자연의 시간은 색깔로 온다. 이렇게 다양한 꽃 잔치에 이어 산과 들은 푸르름이 넘쳐흘러 정열적인 짙은 여름 숲이 된다. 어느덧 수많은 꽃이 피었다가 진다. 꽃 진 자리에 맺힌 여린 열매는 모진 비바람을 견뎌 내고 자라나 탐스러운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다. 가을 들녘은 황금물결을 이루고 산에는 오색 단풍이 곱게 내려앉아 우리를 설레게 한다.
이런 대자연의 섭리를 보면서 나는 얼마나 내 주변을 설레게 했나 생각해 본다. 하지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해를 받아 마음이 힘든 날은 기도조차 잘 되지 않고, 지인에게 하소연하거나 심지어 남을 탓하고 싶어진다. 부글거리는 내 속마음을 단 몇 초나마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있으면 곧 기적 같은 평온이 찾아오지만, 그 시간을 참아 내기가 쉽지 않다.
내 안에서 새 나간 말은 돌고 돌아 살이 붙어 더 큰 오해를 부르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기도 한다. 나는 잘못한 게 없다며 상대방을 비난할 때도 있다. 이럴 때는 성전에 앉아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 묵주를 돌리는 손짓도 기계적일 뿐, 계속 분심이 파고든다. 주님은 나의 변명 같은 기도를 들어주실 리 없다.
그러면 마음을 잠시 다른 데로 돌려본다. 어찌할 수 없이 힘든 내 마음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가장 빠른 묘약! 언제 어디서나 꺼내 볼 수 있는 책 한 권. 나는 늘 가방에 그리 두껍지 않은 시집 한 권과 레지오 수첩을 가지고 다닌다. 평온한 상태일 때는 래지오 수첩을 꺼내 신심 기도를 바친다. 그러나 마음이 상하여 기도가 되지 않을 때는 내가 좋아하는 이해인 수녀님의 시집을 꺼내 먼저 마음을 안정시켜 본다. 수녀님의 시는 언제나 나를 위로하고,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 준다. 그제야 마음을 너그럽게 가지려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익어가는 가을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가 익어가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도 익어가네
익어가는 날들은
행복하여라
말이 필요 없는
고요의 기도
가을엔
너도 나도
익어서
사랑이 되네
─ 《작은 위로》, 열림원
우리 본당과 가까운 곳에는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가 있다. 가끔 이곳에 계시는 이해인 클라우디아 시인 수녀님을 뵈러 간다. 우리 본당과 가깝기도 하고, 내 본명이 성베네딕도 아빠스 성인을 수호하는 베네딕다인 탓인지 힘들 때 찾아가면 입구에 들어서기만 해도 평온이 찾아온다. 조금 올라가면 왼쪽에 성모상이 있다. 나는 이곳에 멈추어 서서 짧은 기도를 한다. 그 순간 내 몫의 가을 열매를 맞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사계절, 각 계절의 개성 넘치는 변화를 마주하며 생각해 본다. 이제 인생의 가을 문턱에 들어서고 있는 나는 어떤 열매로 익어 가는 중일까? 열정의 빛을 간직한 채 나무 끝 추위를 견디며 대롱대롱 익어 가는 말랑말랑한 주황의 감 홍시일까? 내 진심을 남에게 보여 주지 않으려는 아주아주 딱딱한 호두 껍데기 속 호두알 같을까? 가을의 황금 들판에 고개 숙인 겸손의 벼 이삭일까? 그러나 무언가가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는 기도는 욕심이란 걸 깨닫게 된다. 억지로 그 무엇을 바라는 마음으로 영글어 가지는 말아야지!
인생의 가을 초입에 접어든 내게 주님께서 내려 주신 열매! 이것이 어떤 열매이든 잘 추수해서, 긴긴 겨울이 오면 주님께서 주신 사랑으로 이웃에 나누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