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특집 ② 빛이 되는 사랑으로

가톨릭 예술

월간 특집 ② 빛이 되는 사랑으로

기도로 살아 내고 시로 꽃피운 이해인 수녀의 삶

2025. 09. 02
읽음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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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은 작고 사소한 것의 가치를 발견하고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해인 수녀는 작고 사소한 것을 소중하게 바라보며, 맑고 단정한 언어로 노래해 온 대표적인 시인입니다. 자연과 신앙, 소박한 일상 속의 사랑을 시에 담아 우리의 삶을 따뜻하게 적셔 온 그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자 가톨릭 최고의 시인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힙니다.

 

1976년 출간된 그의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는 내년이면 초판 발행 50주년을 맞습니다. 반세기 동안 조용한 기도와 같은 시어로 위로와 희망을 전하며 많은 이들의 마음을 밝혀 온 이해인 수녀. 다가오는 가을,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 보려 합니다. 📙

 


 

시인의 길이 시작되다

 


 

이해인 수녀에게 시인의 삶은 특별한 계기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고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시와 가까이 지내던 그는 백일장에서 상을 받았고, 그 경험은 시와 인연을 꾸준히 이어 가는 작은 발판이 되었습니다. 1964년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입회한 이후에도 그는 수도원에서 꾸준히 시를 써 내려갔습니다. 그러다 1970년에 가톨릭출판사 어린이 잡지인 《소년》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습니다.

 

50년 전,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가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임남훈 관구장 수녀의 권유 덕분이었습니다. 그녀의 시 10편이 홍윤숙 시인에게 전해졌고, 출간 권유를 받은 이해인 수녀는 망설이다 결국 책을 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종신 서원을 기념해 수도원 가족끼리 소박하게 돌려 볼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당시 한 일간지에 소개된 이후 현재까지 그의 시집은 50쇄를 훌쩍 넘는 인쇄 기록을 남겼습니다. 수녀가 머무는 부산 수녀원은 광안리 민들레의 영토로 통할 정도였습니다. 실제로 한 초등학생이 주소를 부산 광안리 민들레의 영토 수녀원 이해인 수녀라고만 주소를 적어 보낸 편지가 무사히 도착한 일화도 있습니다. 

 


 

서고 속의 보물


 

이해인 수녀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보물은 독자들이 보내 온 편지입니다. 이해인 수녀의 글방 서고에는 전국 각지에서 날아온 수많은 편지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그의 시를 읽고 편지를 쓰던 소년, 소녀들이 이제는 부모가 되어 자녀들과 함께 그의 시를 읽습니다. 세대를 이어 독자와 함께하는 관계는 그의 시가 가진 힘을 잘 보여 줍니다.

 

그 힘은 고통의 시간에도 이어졌습니다. 이해인 수녀는 2008년에 대장암 3기 판정을 받아 투병 생활을 했지만, 희망찬 마음으로 아픔을 이겨 냈습니다. 수술과 수차례의 항암, 방사선 치료도 소풍 가는 길처럼 즐겁게 받아들이며 밝은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고통을 겪으며 내게 주어진 하루가 전 생애라고 생각하니 사람과 자연을 보는 것이 다 새로워졌다.”는 그의 고백처럼 고통은 오히려 새로운 깨달음이 되었습니다. 투병 중에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고, 그 결실로 2011년 산문집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를 펴냈습니다.

 

그에게 편지는 여전히 가장 깊은 위로이자 힘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특히 한 독자에게서 받은 편지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어린 딸아이와 함께 이해인 수녀의 새 시집을 사러 갔던 기억이 새록새록 한데, 이제는 세월이 흘러 그 딸이 이제 중학생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담긴 편지였지요. “한마디로 말씀드릴 수 없는 선한 영향을 저는 수녀님께로부터 오랜 세월 지속적으로 받으며 살았습니다.”라는 오랜 독자의 고백을, 이해인 수녀는 가슴 깊이 간직하며 살아갑니다.

 


 

시인의 글은 현재 진행형


사진 ⓒ 이해인 수녀

 

이해인 수녀는 이 외에도 《내 혼에 불을 놓아》,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시간의 얼굴》, 《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 《작은 위로》, 《이해인의 햇빛 일기》 등 많은 시집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최근에는 삶의 지혜를 담은 산문집 《인생의 열 가지 생각》, 인생의 단상을 따스히 엮은 《소중한 보물들》, 불안과 우울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 건네는 위로 《꽃잎 한 장처럼》, 자연을 주제로 삼은 60편의 시를 엄선해 영어 번역과 함께 실은 《눈꽃 아가》 등을 통해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그 출발점이 된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는 내년이면 초판 발행 50주년을 맞이합니다. 1970년대 한국 문단에 청량한 바람처럼 다가온 이 시집은, 순수하고 깊은 신앙적 언어로 수많은 한국인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하며 이해인 수녀 문학 세계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이를 기념하며 특별한 책과 행사가 준비될 계획이라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시에 담긴 사랑과 성찰

 

이해인 수녀는 소박한 일상에서 길어 올린 사랑과 신앙적, 영적 성찰을 시에 담아 왔습니다. 그의 언어는 맑지만 강한 울림으로 독자의 마음을 위로하고 삶의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하게 합니다. 그의 시는 결국 일상에서 발견하는 큰 사랑을 증명하는 삶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민들레의 영토》에 수록된 <당신을 위해 내가>를 소개해 드립니다.

 

캄캄한 밤

등불도 없이

창가에 앉았으면

 

시리도록 스며드는

여울물 소리

 

먼 산

안개 어린 별빛에

소로시 꿈이 이울어

 

깊이 눈 감고 합장하면

이밤사 더 밝게

타오르는 마음 길

 

인고의 깊은 땅에

나를 묻어

당신을 위해 꽃 피는 기쁨

 

어느 하늘 밑

지금쯤 누가 또 촛불 켜

노래 날릴까

 

차운 밤 밀물 소리

살포시 안개 속을

오시는 당신 위해

 

남은 목숨

고이

빛이 되는 사랑이여

 

이 시는 이해인 수녀의 시 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작품이자 《민들레의 영토》에 수록된 초기 작품 중 한 편입니다. 어둠 속에서 등불 없이 앉아 기도하는 이의 마음, 그리고 타인을 위해 꽃피우는 헌신을 노래합니다. 삶의 고통과 기다림을 기도로 감싸안고, 자신을 내려놓음으로써 더 깊은 사랑과 기쁨을 피워 올리는 길을 보여 주는 듯합니다. 그 길은 자신을 위한 길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하느님을 위해, 세상을 위해 내놓는 삶의 자리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는 단순한 고백을 넘어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묻는 하나의 초대처럼 다가옵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시를 따라가다 보면 삶의 어둠조차 사랑으로 변할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해인 수녀가 평생에 걸쳐 걸어왔으며, 앞으로 걸어갈 길. 작고 사소한 것에서 발견한 큰 사랑의 길이 바로 이 시의 울림 속에 담겨 있습니다. 올가을, 이 시가 여러분의 하루를 조금 더 깊고 따뜻하게 만들어 주기를 기도합니다.

 

 

Profile
신앙의 깊이를 더하고, 삶의 영감을 주는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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