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특집 ① 이토록 묘한 우리는

가톨릭 예술

월간 특집 ① 이토록 묘한 우리는

아무도 걸어가 본 적이 없는 그런 길은 없다

2025. 09.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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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위가 한풀 꺾이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이는 듯한 계절입니다.

한여름이 지나간 자리, 우리 마음의 여백을 시 한 편과 함께 채워 보세요.

 

가을의 문턱 9, 이달에는 시가 지닌 위로와 울림을 함께 나누려 합니다. 📙

 


 

살다 보면 다른 사람은 다 잘 사는 것 같고 나만 힘든 것처럼 느껴진다. 유독 나만 힘들고, 고통스럽고, 아픈 것 같다. 거리를 걷다 보면 다들 키도 크고 멋있게 입고 있는데, 나만 키도 작고 후줄근하게 입고 다니는 것 같다.

 

조카가 어렸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문득 조카가 말했다.

 

엄마, 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뭔데?”

왜 우리 집에는 TV나 길에서 보이는 예쁜 여자가 없어?”

 

형수는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잘생기고 멋진 남자는 있어?”

아니.”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고 우리 집으로는 한 명도 안 왔을까?”

 

형수님에게 이 이야기를 듣고,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우리 집에만 잘생긴 사람이 없을까.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우리 집만 그런 게 아니었다. 내 친구 집도 우리 집과 사정이 비슷했다. 다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렇다면 형수님 말처럼 잘난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잘생기지 못한 것도 서러운데, 종종 아프기까지 하다. 아파서 병원에 가 보면 죄다 아픈 사람들뿐이다. 그런데 거기서 다 같이 있다 보면 신기하게 마음이 편해진다. 온갖 인상을 쓰며 곁에서 대기하는 환자들을 보니 , 나만 아픈 게 아니구나. 나보다 더 아픈 사람도 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나의 아픔이 위로받는다. 사람은 묘한 존재다. 같이 아프면 덜 아프다. 같이 가난하면 덜 힘들다. 누군가 나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나면 사는 것이 덜 고통스러워지는 존재가 사람이다.

 

작고한 작가 박완서 선생님은 한 모임에 갔다가 겪은 일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 모임에서 한 여성은 교통사고로 골절상을 입은 아들 이야기를 하며 세상이 무너질 듯 걱정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박완서 선생님은 그 말을 듣고 있다가 말했다. 자신의 아들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말이다. 그 순간 당황한 얼굴로 황급히 방을 나서는 그 여성의 얼굴에 비치던 안도와 기쁨을 보았다고 선생님은 회고했다. 우리 아들은 팔이 부러졌지만 저 집 아이는 지금 세상에 없다. 형언할 수 없이 참담한 다른 이의 이야기는 나의 불행을 조금은 가볍게 해 준다.

 

그래서 우리는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같이 사는 존재. 나만 못 생기고, 못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나를 살 만하게 해 주는 진정제이자 치료제가 된다.

 

괴로움의 나눔을 통해 이루는 삶의 위안과 치유를 이야기한 시 가운데 베드로시안의 〈그런 길은 없다〉는 단연 으뜸이라고 할 만하다. 이 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런 길은 없다

               

아무리 어둔 길이라도

나 이전에

누군가는 이 길을 지나갔을 것이고,

아무리 가파른 길일라도

나 이전에

누군가는 이 길을 통과했을 것이다.

아무도 걸어가 본 적이 없는

그런 길은 없다

나의 어두운 시기가

비슷한 여행을 하는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기를

 

30년 넘게 부부와 가족 상담을 해 오면서, 나는 자기가 제일 불행하고 힘들게 산다고 믿는 사람들을 수없이 만나 왔다. 고통과 아픔은 서로 비교할 수 없기에, 누구에게나 자신의 힘듦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절실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런 부부와 가족을 만날 때 한 번씩 베드로시안의 시를 떠올려 적절한 타이밍에 낭송해 주곤 했다. 그러면 많은 경우 분위기는 차분해진다.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사실이 이내 위로로 다가오고, 어딘가 모를 따뜻함이 우리 주위를 감싼다.

 

차를 몰고 집으로 가는 퇴근길, 끝없이 늘어선 차량 행렬에 답답함이 밀려오곤 한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내비게이션 속 도무지 줄어들지 않는 예상 도착 시간, 끼어드는 차에 양보하다 보면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몇 해 전 노을이 몹시 예쁘게 지던 퇴근길이었다. 어차피 늦을 바에야 마음을 편하게 가지자며 스스로를 어르던 중 앞차 운전자의 희끗희끗 벗겨진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봐도 피곤한 기색을 뒷머리에 고스란히 간직한 그는 고개를 좌우로 힘겹게 돌리고 있었다. 순간 내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저 아저씨는 지금 좋을까?’

 

그럴 리가 없다. 저 아저씨라고 교통 체증을 좋아할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내 옆 차 운전자도, 내 뒤차 운전자도 이 상황이 달가울 리가 없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기분 좋을 사람이 이 길 끝까지 단 한 명이라도 있을까.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하자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문득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참말로 다 고생이 많네.”

 

그랬다. 그날 퇴근길 교통 체증 길에서 차를 모는 사람들은 다 고생이 많았다. 그 전날도 그다음 날도 사람들은 고생이 많았고, 앞으로도 많을 것이다. 그날 이후, 내가 도로에서 느끼는 스트레스는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차가 막히면 자동으로 혼잣말을 하게 되었다.

 

저 사람은 좋겠나.”

 

옛사람들은 인생은 고통의 바다, 고해라고 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우리는 고통의 바다, 상심의 바다에서 버둥거리며 있는 힘껏 살아가는 가련한 존재다. 그런 우리는, ‘나만 힘들다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때 왜인지 살아갈 힘을 얻는 묘한 존재다.

 

나만 힘든 게 아니다. 우리가 다 힘든 거다. 다 버티고 견뎌 나가는 거다. 그래서 안쓰럽고 대단한 게 우리다. 아무도 걸어가 본 적이 없는 그런 길은 없다. 이 사실을 알고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까지 위로할 줄 아는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을 진짜 어른이라 불러도 좋다.

 
 
Profile
나우리가족상담소 소속으로 사회복지실천, 상담학을 전공했습니다. 현재는 CPBC 라디오 상담 프로그램에 5년째 고정 패널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말을 발견하고 보급하는 일이 저의 취미입니다. 이러한 관심을 바탕으로 《그 말이 듣고 싶었어》 등 '말'에 대한 다양한 책을 집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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