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군 복무와 선교에 나서는 가톨릭대학교 신학과 24학번 신학생들을 위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은 사제 양성의 길을 걷는 신학생(학사님)과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 학생이 함께 배움의 공동체를 이룹니다. 24학번 신학생은 서울대교구 8명과 의정부교구 3명으로 모두 11명이며, 이들은 2학년을 마치고 2026년부터 군 복무와 선교에 나섭니다. 이제 새로운 자리에서 순명과 인내로 자신을 내어놓을 24학번 신학생들을 위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성 가브리엘 포센티의 전구를 청합니다. 이들이 군대와 선교 현장에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잃지 않고 성령의 위로와 보호 안에서 굳건히 지내도록 함께 빌어 주시길 바랍니다. |
가브리엘 포센티 성인의 생애
가브리엘 포센티 성인은 이탈리아 아시시에서 13남매 중 열한 번째 아이로 태어나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집안은 넉넉했고 신심도 깊었지만, 그는 네 살에 어머니를 먼저 떠나보내고 형제자매의 이른 죽음까지 겪으며 삶의 덧없음을 일찍 깨달았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이탈리아의 스폴레토에 자리 잡은 뒤 예수회 학교에서 공부했는데, 총명하고 붙임성이 좋았다. 또한 그는 문학과 연극, 춤을 좋아하는 청년이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은 ‘일 다메리노(세련된 청년)’와 ‘일 발레리노(춤꾼)’였다. 겉으로는 사교적이고 쾌활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성모님에 대한 사랑과 가난한 이들을 향한 연민, 성사에 대한 애정이 단단히 자리했다. 병이 들 때마다 “나으면 수도자가 되겠다.”라고 서원했지만, 막상 병이 회복되면 다시 세속으로 기울곤 했다.
결정적인 전환은 1856년 8월 22일, 스폴레토의 성모 행렬이 지나가던 순간에 왔다. 성모 성화 앞에서 그는 내적 부르심을 또렷이 들었다고 고백한다.
“프란치스코, 너는 세상을 위해 살 사람이 아니다. 서둘러 수도회로 가라.”
아버지는 “너는 고난회의 엄격함을 견디기 어렵다.”라며 만류했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수도회에 들어가 수련을 시작했고, 9월 21일 수도복을 입으며 ‘통고의 성모의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1857년 첫 서원을 한 뒤로는 ‘작은 것에서 완덕을’이라는 마음가짐으로 규칙과 형제 사랑을 기쁘게 실천했다. 장상이 건강을 염려해 과도한 단식과 보속을 말렸을 만큼, 그의 열심은 언제나 순명과 온유 안에 머물렀다.
그의 수도 생활은 화려한 표징보다 ‘내적인 충실’로 빛났다. 황홀경이나 비범한 현상 대신, 매일의 작은 의무를 성실히 해내는 평범함이 곧 그의 비범함이었다. 성모님의 통고와 주님의 수난을 사랑으로 묵상하며, 잦은 병고까지도 원망이 아닌 봉헌으로 받아 살았다. 1859년부터 사제품을 준비했지만 결핵이 악화되었고, 그럼에도 학업을 이어 가며 자신을 다듬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사제 서품을 받지 못한 채 1862년 2월 27일, 스물네 살에 주님 품에 들었다. 임종 순간 그의 얼굴은 환히 미소 지었고, 곁에 있던 형제들은 “성모님께서 데려가셨다.”라고 이야기했다.
그의 거룩한 삶은 교회 안에서 확인되었다. 그는 1908년 비오 10세 교황님에 의해 시복되었고, 1920년 베네딕토 15세 교황님에 의해 시성되었다. 같은 해 베네딕토 15세 교황님은 그를 ‘전 세계 젊은이들의 새로운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주님 안에서 우리 다시 만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은 다양한 사람이 한 학년을 이루어 함께 공부한다. 내가 입학하기 전만 해도 한 학년에 일반 학생이 열 명 남짓이었지만, 요즘은 그 수가 열 명을 훌쩍 넘는 해도 있고 신학생보다 많은 학년도 있다. 우리 학년은 신학생·수도자·일반 학생이 대략 1:1:1의 비율을 이루어 비교적 균형이 잘 잡힌 편이다. 다만 타 교정 복수 전공, 휴학, 자퇴 등의 이유로 상시 함께 지내는 일반 학생은 대략 다섯 명 안팎이다. 군 복무 전인 이른바 ‘본반(대체로 20~23세)’ 학사님들은 누나 동생처럼 지내고, 군 복무를 마친 ‘별반’ 학사님들은 형 동생처럼 지낸다. 무엇보다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공동체의 기본이다. 평신도 학생은 사제가 되어갈 형제들의 길을 이해하고 도와야 하고, 신학생들도 그 배려 안에서 서로를 세워야 한다. 그런 적정한 경계와 예의를 지키며 우리는 가까이 지냈다.
특히 대신학교에는 학기 말마다 ‘송별 음악회’가 열린다. 학교가 신학대학과 대신학교로 이원화되면서 수도자와 일반 학생은 참여할 수 없게 되었지만, 동기 학사님들은 음악회 전날 미리 무대를 준비해 우리에게 먼저 들려주었다. 학사님들이 영화 <위키드>의 OST ‘For Good’을 불러 주었을 때에는 괜스레 눈물이 났다. 단지 이별이 아쉬워서만은 아니었다.
신입생 OT에서 처음 만나 “누나”, “누님”이라 부르며 먼저 장난을 걸어오던 순간, 아플 때면 “기도할게.”라고 건네던 말, 자판기 앞에서 “뭐 먹을래?” 하며 카드를 먼저 내밀던 손길, 외출과 전자기기가 제한된 생활 속에서 소소한 부탁을 하며 “고마워”라며 쥐여 준 간식 카드…….
쉬는 시간마다 함께 산책하고 장난치고, 학장배 축구 대회에서 목이 쉬도록 응원하고, 눈이 오는 날엔 어린 시절로 돌아가듯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었다. 때로는 영적 고민을 진지하게 나누고, 공부가 막히면 선뜻 옆에서 도와주던 모습까지……. 그 모든 장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무엇 하나 놓치기 아쉬운 시간은 우리가 단순한 동기가 아니라 한 몸의 교회로 묶여 있음도 깨닫게 해 주었다.
이제 학사님들은 각자 파견지로 흩어진다. 별반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복귀하겠지만, 본반은 조금 더 먼 여정을 걷게 될 것이다. 우리가 방학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누던 약속이 있다.
“한 명도 빠지지 말고 복귀해야 해.”
이제는 진심으로, 더 길어진 시간 위에 또렷이 적어 본다. 모두 무사히 돌아와 좋은 사제가 되어 주님이 맡기신 자리에서 충실히 봉사하기를, 아프지 말고 다치지 말고 믿음 안에서 더 단단해져 돌아오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평신도 일꾼과 사제가 서로의 동반자가 되어, 낮은 자리에서 같은 방향으로 함께 걷는 날을 고대한다. 지난 2년 동안 우리가 나눈 눈물과 웃음, 기도와 응원, 그 모든 작은 날들이 다시 만날 그날을 비추는 등불이 되기를 바란다. 주님 안에서 우리, 꼭 다시 만나자!
젊은이들이 그 갈망에 응답하여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하소서. 주님, 슬기로운 이들을 많이 부르시어 주님께 자신을 봉헌하여 복음의 완덕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또한 주님의 몸인 교회에 봉사하며 도움과 사랑을 애타게 바라는 이웃들에게 헌신하게 하소서.
- 성소를 위한 기도 中 -
🔗 함께 보면 좋은 아티클
- [조남구 마르코 신부]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 되기
- [김윤우 안젤라 메리치] 카를로 아쿠티스 성인과 함께, 은총의 길을 찾아서
- [이인섭 아우구스티노 신부] “신학 공부를 고민 중인 분들은, 과연 자신에게 가장 참되고 아름다운 게 무엇인지 성찰해 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