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게 살고 싶은데요

신학 칼럼

가난하게 살고 싶은데요

그리스도의 가난 속에서 발견하는 빛과 사랑

2025. 12.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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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5, 프랑스 리옹의 론강이 범람해서 라 기요티에르라는 지역에 살던 가난한 이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 지역을 담당하던 성 안드레아 성당의 젊은 보좌 신부, 앙트완느 슈브리에 신부님은 수재민을 돕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셨습니다. 당시 가난한 이들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했고, 그 삶을 직접 목격한 슈브리에 신부님은 큰 충격을 받으셨습니다. 이 체험 이후 신부님께서는 1856년의 성탄 밤, 아기 예수님께서 오신 구유 앞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헌신하겠다.’라는 회심에 이르게 됩니다.

 

그날의 회심 이후 슈브리에 신부님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살아가기 위해 전력을 다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직접 봉사하는 삶을 살기도 하셨지만, 결국 당신의 진정한 성소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직접적인 활동을 넘어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제를 키워 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셨습니다.

 

하지만 신부님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이들의 우려와 반대에 직면해야 했고, 자신이 올바른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끊임없이 고뇌해야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고행과 극기로 신부님의 건강 역시 나빠졌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실 무렵에는 마치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 같은 절망에 시달리셨습니다.

 

하지만 신부님께서 만드신 프라도 사제회, 가난한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이 가난한 사제들의 모임은 오늘날 프랑스 리옹 교구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꽃피우고 있습니다. 저 역시 신학생 시절부터 프라도 사제회의 정신에 매료되어 지금도 그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유학으로 인해 잠시 양성을 그만둬야 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다시 한국에 돌아와 양성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그리고 지난 202499, 정식으로 프라도 사제로 살아가고자 대전교구청 경당에서 유기 서약을 했습니다. 이 지면을 통해 저의 유기 서약 청원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글이지만, 서약 청원서의 내용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기에 부끄러운 마음이 가득하지만, 그래도 이런 삶을 지향하는 많은 사제가 세상에 있다는 것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유기 서약 청원서

 

2011112, 사제품을 받으며 제가 선택한 서품 성구는 요한 복음 1334절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서품 성구가 완전한 하나의 문장이 아닌 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주님의 새로운 계명 가운데,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는 명령을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1856년의 성탄절에 슈브리에 신부님께서 구유 앞에서 바라보신 것은 아마도 그 사랑이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가난과 겸손, 온전한 신뢰와 자유로움의 원천이 되는 신비를 슈브리에 신부님께서는 구유 안에서 발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유는 성찬례와 십자가로 이어져 슈브리에 신부님을 그 가난으로 이끌었습니다. 신성을 내려놓고 인성을 취하신 성자의 강생,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 당신을 내려놓으시는 그분의 자기 비움, 성체 안에서 당신의 모든 것을 선사하시는 그분의 가난은 슈브리에 신부님을 매료시켰고, 그 삶을 따르도록 초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드러난 이 가난은 결국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든 것을 내어 줄 수밖에 없기에, 가난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고 철저하게 가난해지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가난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슈브리에 신부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가난 속에서 빛을 발견하셨습니다. 평생 그 가난을 가르치고 따르셨습니다. 그 가난으로 다른 사도들을 양성하셨습니다. 가난 속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분을 그렇게 살아가시도록 이끌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바라보고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사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그 사랑으로 부르고 계심을, 저의 사제직 여정을 통해 강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사제품을 받고 1년 반 동안 보좌 신부 생활을 하며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받았고, 저 역시 많은 사랑을 주었습니다. 제게 맡겨진 이들은 너무도 사랑스러운 사람들이었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사랑하며 저는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행복하다.’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보좌 생활을 마치고 유학하던 기간에 카리타스학을 공부하며 사랑에 대해 더 깊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왜 사랑해야 하는지, 그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배우며 사랑에 대한 이해를 더 넓혀 갔습니다. 너무도 사랑스러운 이들이라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이들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임을 느꼈습니다. 사랑은 단지 감정만이 아니며, 의지와 노력까지 포괄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또한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본당 사목을 하며 내가 주고 싶은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이에게 진정으로 좋은 것을 주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 방식이라는 사실을 배워 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저를 끊임없이 사랑으로 부르고 계시고, 저에게서 그 사랑을 원하고 계십니다. 신학교에서의 양성을 통해, 그리고 사제로서의 삶을 통해 그런 부르심을 점점 더 강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그 사랑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슈브리에 신부님께서 구유를 통해 발견한 그 사랑을 바라보기를 희망하고 있지만, 여전히 온전히 바라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정작 저는 더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덜 가난한 사람을 향하고자 합니다. 사랑하기 어려운 이들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이들을 먼저 사랑하고자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저 자신을 먼저 사랑하며, 가난해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아직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나약한 저에게 프라도는 큰 힘이 됩니다. 구유에 누운 한 아기의 가난에서 진정한 사랑을 발견했던, 그리고 그 가난과 사랑에 투신했던 슈브리에 신부님의 삶은 저에게 한 줄기 빛이 됩니다. 십자가를 통해 자신을 바치는 죽음을 바라보며, 감실을 통해서는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는 삶을 바라보며 희생과 내어 줌의 삶에 투신하셨던 슈브리에 신부님의 삶은 저를 이끌어 줍니다. 그분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따르려 했던 것처럼 저 역시 주님을 바라보기를, 그분의 가난과 죽음과 희생 안에서 드러난 그분의 사랑을 따르기를 바랍니다.

 

창설자 신부님의 삶과 글뿐 아니라 함께 프라도의 길을 걸어가는 동료들 역시 제게 큰 힘이 됩니다.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동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그들과 함께 같은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안을 느낍니다.

 

이제까지 제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홀로 주님을 따르는 길은 너무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저는 참으로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이며, 언제라도 넘어질 수 있는 존재임을 느낍니다. 하지만 형제들과 함께라면 이 길을 조금 더 잘 걸어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사랑은 행복한 일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사랑은 자신을 포기하는 아픔을 동반합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힘겹지만, 그 사랑 없이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저는 사랑하기를 원하고,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사랑으로 인해 가난해지기를 원하고 가난을 통해 더 가까이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신비를 알고 따르기를 원합니다.

 

저 혼자서는 결코 걸어갈 수 없는 길이지만,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과 교구의 형제 신부님들, 그리고 프라도 성소에 응답한 프라도 형제들과 함께라면 이 길을 걸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느낍니다. 스스로 가난을 택하심으로써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프라도 형제들과 함께 바라보고, 따르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한없이 부족한 저에게 당신을 바라보고 따를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청하며, 저 문재상 안드레아는 프라도 유기 서약을 청합니다.

 

유기 서약일 202499

서약자 문재상 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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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대전교구 사제. 독일에서 카리타스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생을 양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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