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이 하 수상하다

신학 칼럼

시절이 하 수상하다

오늘날의 가톨릭 교회와 정치에 대하여

2025.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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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년은 시절이 하 수상하다.”라는 탄식이 절로 나오는 한 해였습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수많은 불법을 감행했고, 정당한 법 집행에 맞서 버티다가 결국 구속되었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이 이에 반대하거나 지지하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 거리로 나섰고, 진영에 따라 때로는 기쁨의 환호가, 때로는 슬픔의 탄식이 터져 나왔습니다. 정치인들은 저마다 자신이 속한 정당에 따라, 자신이 선 위치에 따라 날 선 비방을 쏟아 내기도 했고, 누군가를 옹호하는 방패막이가 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저를 슬프게 만든 것은 너무도 많은 사람이 옳고 그름, 공정과 신의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집단,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의 유불리만을 따지며 행동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유사 이래로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무기로 삼아 지상의 지배 영역을 늘려 왔습니다. 그리고 한때는 이성이 인류를 더 나은 방향으로만 이끌 것이라고 믿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1,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을 겪으며, 아우슈비츠의 학살을 목도하며, 수많은 지성인은 인류가 과연 진보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자문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의문을 토대로 전체주의가 무너진 자리에 허무주의와 실존주의가 자라났습니다. 인류는 과연 진보하고 있을까요? 어쩌면 이 질문은 현대 한국 정치사에도 꼭 맞는 질문인지도 모릅니다. 한국의 정치는 발전했을까요? 발전하고 있을까요? 외적-양적으로는 눈부신 경제적, 문화적 성장을 거둔 한국이지만, 내적-질적으로 정치적, 사상적 성장이 이루어졌는지 쉽사리 답하기 어렵습니다.

 


 

내 편, 아니면 남의 편

 

한국의 정치에는 이성적인 소통과 토론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단지 당파 싸움과 파벌 싸움에만 매몰되어 누가 내 편이고, 누가 내 편이 아닌지 편 가르기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선거 때도 후보자의 개인적 역사와 인품, 공약과 정책을 살펴보기보다는, 자신이 지지해 온 정당만을 보고 투표하는 일이 너무나 빈번합니다. 특정 정당을 절대적 진리처럼 믿는 이들도 많습니다. 이들에게는 사실 관계나 정의보다는 내 편 아니면 남의 편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더 슬픈 것은 이러한 상황이 더 나빠지면 나빠졌지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오늘날의 혼란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우슈비츠 참사를 겪었던 유럽 대륙은 난민 문제를 경험한 이후, 대안 우파의 부상을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국민연합(RN)도 점점 높은 득표수를 얻고 있고, 독일의 대안 우파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지난 선거에서 창당 이래 가장 높은 지지율을 얻기도 했습니다. 미국 역시 정치적 양극화가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양측의 지지자는 점점 더 맹목적으로 서로를 지지하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후보자에 대한 비방을 넘어서서 목숨을 노린 테러까지도 자행되었으며, 과격한 폭력 시위도 빈번하게 발생했습니다.

 

정치적 긴장뿐만 아니라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위협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적적으로 휴전 협정을 맺기는 했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는 총탄과 포탄이 끊임없이 오갔고,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어 갔습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는 여전히 전쟁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종교적 무관심과 정치의 종교화

 

한 가지 재미있는 현상은, 오늘날 세계적으로 무신론자나 종교적 무관심자들이 점점 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종교에 관심이 없다는 사람이 늘고 있지만, 동시에 정치를 종교적으로 맹신하는 사람의 숫자 역시 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치가 종교화되어 가는 것이지요. 사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동물입니다.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에 자신을 의탁하고 그 안에서 평화를 추구하는 것, 그러한 종교심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종교라는 이름의 전통이나 조직 체계를 거부하는 많은 이들이 맹목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지키는 모습은 오늘날 더 이상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정치, 경제, 문화적 성향에 따라 특정 정당을 선택하고, 그 정당을 맹신하는 것, 어쩌면 오늘날 종교적 광신이 사라진 자리에 정치적 맹신이 들어선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러한 정치적 극단주의를 정치의 종교화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 안에서 교회는 과연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까요? 일부 종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특정 정치 세력과 결탁하여 세를 불리는 길은 우리의 길이 아닐 것입니다. 저는 우선 우리가 정치의 종교화과정을 자기 쇄신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종교에 무관심해지고 있고, 종교가 아니라 정치를 새로운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종교 인구는 해마다 지속적으로 줄어 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흐름 속에서도 여전히 빛은 있습니다. 구약의 역사 안에서 바빌론 유배 시절, 바빌론으로 끌려갔던 권력층을 통해서가 아니라, 유다 땅에 남겨진 무지렁이 백성들을 통해 야훼 하느님의 역사가 이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역설적으로 오늘날 교회 안에 남겨진 이들을 통해 하느님의 역사가 쓰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맹목적이고 광신적인 믿음이 사라진 그 자리에, 어쩌면 가장 작고 가난한 모습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께서 더 고요한 찬란함으로 빛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 안에 존재했던 맹목과 광신이 사라질 때, 내 편과 네 편을 나누는 편 가르기가 사라질 때, 그 자리에 하느님의 사랑만이 존재할 때, 우리는 그분의 뜻에 따라 존재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우리 안에 정화되어야 할 부분이 너무도 많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성장주의와 승리주의, 그 안에 솟아나는 자기도취, 공동체의 내적 구원에 머무르는 폐쇄주의는 우리를 안에서부터 썩어 가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에 대한 맹목적 관심이 사그라드는 바로 이 순간, 우리는 쇄신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가장 교회다운 모습으로 있을 때, 우리가 가장 우리다운 모습으로 존재할 때,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 더 이상 우리를 찾거나 필요로 하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우리의 자리에서 고요히 빛날 수 있다면 허무와 어둠 속에서 절망을 느끼던 누군가는 그 빛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교회가 걸어갈 길

 

자기 쇄신의 길을 거친 교회가 다음으로 걸어가야 할 곳은 정치의 정화 여정 동반이라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당신의 회칙을 통해 정치적 영역에 있어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 아주 명백하게 말씀하십니다.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며, 교회가 직접적으로정치에 참여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정치가 추구하는 정의가 언제나 옳은 것이 아닐 수도 있겠지요. 교회는 정치가 추구하는 정의, 그 정의를 발견하는 여정 안에서 밝은 등불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제28항 참조.)

 

수없이 많은 유대인을 학살했던 나치 시절의 독일도 나름의 이유와 명분은 있었을 것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러한 홀로코스트를 정의라고 믿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화와 소통을 통한 정화의 여지를 남겨 두지 않은 정의는 결국 독단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국가와 사회 안에서 우리가 믿는 참된 정의가 무엇인지 선포해야 하며, 그 정의를 구현하는 여정에 동행해야 합니다. 이는 성직자들의 의무이기도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각자의 자리에서 공정이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아모 5,24) 하려 노력할 때, 나의 믿음과 나의 정의가 아니라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를 세우기 위해 노력할 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정으로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교회더러 정치의 영역에 발을 들이지 말라고, 하느님 말씀에 대해서나 말하고 교회의 영역 안에만 머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이야말로 정치에 대한 편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요?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당신의 세 번째 회칙 〈진리 안의 사랑〉 제3항에서 진리가 없다면 사랑은 감상으로 변해 버립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사랑이 단순한 감상이나 거짓된 것에 머물지 않고 참되고 의미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리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진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주관적인 견해와 감상을 넘어설 수 있게 하여, 문화적 역사적 사실을 초월해서 다 함께 사물의 가치와 본질을 평가하도록 합니다.”(〈진리 안의 사랑〉, 4)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그러한 진리를 애써 찾지 않는다면, 자신만의 기호와 판단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고 평가하고 호오好惡를 결정한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그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진리 안에서 사랑을 살아가기 위해, 교회는 이 세상과 사회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우리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 한복판으로 내려오심으로써 우리의 삶 전체를 온전히 받아들이셨습니다. 우리의 정치·경제·문화·사회 등 모든 것이 지상에 육화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뗄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우리의 정의가 하느님의 정의와 합치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우리의 사랑이 그분의 그것과 닮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직 그것만이 교회가 교회답게 존재하는 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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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대전교구 사제. 독일에서 카리타스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생을 양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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