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은 한 번이 아니라 매일

영성과 신심

부르심은 한 번이 아니라 매일

삶의 자리에서 응답하는 거룩한 부르심

2025. 0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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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성소라고 하면 사제 성소나 수도 성소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성소(聖召)란 말 그대로 거룩한 부르심이라 할 수 있다. 이 거룩한 부르심은 사제나 수도자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는 부르심이라 할 수 있다.

 

사람마다 주어진 생김새와 역할이 다르듯이, 우리 각자에게 부여된 부르심 역시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결혼 성소를 살아가면서 성가정을 꿈꾸고, 어떤 이는 수녀원으로, 어떤 이는 수도원으로, 또 어떤 이는 사제로서, 그리고 독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은 신분이 아니라 바로 내 삶의 자리에서 나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사제와 수도자로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제 삶의 자리에서 충실하지 못한다면, 부르심에 응답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겉으로만 요란한 꽹과리 소리처럼 속이 텅 빈 삶을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하느님께 죄를 짓고 살아가는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사제 성소든지 수도자로서의 삶이든지 아니면 독신 혹은 혼인 성소의 삶이라든지 그 어떤 성소를 살아가든 제 삶의 자리에서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삶의 자리라는 말은 현대에 들어 흔히 사용되지만 사실 성서 비평학에서 쓰이는 용어다.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인 헤르만 궁켈에게서 비롯된 용어로, 성경 구절이 어떤 상황에서 비롯된 것인지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성경의 인물이 당시에 어떤 역할을 하였고 그가 처한 정치적 상황이나 말씀을 듣는 청중은 어떤 특징을 지녔는지 명확히 분석하고 연구하면 그 성경 말씀이 갖는 의미가 더욱더 명확해질 수 있다.

 

따라서 삶의 자리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이 삶의 자리가 광야와 같이 척박한 자리일 수도 있고 빛이 가득하고 따뜻함이 가득한 행복의 자리일 수도 있다. 사실 같은 자리라 할지라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삶의 자리는 아주 중요하다. 이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좋은 씨앗이 자라나는데, 우리가 이를 의식하지 않고 그저 무덤덤하게 지낸다면 씨앗은 싹을 틔우기 어려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태 13,1-9)를 말씀하셨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보면 어떤 씨는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리고 또 어떤 씨는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으며,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에, 또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그 열매가 어떤 것은 백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느님에게서 같은 씨를 받았지만 나는 과연 어떤 땅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하느님께 같은 씨를 받았다는 것은 그분께서는 악인이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는 의미다(마태 5,45).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하루라는 똑같은 시간을 주신다. 이 하루라는 시간을 일에 치여 바쁘게 지내기보다 하느님께 하루를 봉헌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아름다울지, 생각해 본다.

 

사제로서 살아가며 수많은 사람과 영적 담화를 나눈다. 특별히 평신도와 영적 담화를 나눌 때면 가끔 깜짝 놀라기도 한다. 그 이유는 사제와 수도자보다 더 열심히, 더 거룩하게 살아가는 평신도들이 너무나 많음을 수시로 느끼기 때문이다. 또한 고해성사를 주다 보면 나 자신이 부끄러울 때가 종종 있기도 하다. 그때마다 고해성사는 성사를 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성사를 주는 사람까지 성화의 길로 이끄는 하느님의 크신 선물임을 깨닫는다. 따라서 우리는 고해성사를 판공성사 때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자주 봐야 할 것이다. 고해성사라는 이 크신 하느님의 선물을 통해 우리는 우리 삶의 자리에서 충실히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

 

고해성사를 주거나 혹은 많은 신자들과 영적 담화를 나누다 보면 그들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들을 수 있다. 그것은 기도가 안 돼요, 어떻게 하면 기도를 잘할 수 있나요?”라는 고백과 물음이다. 기도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다. 하지만 기도라고 하면 그저 앉아서 눈을 감고 묵상하거나 혹은 묵주 알을 돌리며 기도문을 외거나, 주어진 시간에 맞춰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바치는 것이 기도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분심이 들어서, 일이 바빠서, 몸이 피곤해서 기도를 할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오로지 주님과 함께 있고 싶어서 하던 일을 멈추고 한적한 곳으로 피정을 떠나고 싶은 마음까지 품는 경우도 종종 있다.

 

사실 기도는 어떤 상황이나 시간에 따라 바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새 마음의 생명(《가톨릭 교회 교리서》 2697)이다. 정해진 시간과 어떤 특수한 상황에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기도를 통해 우리가 생기를 얻는 것이다.

물론 교회는 정해진 시간에 기도(삼종기도, 사제와 수도자들의 시간경, 아침기도, 저녁기도, 식사 전후 기도)를 하라고 가르친다. 그 이유는 일정 시간에 의식적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언제 어느 때든 기도할 수는 없기에 정해진 시간만이라도 기도에 깊이와 지속성을 더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일정 시간에 의식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런 우리에게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매 순간 기도할 수 있다는 생각의 전환이다.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성인은 숨을 쉬는 것보다 더 자주 하느님을 생각해야 합니다.”라는 주옥같은 말을 했다. 우리는 이 가르침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숨을 쉬는 것보다 더 자주 하느님을 생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 나의 삶의 자리에 그대로 하느님을 모셔 오면 된다. 앉아서 시간에 맞춰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상 자체를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로 만든다면 이는 소리 기도와 묵상 기도를 뛰어넘는 관상 기도가 될 것이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관상 기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과 자주 단둘이 지내면서 친밀한 우정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렇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과 단둘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소소한 일들이 기도의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집에서 살림하는 이들은 일상에 주어진 일들(설거지, 빨래, 식사 준비, 청소 등등)을 그냥 반복하지 않고 지향을 담아서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잔뜩 쌓여 있는 설거지를 할 때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집 청소도 본인 마음에 있는 지향을 두고 한다면 그것 또한 기도가 된다. 직장인이라면 직장에서 일을 기계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일을 하더라도 그 안에 지향을 두고 하느님께 은총을 청하며 일하면 되는 것이다. 귀찮고 힘든 일이라도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생각으로 한다면 그냥 일로만 끝나지 않고, 기도와 일을 함께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게 될 것이다.

삶의 자리에서 이렇게 기도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매 순간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게 되고, 주님의 현존을 깊이 인식하여 그 안에서 신앙이 되살아날 것이다.

 

 

Profile
살레시오 수도회 소속으로, 현재 서울 신월동에 있는 '살레시오 나눔의 집'에서 사랑둥이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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