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다!’라고 말하기

영성과 신심

‘장하다!’라고 말하기

예수님의 눈으로 내 삶을 바라볼 때, 비로소 보이는 은총의 여정

2026. 0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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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처와 약함 속에서도 소중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돕습니다.
  • 예수님의 돌보심 안에서 지금까지 걸어온 삶을 새롭게 바라보세요.
  • 장하다는 주님의 격려 속에서 다시 살아갈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시작 기도로 요한 복음 2115-19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이나 물으신 이유는, 어쩌면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배반했던 베드로의 괴롭고 부끄러운 마음을 풀어 주려고 하신 예수님의 자애로운 마음 때문은 아니었는지 묻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남기신 당부, 당신의 어린양들을 돌보라는 말씀입니다. 위로가 필요한 이 시대에 이러한 돌봄이 다시금 주목해야 할 교회와 신앙인의 몫이 아닐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돌봄이 필요한 우리

 

인간은 약한 존재, 상처 입을 수 있는 존재, 상처 입은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돌봄과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잉태되는 순간부터 세상에 태어나 자라서 성인이 될 때까지, 성인이 되어서도 줄곧 돌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이 들어 쇠약해지고 갖은 병고로 고통을 받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늘 누군가의 관심과 돌봄이 필수적인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약함을 인정할 때 놀랍게도 살아온 삶을 달리 바라볼 수 있고 돌봄을 실천할 수 있으며 내일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잠시 삶을 돌아봅시다. 단 한 번도 상처 입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그만큼 우리 삶은 상처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상처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은 인간의 약함과 한계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우리나라의 굴곡진 역사, 급격한 사회 변동, 경제와 정치, 사회 위기 속에서 어쩔 수 없는 고난과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었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상처를 입고 무거운 짐을 지고 지금까지 살아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당해야 했던 비인간적이고 비인격적인 대우를, 우리가 감내해야 했던 수많은 폭력을 떠올려 봅니다. 모두 어쩔 수 없이 우리가 걸어온 삶의 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살아온 삶을 숨기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닌, 지금 우리가 겪는 심정과 괴로움을 잘 알고 공감해 줄 누군가의 돌봄일 것입니다. 우리는 딱한 사정을 알아봐 주고 어루만져 주고 보듬어 안아 줄 부모님과 같은 따뜻한 손길과 품을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님에게서 그 대상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

 

예수님께서는 어떤 눈으로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셨을까요? 산상 설교의 첫 부분인 참행복선언은 우리에게 좋은 묵상 거리를 전해 줍니다(마태 5,3-12 참조).

 

예수님께서 행복하다고 말씀하신 사람들은 마음이 가난하고, 부서지고, 가련하고, 소외되고, 억압받고, 병들고 굶주리고 고통받고 울며 슬퍼하고 불의로 고통받고 억울해한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어떻게 행복할까요? 예수님께서 말장난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사실 세상은 행복하기 위해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반대의 삶을 추구하라고 가르칩니다. 부유하고, 풍족하고, 여유롭고, 건강하고, 웃고, 즐기고, 힘 있고, 재산 있고, 성공하고, 군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합니다. 과연 누가 옳은 것일까요.

 

이에 대한 답은 잠시 미뤄 두고, 예수님의 눈과 마음이 향한 곳을 바라봅시다. 그분의 눈과 마음은 바로 가난한 이들에게 가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게 사셨기에, 가난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마음이 산란하고 무너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슬프고 괴로운 것이 어떤 것인지, 억울한 것이 어떤 것인지, 불의로 고통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그들의 마음과 처지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들의 처지와 아픔을 공감하며, 그들과 함께 그 감정을 나누고자 하십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마음에 두시고 굽어보는 사람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행복 선언이 가난에서 출발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가난이 어떤 것인지, 가난한 마음이 어떤 것인지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가난은 다른 말로 목마름입니다. 가난한 자는 목마름을 알고 무언가를 진정으로 바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닌 존재를 감싸안아 주고 영적 배고픔과 목마름을 채워 줄 누군가를 갈망합니다. 그것을 깨달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 변화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가난한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갈망의 대상을 찾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대하신 방법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찾아가신 사람은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을 지닌 사람이 아닌 사회의 변두리에 살던 이들이었습니다. 상처 입은 이, 날개가 꺾인 이, 악령, 병고로 신음하는 이, 죄와 악으로 옭아맨 삶을 사는 이, 소외되고 죄인으로 낙인찍힌 이, 죽음의 위협으로 고통받는 이, 부모를 잃은 고아처럼 기가 꺾이고 생기를 잃은 이…….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9,36)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과 오랫동안 함께 있고자 하셨습니다. 영적인 양식인 말씀으로 배불리시고 빵으로 배불리 먹이셨으며 함께 있음으로 용기와 희망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분은 병들고 소외되고 낙심한 이들을 바라보시고 그들에게 다가가 말씀을 건네시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공감하시고 어루만져 주고 상처를 치유해 주셨으며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조용히 다가가 삶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셨으며 마음속 깊은 곳의 열망을 일깨우시고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한마디로 신앙을 회복시키셨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그들 안에 존재하는 고귀함과 존엄함을 일깨우시고 새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이란 연약하고 상처 입은,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들을 하느님과 통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대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뜻을 알고, 응답할 수 있는 존재, 계약을 맺을 수 있는 존재,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마땅한 존재, 이웃과 형제자매로 대우받아 마땅한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과 만나 자녀의 고귀함과 형제로서의 고귀함을 일깨워주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장하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힘겹게 살아온 사람들을 위로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우리가 아무리 큰 고생을 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이제 우리는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짐을 벗어버리고 고생으로 피곤한 우리 영혼에 새로운 활력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은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에서 주인공 애순이의 이야기를 다 읽고 난 편집장이 감격에 겨워 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장해. 너무 장해.”

 

어려서 엄마를 잃고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되어 감당할 수 없는 수많은 일을 겪으며, 특히 아들 하나를 잃는 시련까지 겪으며, 그래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온 삶, ‘살아 보니 살아지더라라고 하며 버텨 온 삶, 그 삶 앞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 바로 장하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잘 아십니다. 그로 인해 힘들었던 순간도 모두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그분께서는 우리가 살아온 삶에 대해 질책이나 꾸중 대신 위로와 격려 안에서 새롭게 살아가도록 초대하십니다.

 

힘들었지만 지금까지 잘 왔구나. 그래 얼마나 힘이 들었니. 그래도 굴하지 않고 잘 버티고 여기까지 왔으니 장하다.”

 

이제 우리도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이 걸어온 삶의 여정을 돌아보면 어떨까요? 평범하면서도 특별했던 우리 각자의 삶, 어디에 드러내놓고 자랑할 만큼 특별하지는 않지만, 잊기엔 너무나 아까운 소중한 우리들의 삶, 우리가 겪어온 일들, 인연으로 맺어진 수많은 만남들.

 

때로는 앞이 안 보일 정도로 힘겹고 고통스러웠던 순간들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땐 어떻게 버텼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놀랍게도 잘 헤쳐 나올 수 있었고, 그래서 지금 여기 이렇게 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힘든 시기 잘 견뎌 내 온 우리,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너무 장하다.”

 

주님께서도 우리 어깨를 두드리시며 같은 말씀을 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 장하다. 장해도 너무 장하다!”

 


 

묵상하기

티모테오 246-8절의 말씀을 읽고 다음의 물음에 답해 봅시다.

 

1. 내가 돌봄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느낀 적은 언제인가요?

2. 주님께서 나를 보시며 장하다라고 말씀하신다면, 나는 어떤 답을 드릴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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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수원교구 사제. 수원가톨릭대학교 총장이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총무를 맡고 있습니다. 축구와 글쓰기를 즐기며, 교회 쇄신과 시노달리타스 구현, 젊은이에게 신앙을 전하는 일, 희망의 신학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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