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살다 보면 우리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무엇을 붙들게 될까요?
🙏 희망은 거창한 곳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작은 기도방의 촛불 하나, 손에 꼭 쥔 묵주, 그리고 가족과 함께 바치는 기도까지.
💘 무너질 듯한 순간에도 기도와 사랑으로 ‘희망’을 심고, 텃밭을 다시 가꾸어 가는 한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
천국으로 가는 길, 나만의 작은 동굴
새로 이사한 우리 집에는 작은 기도방이 있다. 방이라고 하기엔 작아도 너무 작지만, 내게는 너무나 소중한 공간이다. 집을 알아보기 시작하면서 이 집을 만나기까지, 내가 그린 기도방 이미지를 품고 다녔더랬다. 조용히 홀로 기도할 수 있는 작고 소박한 기도방. 예전에는 화장대가 있던 안방에 딸린 작은 욕실 옆, 가로 70센티미터, 세로 140센티미터의 작은 공간을 보고는 ‘바로 여기다!’ 싶었다. 선반 하나를 달아 기도 책상을 만들고, 그 위에 십자고상과 성모상, 성경과 기도 책을 올려두니 꿈에 그리던 기도 공간이 되었다. 자, 이제 기도만 하면 된다, 마르타야.
문을 닫으면 암흑인 공간,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동굴 같은 이곳에 들어오면 마치 아기가 되어 포대기에 싸인 느낌이었다. 어둠 속 촛불 하나의 빛은 성체 조배실에서 느껴지는 고요하고 따스한 감각을 불러일으켰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머물고 싶은 공간이 생기니 자꾸 가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그렇게 일어나자마자 기도방으로 가는 습관이 생겼다.
금방 잠에서 깬 눈은 건조해 한 번에 번쩍 뜰 수도 없어서 반 윙크를 하며 성모님께 인사하고는 서랍에서 아로마 오일과 라이터를 꺼낸다. 성모님의 따뜻한 위로를 닮은 아로마 오일을 책상보에 한 방울 떨어뜨리고, 오래된 묵주를 손에 쥐면 기도 준비 완료다!
여기서는 보통 등받이 없는 작은 의자에 앉는다. 허리가 아플 때는 바닥에 내려가 양반다리도 했다가 무릎도 꿇었다가, 다리가 저리다 싶으면 스트레칭도 하고, 다시 일어나 제자리걸음까지 한다. 참으로 분주하기 짝이 없는 기도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싶다가도 매일 기도를 이어 가는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시는 성모님과 예수님을 보며 일용한 사랑과 용기를 충전하고 있다.
묵주를 붙든 밤, ‘가정의 평화’를 외치다
오랜만에 다시 묵주를 잡은 것은 절박함이 있어서였다. 덜컥 이사 올 집을 계약하고는 생애 첫 주택담보대출 금액만 생각해도 숨이 넘어가는 것 같았다. 이사와 함께 아이들도 전학해야 했는데, 반발이 있었던 터라,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컸다. 기도 지향은 이사 후 가정의 평화였다. 그러나 그때는 몰랐다. 그 절박함은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을. 돌이켜 보면, 자연스럽게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상황은 그나마 버틸 만한 상황이었다. 희망조차 품을 힘이 남아 있지 않을 만큼 버거운 상황에서는 사람이 어찌할 수 없이 절망 쪽으로 떠밀려 버린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남의 이야기인 줄만 알았던 일이 우리 집에 일어날 줄은 몰랐다. 돌아보면 알아차릴 기회도 있었고, 막을 수 있었던 순간도 분명히 있었다. 그때 더 강하게 말렸더라면, 더 단호하게 막았더라면. 그러나 이젠 아무 소용이 없다. 이미 쏟아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있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새 물을 담을 방법을 찾는 것뿐이었다.
지금처럼 절박했던 적, 생각해 보면 여러 번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집에 강도가 들고, 묻지 마 폭행을 당하고, 집에 불이 날 뻔했고, 보이스 피싱 사건까지……. 인생 최악의 상황 베스트 5에 뽑힐 사건·사고들이 스쳐 갔다. 그 모든 순간이 처음이라 두려웠고 무서웠다. 그러나 그 일들은 어떻게든 지나갔고, 뜻밖의 변수, 즉 하느님의 손길이 아니라면 설명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해결되기도 했고 또 전화위복이 되기도 했다. 늘 그렇듯 지금 느끼는 고통이 가장 힘들고 아프게 느껴질 뿐이었다. 우리 집 주택담보대출 금액보다 더 크고 무거운 상황을 맞닥뜨리고 나니 걱정과 두려움, 막막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 새벽, 무거운 마음으로 묵주를 들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하고 영광송을 바치며 고개를 숙이다 이마가 바닥에 닿았고, 나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그대로 엎어져 펑펑 울고 말았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무엇이 그리 속상하고 슬펐나. 우리 가정이 어떻게 잘못될까, 모든 게 무너져 버릴까, 서로를 미워하게 될까, 사랑하지 못하게 될까 두려웠다. 가족이 밉고 마음에 안 들고 원망스러워질까 무서웠다. 그 마음이 한 번 오면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아서.
우리 집의 불청객, 뿌리 깊은 ‘척’
기도 중에도, 일하는 중에도 부모님이 떠올랐다. 이 일을 만든 부모님. 이젠 늙고 약해진 모습과 현재 그분들의 삶이 떠올라 답답했다. 너무나 사랑하는 분들이어서 원망하지 못했다. 그저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고, 도와드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
어디서부터가 잘못되었을까. 그러다가 겉으로 드러난 이 문제의 본질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안에, 우리 가정 안에 있구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부모님에게서 나에게로 이어졌다. 겉으로는 하느님께 감사하고, 가족이 서로 사랑하며 긍정적으로 사는 것 같았지만, 덮어놓고 겉만 괜찮은 척했던 건 아니었나. 없어도 있는 척, 모르면서 아는 척, 화목한 척, 행복한 척. 그 ‘척’들이 오랫동안 반복되며 깊게 뿌리를 내린 악습이 되었던 것일까.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흘이면 갈 수 있는 가나안 땅을 40년이나 광야를 돌며 헤맸다. 노예의 기억을 육체에서 지워 내는 데 그만큼의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라 했다. 무려 40년을.
쉬 버리지 못하는 습성들은 의지만으로 지워지지 않는다. 몸에 새겨진 기억, 살아온 날들만큼 깊이 뿌리내린 것이기에. 마흔여덟인 내가 새벽 기상을 하겠다며 수면 습관을 바꾸는 데도 얼마나 많은 실패와 시간이 필요했던가. 그런데 팔십 년 가까이 살아온 부모님의 굳어진 삶의 태도와 습관들은 얼마나 더 견고하고 깊게 새겨졌겠는가.
그 생각에 이르자 실망과 답답함이 조금 다른 감정으로 바뀌었다. ‘단죄’가 아닌 무언가로. ‘이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적어도 그 무게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희망’이 자라나는 텃밭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책상에 꽂혀 있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자서전 《희망》을 꺼내 펼쳤다. 교황님의 인생을 엮은 이 책은 희망의 여정을 이야기했고, 서문에서부터 나를 울렸다.
“당신께서 함께하지 않으신 순간은 제 기억 속에 없나이다.”
나의 마지막 날에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지금도 하느님께서는 나와 함께, 우리 가족과 함께하고 계시는구나. 지금도, 그리고 이 상황을 이겨 내는 과정 안에도 함께하시겠구나.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겠구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소리 내어 읽고 또 읽었다.
“그리스도인 가정은 희망이 자라나는 텃밭과도 같습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 《희망》, <희망을 잃지 않는 작은 소녀의 손을 잡고> 중에서
텃밭, 작고 소박한 공간이지만 갖가지 생명이 움트는 곳. 땀과 눈물이 스민 곳. 햇빛과 물과 바람이 함께하며 작은 씨앗을 키워 내는 곳. 그것은 우리 삶이고, 우리의 모습이었다.
이 책에서 인용된 샤를 페기는 ‘희망’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믿음과 사랑이라는 ‘두 언니 사이에서 걸어가지만 보잘것없어 보이는 작은 아이’”
눈에 잘 띄지 않는 작고 여린 소녀. 그러나 이 소녀는 지치지 않고 온 세상을 품에 안으며 모두를 나아가게 한다. 두 언니와 작은 소녀는 나와 두 동생의 모습으로, 희망이 자라는 텃밭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 가정으로 그려졌다.
너무 어려운 일을 맞닥뜨리고 처음엔 가족 모두 어쩔 줄 몰랐다. 멍하고 망연자실했고, 거의 포기 상태였다. 사고 수습을 위해 분주했지만, 예정된 가정 기도는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전과 똑같이 함께 복음을 읽고, 와닿는 구절을 묵상하고 나누었다.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하고 고백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기도를 마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는 자연스럽게 같은 질문을 품기 시작했다. 하느님께서 이 일을 통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게 뭘까. 지금의 위기가 우리 가정에 참된 희망을 품는 은총의 순간이 될 수 있을까. 요셉이 노예로 팔려 간 덕분에 온 집안을 구원하게 된 서사처럼.
부끄러운 일은 이 상황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이 상황에서 절망하고 주저앉는 것이리라. 자책과 무기력, 책임 회피 같은 모습들. 내가 부모님께 바라는 모습은 이런 모습이다.
실수와 잘못을 깨끗이 인정하기를.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품기를.
슬픈 상황에서도 한 번 웃어 보기를.
옆에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해 주기를.
하루를 살아도 당신 삶에 최선을 다해 사랑하기를.
이 바람을 나에게도 가져본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하나씩 하는 것으로.
“희망하고, 또 희망하고, 다시 한번 더 희망해야 합니다.”
교황님의 이 말씀처럼 희망은 한 번 품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매일 아침 기도방 문을 열 듯이, 매일 새롭게 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가정의 텃밭은 그렇게 가꾸는 것이다. 언제 틔울지 모를 작은 씨앗을 하나씩 품고, 정성껏 물을 주고, 쓰러지지 않게 버팀목을 세우고, 좋은 거름을 뿌려 주면서. 희망을 잃지 않는 작은 소녀의 손을 잡고 텃밭을 가꾸어 가리라.
🔗 함께 읽으면 더 좋은 아티클

![[새 사제 이야기]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webzine/_next/image?url=https%3A%2F%2Fwebzineapi.catholicbookplus.kr%2Fstorage%2Fimages%2Farticles%2Fdc10920cf6635f1b4c3836a22d89eba3.webp&w=1080&q=75&dpl=dpl_9rcNuzZbotcUfThW4A7DgAHDeba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