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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초 안에 읽는 핵심 포인트
✔ 헤세드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변함없는 사랑의 충실성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 헤세드는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능력이 아니라 먼저 받은 사랑에서 시작되는 은총의 열매다. ✔ 진실과 정의와 평화는 모두 이 헤세드의 토양 위에서만 자라난다. |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리라.” (시편 85,11)
시편 85편은 유다가 바빌론 유배 생활에서 막 돌아온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유배 생활 동안 애달프게 그리던 고향 땅은 황폐해져 있었고 성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유다가 없는 고향은 낯선 이방인들의 도시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부푼 기대를 안고 돌아왔을 때 공동체는 오랜 풍파 속에서 분열되고 와해되어 회복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부르짖는다.
“끝끝내 저희에게 진노하시렵니까? 저희를 다시 살리시어 당신 백성이 당신 안에서 기뻐하게 하지 않으시렵니까? 주님, 저희에게 당신 자애를 보이시고 저희에게 당신 구원을 베푸소서.”(시편 85,6–8)
이 간절한 애원에 이어, 9절에서 갑자기 시의 분위기가 반전된다.
“하느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나는 듣고자 하네.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당신께 충실한 이들에게 진정 평화를 말씀하신다. 그들은 다시 우매함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그런 다음 시편 기자는 환상처럼 한 장면을 본다. 하느님의 구원이 완성될 때, 그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리라.”(시편 85,11)
자애, 진실, 정의 그리고 평화. 시편 기자는 구약에서 한자리에 모이는 경우가 매우 드문 네 단어를 의도적으로 짝지어 배치한다. 왜냐하면 이 네 단어는 홀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부르며 완성하기 때문이다.
이제 이 네 단어를 하나씩 천천히 들여다보기로 하자. 히브리어 원어 속에 숨은 뜻을 찾아가다 보면, 오늘 각자의 신앙과 삶에 직접 닿는 물음들을 만날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자애, 헤세드(חֶסֶד)다.
감정의 파도를 넘어서는 사랑의 충실성, 헤세드 (חֶסֶד)
자애(חֶסֶד) · 헤세드(ḥesed)· Steadfast Love
“주님을 찬송하여라, 좋으신 분이시다. 주님의 자애(헤세드)는 영원하시다.”(시편 118,1)
히브리어 헤세드는 구약에서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 중 하나이다. 그리스어 칠십인역은 이를 ‘ἔλεος(불쌍히 여김)’으로, 라틴어 불가타는 'misericordia(자비)'로 번역하며, 영어 성경은 맥락에 따라 ’steadfast love’, ‘loving-kindness’, ‘mercy’ 등을 두루 사용한다. 우리말 성경 역시 ‘자비’와 ‘사랑’을 아우르는 이 단어의 넓은 의미망을 고려하여 ‘자애(慈愛)’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이처럼 한 단어의 번역어가 다양하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단어가 어느 하나의 개념으로 다 담기지 않는 풍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구약 성경은 자비를 언급할 때 여러 가지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단어들이 ‘헤세드(ḥesed)’와 ‘라하밈(raḥamim)’입니다. 하느님과 관련하여 ‘헤세드’를 사용할 때 이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고 늘 용서하시는 백성과 맺으신 계약에 대한 당신의 변하지 않는 신의를 나타냅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 2016년 제31차 청소년 주일 담화
교황님의 말씀처럼, 헤세드는 ‘감정’이 아닌 “태도”, 즉, 상대가 어떻게 행동하든, 상황이 어떻게 바뀌든, 관계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 ‘신실함’과 ‘변치 않는 헌신’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몸소 보여 주신 사랑의 방식이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헤세드는 약 250번 등장하는데, 그 절반 이상이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 관계를 묘사하는 맥락에 사용되고 있다는 것만 보더라도 헤세드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변함없는 사랑의 충실성을 표현하는 단어라 할 수 있다.
의무감을 넘어서는 사랑
언약(בְּרִית, 베리트) 안에서 주어지는 종교적, 도덕적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정의’에 해당한다면 헤세드는 그 의무의 범위를 뛰어넘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주어진 의무 그 이상을 행하는 헤세드가 정의를 완성한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헤세드와 가장 가까운 ‘사랑의 방식’이다.
“참 이상하게도, 부모는 미안했던 것만 사무치고, 자식은 서운했던 것만 사무친다. 그래서 몰랐다. 내게는 허기지기만 하던 유년기가, 그 허름하기만 한 유년기가 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만든 요새였는지.”
―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中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아낌없이 내어 주는 부모의 마음은 모든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희생과 자기 헌신이다. 그리고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자애, 곧 헤세드다. 그러므로 헤세드는 필연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강자에게서 약자로, 여유 있는 자에게서 궁핍한 자로,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에게로 ‘내려오는’ 사랑의 방향성을 갖는다.
“그분께서는 친히 세상의 죄를 짊어지시어 심연의 물, 죽음의 물로 내려가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의 물에 빠진 우리를 구하시려고 오십니다. 그분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하느님의 참된 정의가 구원하는 자비(misericordia)임을 보여 주십니다. …… 그분의 정의는 우리의 인간 조건을 함께 나누시고, 우리의 고통과 연대하며 우리의 어둠 속으로 내려가 우리에게 빛을 되찾아 주시기 위해 우리 가까이로 오시는 사랑입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 2023년 주님 세례 축일 삼종기도
루카가 전하는 탕자의 비유(루카 15장) 속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막연히 ‘기다리’지 않는다. 아버지는 아직 멀리 있는 아들을 향해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춘다. 그가 용서받을 자격이 있는지, 충분히 회개가 이루어졌는지를 따지지 않고, 그저 배고픔에 못 이겨 돌아온 아들을 가슴에 품는다. 바로 이것이 죄인인 우리를 위해 무죄하신 외아들을 내어 주신 하느님의 헤세드이며, 세례로 그분의 자녀가 된 우리가 세상에 드러내야 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얼굴이다.
나의 헤세드는 지금 누구를 향해 있는가
여기서 잠깐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 헤세드는 철저히 ‘타자를 향한’ 사랑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 헤세드는 인간 스스로의 능력이나 훈련으로 얻어지는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에서 시작되는 은총의 열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죄스러움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자비로 제자들을 다시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비를 입은’ 그들 또한 ‘자비로운 사람들’이 됩니다. 먼저 자비를 경험하지 않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 2021년 하느님의 자비 주일 미사 강론
이것이 헤세드의 순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고, 우리는 그 사랑의 은총에 힘입어 다시 그것을 이웃과 세상에 나누어 줄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시대는 어떠한가? 스마트폰을 열면 온통 ‘나’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내가 소위 얼마나 ‘잘 나가는지’, 내가 얼마나 존중받고 있는지, 내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증명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소진한다.
신앙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의 기도는 종종 하느님께 내미는 예산서나 청구서처럼 내 ‘희망 사항’을 늘어놓는 시간이 되어 버리고, 신앙의 공동체는 나와 ‘코드’가 맞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사교 클럽이 되는 일이 적지 않다. 마땅히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야 할 사랑이 온통 자기에게 구부러져 버린 이 일그러진 자기애를 일컬어,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사랑의 무질서(amor inordinatus)’라고 불렀다.
이 사랑의 무질서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그저 나의 성공을 보증해 주는 분, 즉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로 축소된다. 이 무질서 속에서 우리는 유아기적 자아의 허기에 사로잡혀 성숙한 신앙인의 ‘내리사랑’인 헤세드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럴수록 우리는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늑대다(Homo homini lupus est).’라는 불안감으로 서로에게 날을 세우게 되고 더욱 외로워진다.
“그러나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니,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희망을 투구로 씁시다.”(1테살 5,8)
빛이 하나도 없는 깜깜한 밤 유리창 앞에 서면, 유리창은 마치 ‘거울’같이 나 자신만을 비춘다. 이처럼 이웃을 향한 헤세드가 없는 신앙은 단지 어둠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 놓은 하느님의 관념 앞에서 바치는 고독한 자기 숭배와도 같다.
그와는 달리, 하느님 사랑의 빛을 받은 사람은 “낮에 속한 사람들”로서 그들에게는 유리창 너머의 세상이, 그 너머의 형제자매가 환히 눈에 들어온다. 그러기에 두려움 없이 마음의 창문을, 방문을 열고 자기만의 성역 밖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시편 85편이 그리는 세상에서 헤세드가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헤세드, 즉 한결같은 사랑의 마음 없이는 진실도, 정의도, 평화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이 점에서 헤세드는 다른 세 단어가 자라나는 토양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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