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주 기도로 만나는 은총의 순간 | 빛의 신비

성경 이야기

묵주 기도로 만나는 은총의 순간 | 빛의 신비

우리 삶을 새롭게 비추는 빛의 여정

2025.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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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대성당에 들어설 때,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한 빛의 향연이다. 한줄기 빛도 허용하지 않는 두꺼운 돌벽과 어둠으로 가득 찬 거대한 공간 속에서 더 찬란하게 빛나는 스테인드글라스는 단순히 조형미를 더하기 위한 장식이 아니다. 색유리를 통해 복음의 장면들을 새겨 놓은 그 창들은, 어둠을 통과한 빛이 어떻게 이야기와 형태, 색채를 조화롭게 하나로 이루어 가는지를 보여 준다.

 

빛의 신비는 마치 이러한 스테인드글라스 창과도 같다.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어 우리와 함께하신 공생활의 사건은 각각의 빛을 지니고 있고, 모두 합쳐질 때 완전한 신비를 드러낸다. 이 신비들은 결국 신앙인인 우리가 누구인지를 그분의 시선 안에서 새롭게 밝혀 준다.

 


 

빛의 신비 1| 사랑받는 자녀의 소명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죄인들의 대열에 서신다. 이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스스로 낮아지며 인류의 죄를 짊어지는 구속의 여정을 시작했음을 보여 준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아담의 타락으로 오염된 인류의 역사 속으로 깊이 들어가신다.

 

그분의 몸이 물에 닿음으로써 세례의 물이 거룩해지고, 그분은 이 물을 통해 하느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 흘러들게 하신다. 그리고 그 순간, 하늘이 열린다. 이 장면은 인류에게 영원히 닫혀 있었던 하늘, 곧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은 장막이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열렸음을 상징한다.

 

이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고, 성부의 음성이 들린다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행하신 이 겸손한 사랑의 행위 앞에서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높은 곳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외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애정어린 기쁨을 드러낸다." 

─ 교황 베네딕토 16세, 2013년 1월 13일 주님 세례 축일 강론

 

성자 안에서 성부의 전 존재가 흘러나오고, 성령은 그 사랑의 흐름을 눈에 보이는 현실로 만든다. 오늘날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는 모든 이에게도 동일한 음성이 울려 퍼진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자녀,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이 정체성은 기억되어야 할 사실을 넘어, 사랑으로 살아 내야 할 소명이다. 그분의 음성이 우리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딸이라 선언할 때, 이는 곧 너 또한 성자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라.”라는 부르심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빛의 신비 2| 순명에서 시작되는 기적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2,11)

 

잔치가 한창일 때에 포도주가 떨어진다. 겉으로는 풍요와 환희가 가득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불안 속에 그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과 성공의 짜릿함 뒤에 남겨진 영혼은 이내 지치고, 기쁨은 메마르며, 관계는 고갈된다.

 

이 결핍을 누구보다 먼저 감지한 이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 문제를 호들갑스럽게 드러내지도, 포도주를 모자라게 마련한 집주인을 탓하지도 않는다. 다만 아들의 귀에 조용히 속삭일 따름이다. “포도주가 떨어졌구나.”

 

이 짧은 문장은 어머니의 민감한 사랑과, 하느님 뜻에 대한 깊은 신뢰를 동시에 드러낸다. 그런 다음 그녀는 하인들에게 말한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이것은 성경 전체를 꿰뚫는 가장 단순하고도 근본적인 요청,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명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이 말씀에 따라 하인들은 항아리에 물을 채우고,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다. 이로써 잔치는 다시 시작되고, 복음서가 말하듯, “제자들은 그분을 믿게되었다.

 

카나의 기적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번아웃으로 지친 우리의 일상에서, 피상적 관계 속에서, 우리는 마리아처럼 민감하게 포도주가 떨어졌음을 알아차리고 그분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고 하시는 그 명령에 응답해야 한다. 기적은 언제나 우리의 순명 안에서 시작된다.

 


 

빛의 신비 3| 회개할 용기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예수님의 공생활은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 안에서 실현되기 시작한 구원의 사건이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란 무엇인가? 그것은 시공간적 개념을 넘어 자비와 정의, 진리와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통치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통치는 외적인 힘이나 제도로 강제되지 않는다. 하느님 나라는 결코 억지로 문을 부수며 들어오지 않는다. 오직 우리 각자의 회개를 통해서, 즉 우리 존재의 방향성이 하느님 쪽으로 향할 때, 마치 대지를 깨우는 봄날처럼 피어난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를 믿는다는 것은, 단지 신학적 개념이나 명제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삶 전체의 방향을 그분의 빛을 향해 맞추어 가는 전인적이고 역동적인 과정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빛나는 얼굴을 마주할 때 사실 우리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죄의 상처와 내면의 어둠이다. 그러나 이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하며, 그 빛은 우리 안에 새로운 용기를 불러일으킨다. 그리하여 우리가 두려움 없이, 자유로이 문을 열어 그분의 빛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끈다.

 

결국, 회개란 어둠 속에서도 주님의 손을 잡고다시 일어나는 것, 그리하여 하느님께 한 걸음 더 발을 내딛는 용기인 것이다.

 


 

빛의 신비 4| 예수님을 따르는 길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타보르산 위에서 제자들은 잠시 예수님의 참모습, 그분 안에 감추어졌던 영광을 마주하게 된다. 그분의 얼굴에서 빛나는 광채는 하느님 나라의 실재를 드러내는 계시로서, 그분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내적인 눈이 열리는 순간을 상징한다. 그런데 이 찬란한 변모가 수난을 예고하신 직후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고통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드러나는 영광, 곧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다는 복음의 역설을 미리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신비의 중심에는 빛보다 더 본질적인 요소가 있다. 바로 구름 속에서 음성이 들려온 다음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마르 9,8)는 것이다.

 

율법과 예언을 상징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 곁에 함께 서 있었지만, 결국 그들 곁에 최종적으로 남아 계신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다. 그분 안에서 율법과 예언이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하느님의 말씀은 더 이상 돌판에 새겨진 율법에 머무르지 않는다. 사람이 되어 오신 말씀, 그분의 인격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이제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이신 그분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응답 또한 타보르 산의 영광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십자가의 길 위에서 시작된다. 그렇다. 우리가 따라야 할 말씀은 바로 예수님의 삶과 죽음, 곧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 주신 그분 자신이다.

 

 


 

빛의 신비 5| 섬김은 사랑이 된다

 

이는 내 몸이다. ……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르 14,22.24)

 

이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 즉 당신 자신을 완전히 내어 주신다. 하느님께서 물질이 되어 우리 손에 놓이신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의 손안에 자신을 맡기시는 이 신비는, 무한한 사랑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구체화된 결정적 사건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마지막 만찬의 역사적 자료에 있어서 가장 정확하다고 여겨지는 요한 복음이 다른 공관 복음과 달리 성체성사 제정을 생략하고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사건을 배치했다는 사실이다(요한 13,15 참조). 이는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체성사의 또 다른 의미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섬김이 바로 그것이다. 가경자 반 투안 추기경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섬긴다는 것은 다른 이를 위해 성체가 되는 것이며,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 그들의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것(로마서 12,15 참조), 다른 이의 머리로 생각하고, 그들의 마음으로 느끼며, 그들의 삶을 살아가는 것, 즉 인디언 속담에서 말하듯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고 걸어 보는 것입니다.”

F. 하비에르 응우옌 반 투안, 희망의 증언(Testimony of Hope)

 

사랑은 추상적인 감정이 아닌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는행위에서 드러난다. 우리가 성체를 받아 모실 때, 우리는 단지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그분께서 다시 한번 내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나를 내어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체를 받아 모시며 우리가 바치는 아멘은 그리스도처럼 살기로 응답하는 것이며, 이는 나눔과 용서, 인내와 희생의 길로 우리를 부른다.

 


 

빛의 은총을 청하며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신비의 무게, 즉 우리가 살아 내야 할 복음의 증거가 무엇인지를 드러내 보여 준다. 그분의 빛을 받은 이라면, 마땅히 그 빛을 세상 속에 드러내야 한다. 이제, 우리가 그 빛이 되어, 어둠 속에 놓인 세상을 향해 걸어 나아가야 할 때다. 

 

"우리의 신앙을 키우는 마리아 영성은 예수님을 그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새로운 한 주를 그분의 부활의 빛으로 열어 주는 주일과 같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예수님의 불타는 기억으로 채우고,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태도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을 변화시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그리스도인 영성은 바로 이 불꽃에서 흘러나오며 그 불꽃이 지속되도록 하는 데 기여해야 합니다." 

─ 교황 레오 14세, 2025년 10월 12일, 마리아 영성 희년 미사 강론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Profile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소속으로 현재 로마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이수하고 있습니다. 성경 속 살아계신 하느님의 음성이 인간 언어의 희미한 잡음을 넘어 선명하게 울리도록, 마치 오래된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듯 조심스러운 손길과 눈길로 성경을 읽고, 되새기며, 이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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