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특집 ③ 빛의 갑옷 그리고 기다림의 힘

성경 이야기

월간 특집 ③ 빛의 갑옷 그리고 기다림의 힘

움켜쥔 두 손과 닫힌 마음을 활짝 열고

2025. 12.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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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간 특집 기다림

 

"만일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4시가 가까워질수록 나는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마침내 4시가 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안절부절못하게 될 거야. 그러면서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돼.“

―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중에서

 

대림 시기의 기다림도 그래요.

주님이 오시기로 약속하신 그 를 기다리며, 우리 마음은 3시부터 행복해지는 중이에요.

아직 오시지 않았지만, 그분이 오신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설레죠. 🎯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무장 해제된 사랑을 배우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속도를 따라 숨을 고릅니다.

그러니 오늘도 등불을 켜고 이렇게 말해 볼까요? 주님, 아직 3시지만… 저는 벌써 행복해요.” 💖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루카 12,35.37)

 

대림(待臨)은 글자 그대로 주님께서 임하시기를 기다리는 시간이다. 그렇다면 이 기다림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시간이 흘러가기를 막연히 견디는 수동적 대기 상태가 아닌,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내려오시는 놀라운 사랑의 방식을 배우는 능동적 변화의 시간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길을 준비하라."(마태 3,3)는 대림 시기의 초대는 단지 성탄 맞이 대청소를 하고, 제대와 성탄 트리를 꾸미고 판공 성사를 보는 등의 외적인 과업으로만 축소될 수 없다. 오히려 이 시기에 우리가 해야 할 준비는 무엇인가를 더하는일이 아니라, 삶을 무겁게 하는 불필요한 것들을 비워 내는일에 가깝다.

 


 

움켜쥔 손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붙잡고 내 것으로 차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세상을 살아간다. 젖먹이 시절 뭐든 손에 잡히는 대로 제 입에 넣어 보지 않은 이가 어디 있으며 친구와 장난감 하나를 두고 투덕거리지 않은 이가 어디 있으랴? 세월이 흘러 몸과 생각이 자라면서 다만 그 방식이 세련되어졌을 뿐, 좋은 것은 내가 차지하고 싶은 인간의 본능적 욕망은 본질적으로 그대로이다. 이는 비단 물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람들의 평가, 스펙과 평판 심지어 나이와 외모, 성별과 같은 다분히 동물적이고 우연적인 조건들조차 어느새 우리가 절대적 신뢰를 두는 믿는 구석이 되며, 이것들을 얻기 위해, 혹은 잃지 않기 위해 꽉 쥔 손에는 갈수록 더 힘이 들어간다.

 

움켜쥔 손은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본능에서 나온 행동이지만, 한편으로는 은총에 대한 불신과 닫힌 마음의 표시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그것은 통제와 지배의 구조를 고착시키고 관계를 왜곡시키며, 결국에는 허심한 마음의 기쁨을 잃게 만든다. 더욱이 이렇게 무언가를 잔뜩 쥐고 있는 손으로는 결코 가까이에 계신 임마누엘 하느님을 만날 수도 그분을 온전히 붙잡을 수도 없다.

 

"무장하지 않고 무장 해제시키는 평화(una pace disarmata e una pace disarmante)"

 

이와 달리, 열린 손은 비움의 상징이자 관계의 가능성을 여는 제스처다. 비워진 손만이 받을 수 있고, 열린 손만이 나눌 수 있다. 하느님께 마음을 연다는 것은 그분께서 마련하신 놀라움과 가능성에 자신을 맡기는 내적 결단이다. 그리고 그 결단은 하느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이 세상에 들어오셨는지를 바라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이것이 바로 대림 시기 동안 우리가 묵상하는 성탄의 의미이다.

 

이 성탄의 중심에는 무장하지 않은 아기가 있다.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하느님은 세상의 권력과는 거리가 먼, 한없이 가난하고 취약한 인간이 되어 우리에게 오셨다.

 

차가운 구유에 누워 있는 연약한 아기, 그가 걸어갈 복음 선포와 십자가의 길, 그리고 부활의 여정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부르심 받는 사명, 무장하지 않고 무장 해제시키는 평화*의 표지다.

* 레오 14세 교황, Urbi et Orbi, 202558일 참조.

 

그리스도인의 평화는 단순히 심신의 안정이나 온갖 정치적, 외교적 수단을 동원해 개인의 힘으로 이룩하는 전쟁의 종식, 혹은 갈등의 해소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이사 42,3) 연민으로 상대의 닫힌 마음을 여는 내면의 힘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빛의 갑옷, 그리고 다정함의 힘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로마 13,12)

 

이 갑옷은 자기방어를 위한 강철이 아닌, 그리스도의 온유와 자비, 인내와 겸손, 그리고 용서하는 사랑의 힘으로 짜여 있다. 따라서 빛의 갑옷을 입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을 입는 것, 즉 그분의 다정함을, 무장하지 않고 무장 해제시키는 평화의 길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길은 구유의 아기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공생활의 끝에서, 종처럼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에서 정점을 이룬다. 한 번도 자신을 위해 무장하지 않으셨던 예수님께서는 잡히시기 전날 마지막 식탁에서 스스로를 제자들의 발 아래에 두신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의 손이 당신 피조물의 약함을 다정히 어루만지며 그들의 발에 묻은 더러움을 몸소 씻어 내시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아무것도 움켜쥐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 세상을 살리는 복음의 역설이다.

 

대림 시기는 이러한 하느님 논리에 우리의 마음과 지향을 맞추어 가는 시간이다. 이 복된 시간 동안, 우리는 날을 세운 무기가 아닌 앞치마를 두르는 법을, 지배하기보다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법을, 하느님과 이웃 앞에서 내 주도권을 내려놓는 법을, 그리고 허리에 띠를 매고 마음의 등불을 밝혀 세상과 이웃의 필요에 즉시, 사랑으로, 기쁘게 응답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 임마누엘이여,

우리의 임금이며 입법자, 만민이 갈망하는 분, 구원자시어, 오소서!

오시어 저희를 구원하소서. 주 우리 하느님이여!

1223Antiphon

 

성탄의 밤, 만민의 갈망은 우리가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우리 가운데 실현될 것이다. 우리가 기다려 온 구원자는 세상의 여느 권력자나 그리스 신화 속 영웅처럼 세상을 향해 자기 힘을 과시하며 들어오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분은 유다 땅 가장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 몸을 풀 곳조차 찾지 못한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기의 가녀린 울음으로 아담의 죄로 인해 닫혀 있던 생명의 문을 여신다.

 

그렇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무장 해제된 모습으로 오시어, 우리를, 그리고 온 세상을 무장 해제시키실 것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에게 오시는 아기 예수님,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이 다정하고도 놀라운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자. 마음의 등불을 밝히고 그분을 마중 나가자. 오시기로 약속하신 분께서 이미 문 앞에 와 계신다!

 

그대들에게 복된 대림을 알리니, 보라, 첫 번째 촛불이 타오르네!

거룩한 때가 왔으니, 주님을 위한 길을 준비하라!

기뻐하라, 그리스도인들아! 크게 기뻐하라! 주님께서 이미 가까이 오셨다.

그대들에게 복된 대림을 알리니, 보라, 두 번째 촛불이 타오르네!

서로를 받아들이라, 주님께서 우리를 받아 주신 것처럼!

기뻐하라, 그리스도인들아! 크게 기뻐하라! 주님께서 이미 가까이 오셨다.

 

그대들에게 복된 대림을 알리니, 보라, 세 번째 촛불이 타오르네!

이제 너희 선함의 광채를 어둔 세상 깊숙이까지 전하여라.

기뻐하라, 그리스도인들아! 크게 기뻐하라! 주님께서 이미 가까이 오셨다.

그대들에게 복된 대림을 알리니, 보라, 네 번째 촛불이 타오르네!

하느님께서 친히 오시리라. 지체하지 않으시리라!

어서 깨어나라, 너희 마음들아, 빛이 되어라!

기뻐하라, 그리스도인들아! 크게 기뻐하라! 주님께서 이미 가까이 오셨다.

― 독일 성가 ‘Wir sagen euch an den lieben Advent’, GL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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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소속으로 현재 로마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이수하고 있습니다. 성경 속 살아계신 하느님의 음성이 인간 언어의 희미한 잡음을 넘어 선명하게 울리도록, 마치 오래된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듯 조심스러운 손길과 눈길로 성경을 읽고, 되새기며, 이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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