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특집 ② 우리 각자는 예수님의 기다림이며 희망이다.

영성과 신심

월간 특집 ② 우리 각자는 예수님의 기다림이며 희망이다.

노랑이 푸름으로 변할 때까지

2025. 12.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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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간 특집 기다림

 

🌟 1. 대림 = 기다림 = 희망?!

대림 시기의 핵심은 기다림’, 그런데 그 안엔 희망이 숨어 있어요. 💫

나는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을까?

그 기다림은 나만의 소원을 위한 걸까, 아니면 누군가를 위한 걸까

 

👶 2. 희망은 어디서 자라날까?

신부님이 만난 청소년들은 싹수가 노랗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지만, 사랑과 관심을 만나 초록으로 변했어요. 🌱

희망은 포기하지 않는 시선속에서 싹트고, 그 싹은 언젠가 푸른 나무가 되죠 🌳

 

😇 3. 혹시 예수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신 건 아닐까?

우리가 늘 예수님, 기다려요🙏” 하지만, 어쩌면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기다리고 계실지도 몰라요.

내가 성장하길, 사랑하길,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길… ❤

 


 

기다림은 교회 전례력으로 대림 시기의 가장 큰 묵상거리이다. 기다림에 내포된 가장 큰 의미는 바로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무엇을 희망하고 있는가?

 

살레시오 수도회 사제로 살아가면서 수많은 청소년을 만났고, 만나고 있다. 그리고 내가 만난 청소년은 가정 상황이 좋지 않아 부모가 직접 양육하기 어려운 청소년들과 보호 처분을 받은 늑대처럼 거친 청소년들, 학교 밖 청소년들, 쉽게 말해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이 대부분이다. 이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경찰서나 법원에 가는 것이 때때로 일상이 되기도 한다. 이로 인해 나도 모르게 청소년법에 대해 해박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청소년들을 만나고 동반하고 교육하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질문한다.

 

말도 듣지 않고 사고만 치는 아이들 만나면 무슨 의미가 있냐?"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당당히 이 아이들에게는 희망이 있어요.라고 대답한다. 바로 우리 살레시오 교육의 목적인 착한 그리스도인’, ‘정직한 시민이 될 것이라는 희망이다.

 


 

푸름으로 변할 때까지

 

옛말에 싹수가 노랗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장래성이 없다.’라는 의미로 쓰이는데, 여기서 싹수는 낌새나 징조를 뜻한다. 이 말의 유래는 식물이 병들면 싹부터 노래지는 데서 유래되었다. 노란 싹을 틔운 식물은 잘 자랄 가능성이 없기에 그냥 뽑아버리기도 한다. 내가 만나는 청소년들은 많은 어른에게 싹수가 노랗다.”라는 말을 수십 수백 번 들었다. 하지만 싹수가 노랗다고 해서 그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변함없을 것이라는 말은 그저 어림짐작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청소년은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과 정성, 관심이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농부는 하나의 씨를 싹틔우기 위해 밤잠을 설쳐 가며 정성을 들인다. 씨를 뿌리자마자 수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농부는 희망을 가지고 사랑과 정성, 관심으로 씨를 키우고 싹을 돌보며 수확을 기다린다.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으면 거름을 주고 주변에 나쁜 잎들을 뽑아 무럭무럭 잘 자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그 와중에 병든 잎이 있으면 하나라도 더 살리기 위해 더욱 관심을 쏟는다. 이렇게 노력을 기울여 마지막 수확 때가 되면 농부는 웃음 가득한 얼굴로 만족스러운 소출을 거둘 수 있다.

 

사랑과 정성, 관심은 병든 청소년들의 마음을 치유한다. 그리고 모두가 그럴 수 없겠지만, 어른이 된 이들 중 누군가는 자신과 같은 어려움을 겪는 청소년들을 위해 자신의 경험을 내세우며 봉사할 것이라 나는 확신한다.

 


 

희망을 굳건하게 하는 체험

 

현재 살레시오회에서 25년 동안 수도 생활을 하고 있다. 이제 내가 만났던 청소년들 가운데에서도 성인이 되어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6년 전 태안 살레시오 피정 센터에서 사목할 때 일이다. 당시 코로나19로 피정 센터 운영이 무척이나 어려웠다. 예약이 모두 취소되고 졸지에 직원들도 그만두는 일이 벌어졌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숙소와 강당, 식당, 화장실은 왜 그렇게 지저분해지는지 매일 청소와 이불 빨래, 주변 작업으로 언제 올지 모르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혼자서 구슬땀을 흘렸다.

 

그날은 운동장에서 제초 작업을 하고 있었다. 어떤 가족이 피정 센터 앞 해변에서 놀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서 아주 반가운 얼굴을 보게 되었다. 바로 내가 기숙사 사감을 했을 때 만났던 친구였다.

 

그 친구는 온갖 비행으로 소년재판에서 6호 처분을 받고 기숙사에 입소했다. 그 친구는 인천에 살았는데, 주먹으로 꽤 유명한 아이였다. 잦은 가출과 폭행으로 거칠었던 친구의 등장은 마치 늑대 한 마리 같았다. 기숙사에서도 그 친구 때문에 사건 사고가 하루 세 끼 밥 먹듯 벌어졌다. 하지만 나는 그 친구와 대화하고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아버지처럼 때로는 선생님처럼 때로는 형처럼 온갖 정성을 들였다.

 

그 친구는 이곳에 와서 정말 좋은 어른들을 많이 만났고 알게 되었다며 자신도 여기 있는 어른들처럼 살고 싶다는 말을 농담처럼 내뱉기도 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 친구는 나의 세례명인 치릴로로 세례를 받고, 학업을 다시 시작하여 검정고시에도 합격했다. 그리고 좋은 어른이 되겠다는 다짐과 함께 퇴소했다. 그 이후로는 그 친구를 만나지도 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약 10년 만에 태안 살레시오 피정 센터 앞 해변가에서 우연히 그 친구를 만난 것이다. 그것도 똑 부러지는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아이와 함께 말이다.

 

그 친구는 기숙사에 있었을 때 이곳에서 했던 캠프가 너무나 기억에 남아 아내와 딸아이에게 보여 주고 싶어 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여기 있을지 꿈에도 몰랐다며 아주 기뻐했다. 지금 뭐하고 사는지 묻는 질문에 그는 부끄러워하며 그냥 조그마한 카센터를 운영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때 신부님 만나지 못했다면, 이렇게 살고 있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을 덧붙이며 철없고 어려운 시기에 동반해 줘서 감사하다며 울먹거렸다.

 

나는 지금 삶에 만족하고 행복한지 다시 질문했다. 그 친구는 정말 행복하다며 그때 기숙사에서 받은 사랑을 보답하기 위해 4개의 청소년 시설에 정기적으로 후원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신앙생활에 대해서는 성당에 나가기 위해 노력한다고 답했다. 물론 이 친구 말고도 어른이 되어 충실히 살아가는 이들이 참으로 많다. 싹수가 노랗던 아이들이 관심과 사랑으로 영글어 열매가 된 것이다.

 

이러한 체험 덕분에 청소년들을 바라보면 희망이 가득하다. 비록 지금은 사순 시기처럼 보이지만 그들에게도 부활의 희망이 보이며, 대림 시기와 같이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게 하는 청소년들도 있다. 오늘도 나는 지금 이 순간 내 옆에서 마치 어미새의 먹이를 기다리듯 재잘거리는 청소년을 보면서 희망을 가져본다.

 


 

대림과 기다림

 

대림 시기를 맞이하여 기다림에 대해 묵상하면서 이러한 생각을 해 보았다. 우리가 예수님을 기다리고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희망하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 청소년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성장을 기다리고 희망하는 내 모습처럼, 어쩌면 예수님께서도 늘 부족한 나를 바라보시며 나의 성장을 기다리며 희망하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늘 예수님께 나의 기도를 들어주십사하고 청하기만 한다. 그리고 대림 시기가 되면 우리는 늘 예수님을 기다린다. 기다림은 곧 희망을 가지게 만드는데, 과연 무엇을 그토록 희망하고 있는지 잘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우리가 희망하는 것들이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이웃들과 내가 속한 공동체를 위한 희망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나만의 예수님도 될 수도 있지만 사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들을 위해 모든 것이 되신 분이시다(콜로 3,11 참조).

 

그래서 나 자신을 위한 기도와 기다림, 희망이 아닌 모두를 위한 기도와 기다림, 희망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나의 가족이든 직장 동료든 상관없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닌 타인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마치 바오로 사도가 어떻게든 몇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된 것처럼 말이다(1코린 9,22 참조).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사실 나도 청소년들을 동반하고 그들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 쉽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 하지만 그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큰 해답 또한 내 안에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해답을 기다리고 희망하고 계실 것이다.

 

이제 곧 예수님께서 오신다. 집에 손님이 올 때 분주하게 준비하는 것처럼 나를 기다리는 예수님을 위해 더욱더 철저한 마음가짐과 사랑의 실천으로 맞이해야 한다. 바리사이와 같은 생각(루카 18,9-12)을 버리고, 부족한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심에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희망인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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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살레시오 수도회 소속으로, 현재 '서울시립청소년드림센터 교육팀'에서 청소년들과 동반하고 있습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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