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영광스러우시다는 것은, 그분이 계시 안에서, 말씀과 율법 안에서, 은총의 메시지와 구원의 행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The Glory of the Lord IV, Introduction
하느님의 영광은 우리를 향해 다가오시는 그분 사랑의 형상이다. 이 영광은 역설적이다. 발타사르는 이 영광은 “그것이 가장 부재해 보이는 곳(곧 십자가 위에서 아들을 내어 주신 그 사랑 안)에서 가장 찬란하게 드러난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부활과 승천에서 성령 강림, 성모의 승천과 천상 모후 대관까지 이어지는 이 신비들은 ‘하느님의 사랑의 형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변화의 여정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영광의 신비 1단 | 사랑 안에서 열리는 눈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요한 20,16)
마리아 막달레나가 주님을 알아본 순간은 단순한 시각의 회복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이루어진 인식의 변화였다. 그녀의 눈을 가렸던 것은 눈물이 아니라,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했던 상실과 어둠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장막을 걷어 낸 것은 한 마디,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음성이었다. 사랑은 그렇게 어둠을 밝히며 다가온다. 그것은 지식이나 논증이 아닌, 인격적 관계 안에서 열리는 인식의 변화이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도 그러했다. 그들은 절망에 눈이 가려져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말씀을 들으며 가슴이 타오른다. 그런 다음 함께 앉아 빵을 떼는 순간에 비로소 그분을 알아본다(루카 24,32-35 참조).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처럼 우리를 납득시킬 새로운 논리를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삶의 자리를 관통해 다가오시는 분의 현존을 통해 우리가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새롭게 한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신다. 그 음성은 멀리 있지 않다. 주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 이해받고 있다는 경험, 어둠 속에서도 나를 향해 열려 있는 시선을 통해 우리는 다시 부활의 빛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깨닫는다. 사랑은 죽음을 이겼고, 부활의 새 생명이 지금 이 순간 내 안에 움트고 있다는 것을.
영광의 신비 2단 | 기다림에서 파견으로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마르 16,19)
예수님의 승천은 단순한 이별이나 부재의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하느님의 보좌에 오르셨다는 선포이며, 그리스도께 주어진 보편적 주권의 신비이다. 주님께서는 우리 곁을 떠나신 것이 아니라, 이제 모든 곳에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고, 하늘과 땅을 잇는 중개자로 현존하신다. 그분께서 하늘로 오르시는 광경을 바라본 제자들은 “그분을 경배하고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루카 24,52 참조)
이는 참으로 역설적이다. 흔히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라고 말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음에도 제자들은 더 큰 기쁨과 확신 속에 돌아간다. 이는 ‘멀어짐’이 곧 ‘더 깊은 친밀함’으로 변모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사도행전은 이 장면에 또 하나의 흥미로운 주제를 더하는데, 천사들이 이렇게 묻는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 1,11) 이 물음은 우리 신앙의 본질이 하늘을 바라보며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하늘을 증언하는 데에 있음을 보여 준다.
우리는 영광 속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린다. 지금 여기에서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 이것이 승천의 신비가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이다.
영광의 신비 3단 | 성령이 이루시는 사랑의 일치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사도 2,2)
닫힌 문 안에 웅크리고 있던 제자들에게 불어온 성령의 바람과 불은, 단지 초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존재를 새롭게 하시는 내적인 생명의 징후이다. 성령은 우리를 자리에서 일으키고, 언어의 장벽, 문화의 경계, 두려움의 울타리를 허무신다.
오순절의 기적은 단지 말의 다양성이 아니라, 사랑의 일치가 가능하다는 계시다. 성령은 이처럼 특정 민족과 경계를 넘어서, 차별 없이 모든 인류를 하나로 묶는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 안에 불러일으키신다. 그리고 이 성령 안에서 교회는 더 이상 과거의 기억이 아닌,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성령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찾아오신다. 꺼져 버린 열망 안에, 막혀 버린 관계 안에, 식어 버린 신앙의 중심에, 불현듯 바람처럼 불어오고 불처럼 타오르신다. 그리하여 우리를 새롭게 하시며, 하느님의 언어로 말하게 하신다. 사랑과 용서, 연대와 진실의 언어로.
이 은총 안에서 우리는 다시 용기를 얻는다. 일치란 같은 생각이 아니라, 같은 사랑 안에 머무는 일이다. 성령께서 하나로 이끄시는 그 사랑 안에서 교회는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그 걸음 하나하나가, 세상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의 빛이 된다.
영광의 신비 4단 | 지상 여정의 거룩한 완성, 승천
“당신께서는 제 영혼을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께 충실한 이는 구렁을 아니 보게 하십니다.” (시편 16,10)
성모 마리아의 승천은 단지 한 인물의 영광스러운 종결이 아니라, 지상 여정의 거룩한 완성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신비이다. 교회는 우리보다 먼저 믿음의 길을 걸었고 마침내 하느님의 품에 안긴 마리아 안에서 자신의 미래를 본다.
그녀의 삶은 은총 안에서 시작되었고, 그 은총에 끝까지 응답함으로써 충만히 채워졌다. 말씀에 “예.”라고 응답한 그 순간부터, 마리아는 침묵과 신뢰로 그 말씀을 품고 살아갔다. 그리하여 죽음의 부패에 머무르지 않고, 몸과 영혼 모두 하늘로 올림을 받으신다.
이처럼 하늘에 들어 올려진 마리아의 모습은 고요하고 감추어진 일상의 삶, 눈에 띄지 않는 충실한 응답이 어떤 영광으로 열매 맺는지를 보여 준다.
영광의 신비 5단 | 섬김과 순명의 열매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묵시 12,1)
천상 모후로서의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한 삶이 어떻게 참된 다스림의 자리로 이끄는지를 보여 준다. 그녀의 대관은 명예의 보상이 아니라, 섬김의 삶이 지닌 본질적 영광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 맡긴 이가, 하늘에서는 하느님과 함께 다스리는 자로 세워지는 것, 이것이 하늘의 논리이다.
마리아는 오직 겸손과 침묵, 그리고 사랑을 내어 주며 하느님의 지혜를 드러냈으며, 그렇게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완성된 순명은, 이제 지상의 자녀들을 위한 전구의 사명으로 이어진다.
마리아의 머리에 씌워진 열두 별의 관은 단지 한 개인의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 전체의 희망을 품은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마리아는 교회의 모상으로서, “모든 이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게 될” 그날을 기다리며 우리와 함께, 그리고 그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남의 은총을 청하며
영광의 신비는, 믿는 이들에게 주어질 최종적 운명을 미리 비추어 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은 죽음이 끝이 아님을,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이 인류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 우리를 들어 올리신 사건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승천과 천상 모후의 관을 쓰심은, 부활한 육신의 영광이 단지 그리스도만의 것이 아니라, 그분을 따르는 모든 이에게 열린 약속이라는 것을 미리 보여 주는 표지가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리 3,21)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에게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를 권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령으로 ‘새로 남’의 은총을 통해 우리를 세상 깊숙한 곳으로 다시 파견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태어나, 그분의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며, 그분의 손과 발로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머무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십자가 죽음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 이 세상 안에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라고 강조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