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주 기도로 만나는 은총의 순간 | 고통의 신비

성경 이야기

묵주 기도로 만나는 은총의 순간 | 고통의 신비

십자가에서 완성된 사랑의 신비

2025.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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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가 그린 <채찍질 당한 예수, 그리스도인 영혼이 관상하다(Christ after the Flagellation contemplated by the Christian Soul)>는 그리스도 수난의 순간을 강렬하게 포착한다.

 

그림 한가운데, 채찍질을 당한 뒤 쓰러져 있는 예수님의 몸은 고통으로 축 늘어져 있다. 목에는 밧줄이 걸려 있고, 붉은 바닥과 기둥에는 핏자국이 남아 있다. 땅바닥에는 채찍과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흩어져 있다. 공간 전체는 고통스러운 침묵으로 가득하다.

 

그 순간, 어린 영혼과 천사가 등장한다. 천사는 조심스레 소년의 시선을 예수님께로 이끈다. 그리스도인의 영혼 전체를 상징하듯 흰옷을 입은 소년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가슴을 찢는 듯한 슬픔 속에서 그분을 바라본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고개를 들어 그를 향해 시선을 주신다. 이제 그 눈길은 곧 한 줄기 빛이 되어 소년의 가슴을 밝힌다.

 

 


 

고통의 신비 1| 내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Non mea sed tua)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라는 예수님의 이 기도는 고통을 피하려는 나약함이 아니라, 피가 섞인 땀이 흘러내리는 순간에도 하느님을 향해 자신을 열어 보이는 완전한 신뢰의 표현이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정념의 지배에서 벗어난 현인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와 똑같이 고통과 두려움을 겪으신다. 그리고 그 감정의 격류 속에서, 끝내 자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택하신다.

 

겟세마니의 기도는 하느님의 침묵 앞에서 인간이 드릴 수 있는 가장 정직하고 깊은 신앙의 응답이다. 말할 수 없는 갈등과 불확실성이 짙어지는 밤, 이 신비는 우리에게 조용히 묻는다.

 

지금, 내가 바라는 것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 중 무엇을 따르겠는가?”

 

모호함과 갈등 속에서도 우리가 하느님을 신뢰할 때 그분의 뜻이 이루어진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 앞에 자신을 비워 내며 무릎 꿇는 법을 보여 주셨고, 비움과 순종은 마침내 사랑의 완성이 되었다.

 


 

고통의 신비 2| 상처 속에 깃든 용서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5)

 

예수님께서는 기둥에 묶인 채 말없이 그 모든 폭력을 견디신다. 항변하지 않으시고, 원망하지 않으신다. 때로는 우리도 보이지 않는 채찍에 맞아 쓰러질 때가 있다. 무심한 말 한마디, 뒤에서 속삭이는 비난, 외면과 침묵이 남긴 흉터들. 이럴 때마다 우리 안에 솟구치는 분노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이 모든 고통을 되갚아 주어야 하지 않겠냐고 속삭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앙갚음이 아닌 용서로써 그 자리에 계신다. 베드로가 그분을 배신했을 때에도 그를 향해 몸을 돌려바라보시던 예수님의 시선. 그 시선 앞에서 우리는 깨닫는다. 관계의 진정한 변화는 복수가 아닌 용서로 시작된다는 것을. 그분의 상처에 우리의 상처를 포갤 때, 그것은 더 이상 복수심의 불씨가 아닌,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의 제물이 된다.

 


 

고통의 신비 3| 치욕 속에서 드러나는 존엄

 

그들은 예수의 머리에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고 외치며 그분의 얼굴에 침을 뱉고, 갈대로 머리를 내리쳤다.”(마태 27,29-30 참조)

 

조롱과 침, 머리를 내리치는 손길들 사이에서 예수님께서는 치욕적인 고통의 관을 쓰신다. 찢긴 얼굴과 피로 물든 머리 위로 침묵이 흐른다. 그러나 그 침묵은 자아를 온전히 내어 줄 줄 아는 이만이 지닐 수 있는 깊고 단단한 존엄이다.

 

무시와 오해, 조롱 앞에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방어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바로 그 반응은 우리가 여전히 타인의 시선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다. 자신의 것이 아닌 물건을 남에게 증여할 수 없듯, 우리의 자아 역시 그것이 온전히 나의 것이 될 때에만 자유롭게 내어 줄 수 있다. 되갚음으로 응수하는 이의 시선은 여전히 바깥을 향하고 있고, 그 시선의 방향은 곧 자아의 속박을 드러낸다. 자신을 지키는 것 같지만 실상은 참된 자신을 잃고 있는 것이다.

 

모욕과 무시를 당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알몸으로 서 있는 것과 같은 기분을 마주하게 된다. 이는 창세기의 아담과 같은 경험일 것이다. 원죄 이전의 아담은 사실 자신의 알몸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자 그는 자신이 알몸인 줄 알고 두려워 숨어 버린다.”(창세 3,10) 인간은 그 이후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자신을 방어하는 데 익숙해졌다.

 

이제, 모욕당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사랑으로 모든 것을 견디어 내신 그분을 묵상하며, 우리 역시 다른 이들의 시선을 넘어,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서 우리 안에 새겨진 그분의 모상, 즉 거룩하신 자비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기를 청해 본다.

 


 

고통의 신비 4| 고통의 연대와 사랑의 여정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터라는 곳으로 나가셨다.”(요한 19,17)

 

살다 보면 우리 각자에게도 십자가가 주어진다. 생계의 무게, 부르심을 향한 내적 갈등과 회의, 불확실한 미래, 외로움,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아래로 끌어당기며, 때로는 주저앉게 만든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이 길에서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그 길을 걸으셨고, 지금도 우리 곁에서 그 무게를 함께 나누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의 고통을 관망하지 않으신다.

 

그날, 골고타의 길 위에서도 그러했다. 시몬은 (비록 그가 처음부터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누어 지고 갔고, 베로니카는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주었으며, 예루살렘의 여인들은 눈물로 그 길을 동행했다. 이처럼 십자가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 등을 돌리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함께 짊어질 수 있는 것이 된다. 그 짧고 조용한 연대가 예수님의 수난을 완성한 사랑의 조각들이었다.

 

삶이 우리를 아래로 끌어당기더라도, 누군가가 함께 있어 준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말없이 곁을 지키는 사람, 짧은 기도로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 함께 걷는 사람. 이들이야말로 오늘날의 시몬이며 베로니카다.

 

사랑은 함께 걷는 것이다. 그것은 거창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는 무게를 조금 덜어 주는 조용한 몸짓이다. 서로의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는 그 순간, 우리는 중력처럼 내려앉는 고통 속에서도, 새로운 시작을 가능케 하는 은총의 공간에 이르게 된다.

 


 

고통의 신비 5| 사랑의 완성

 

다 이루었다.”(요한 19,30)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숨을 내쉬며 하신 이 말은 단순한 고통의 종결이 아닌, 더는 줄 것이 없을 때까지 자신을 내어 주신 사랑의 완성을 보여 준다. 세상이 보기에는 패배처럼 보였지만, 십자가는 사랑이 도달한 가장 높은 봉우리였고, 그분의 낮아짐은 하느님 사랑의 가장 깊은 자리에 이르렀다.

 

우리 역시 삶 안에서 수없이 작은 죽음을 경험한다. 뜻대로 되지 않는 하루,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수고, 오해와 단절,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 그런 순간마다 우리는 자신을 지키려는 힘 대신, 내려놓는 법을 배워 간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이 내려놓음의 극치다. 설명되지 않는 고통 속에서도 사랑을 선택하고, 자신의 뜻을 초월하여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길 때, 십자가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은 천 마디 말보다도 더 깊은 방식으로 우리 안에 새겨진다.

 

오늘날 저를 인도하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거룩한 뜻에 저를 모두 맡기는 것뿐이고, 다른 나침반이라고는 없습니다! 세상의 방해를 받지 않고 제 영혼에 하느님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만 열렬히 구할 뿐입니다. 이제 저는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영적 찬가》에 나오는 아래의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그윽한 술광에서 나는 마셨네. 그리고 밖으로 나오니 허허벌판이라 아는 것이 전혀 없네. 기르던 양 떼도 잃고 말았구나……. 내 영혼이 모든 힘을 다하여 그를 섬겼네. 이제는 양 떼도 없고, 할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 이제는 오직 사랑하는 것만이 나의 일이구나.’”

─ 《성녀 소화 데레사 자서전》, 가톨릭출판사, p.304~305

 


 

고통에서 피어나는 일치의 은총을 청하며

 

고통의 신비는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 수난의 신비 안에 연결하는 은총의 시간이다. 고통과 죽음을 통과한 사랑에게만 주어지는 부활의 은총, 그것이야말로 주님께서 먼저 보여 주신 희망이며, 우리가 따라 걸어야 할 길이 아닐까?

 

이제, 그분의 수난을 묵상하며, 무죄하신 그분의 상처가 죄 많은 나의 상처를 감싸 주시기를,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자비하신 눈길이 내 영혼의 깊은 심연까지 영원토록 머무르시길 기도드린다.

 

저희는 사랑으로 당신 앞에 나아갑니다.

저희의 고통을 당신께 드리며, 저희의 시선과 마음을 당신의 성스러운 십자가로 돌리고,

당신의 언약에 힘을 얻어 간구합니다.

저희의 구원자이신 분,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시여, 찬미받으소서.

, 구원자여,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저희 안에서 구원의 신비를 이루어 주소서!”

─ 동방 교회 예식서Liturgie maronite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Profile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소속으로 현재 로마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이수하고 있습니다. 성경 속 살아계신 하느님의 음성이 인간 언어의 희미한 잡음을 넘어 선명하게 울리도록, 마치 오래된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듯 조심스러운 손길과 눈길로 성경을 읽고, 되새기며, 이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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