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순례자들

교리와 전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순례자들

희망으로 가득 찬 순례의 여정

2024.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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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대축일 밤 미사가 끝나면 어렸을 적의 추억이 떠오릅니다. 일명 새벽송입니다. 밤새 여러 집을 돌며 캐럴을 부르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주님의 성탄을 기쁘게 맞이했던 기억이 새록새록합니다. 눈까지 내리면 금상첨화지요.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며 흥에 겨워 목소리를 더 높이며 성가를 불렀습니다. 하지만 요즘 아파트가 많은 도시의 본당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입니다. 이 새벽송을 조금 고상하게 순례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겨가며 성가를 부르고, 도착한 집에서는 간단하게라도 함께 기도하는 이 여정처럼, 그 옛날 로마에서 교황님들도 1224일에서 25일로 넘어가는 깊은 밤에 이와 비슷한 여정에 참여했습니다.

 

《로마 미사 경본》이나 《매일 미사》를 살펴보면, 성탄 대축일에 네 개의 미사 전례문이 실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야, , 새벽, 낮 미사를 위한 전례문입니다. 전야 미사는 1224일 밤이 되기 전, 저녁 기도 즈음에 드리는 미사이므로, 성탄 대축일 미사는 밤, 새벽, 낮 미사가 됩니다. 교황님들은 이 세 미사를 각각 다른 성당에서 봉헌하셨습니다. 이른바 교황의 순회 미사(Missa stationalis)입니다. 이 성당에서 다른 성당으로 이동하기 위해 깊은 밤 어둠의 순례를 하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1225일 성탄 당일 낮 미사만 있었습니다. 45대 레오 성인 교황(461년 선종) 시절에도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이 미사만을 봉헌했습니다. 에페소 공의회(431)가 끝난 후, 로마 에스퀼리노 언덕에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모신 구유가 베들레헴에서 건너와 성유물로 안치되었습니다. 24일 밤, 교황님은 그 구유 앞에서 미사를 봉헌하기 시작하셨고 이것이 성탄 밤 미사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베들레헴에 있던 구유가 로마로 오게 됐으니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 로마의 베들레헴이 된 셈입니다. 로마에서는 자연스럽게 예루살렘 현지에서는 성탄 미사를 어떻게 봉헌할까?’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비슷한 시기의 자료인 《에게리아의 순례기》에 따르면, 그곳의 주교님은 베들레헴에서 밤 미사를 봉헌하고 다음 날 해가 뜨면 예루살렘의 주교좌성당에서 성탄 미사를 또 봉헌했습니다. 이 관습을 따르고자 로마에 계신 교황님께서도 밤 미사를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서, 다음 날 낮 미사는 로마의 첫 주교가 묻힌 자리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봉헌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새벽 미사는 어디서 봉헌했을까요? 바로 성녀 아나스타시아 성당이었습니다. 아나스타시아 성녀의 축일이 1225일입니다. 팔라티노 언덕 아래에 있던 이 성당은 동방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비잔틴 전례를 거행하던 곳으로, 오늘날로 치면 일종의 해외 교포 공동체의 성당이었습니다. 성모 마리아 대성당과 성 베드로 대성당 사이에 위치한 성녀 아나스타시아 성당. 교황님은 밤 미사를 마치고 성모님 성당을 나와, 다음 날 미사를 위해 바티칸 언덕으로 이동하시던 새벽녘에 이곳을 들러 그곳에 모인 동방의 신자들과 함께 성녀의 축일을 기념하고 성탄을 축하하며 그들을 위로하기도 했습니다. 이 미사가 바로 성탄 새벽 미사의 기원이 되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2025년은 희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번 희년에 로마를 방문하는 모든 신자들과 희년을 체험하는 모든 이들을 희망의 순례자들이라 표현합니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Spes non confundit).”라는 희년 선포 칙서의 말과 구세주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복음을 선포하신 일을 전하고자 희망으로 가득 찬 순례의 여정이 있었던 역사가 마주합니다. 지상 순례자인 교회 공동체에 속한 우리도 올해 1224일부터 시작되는 희년을 맞이하며 희망으로 가득 차기를 기도합니다.

 

Profile
인천교구 사제. 전례학을 전공했고, 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로 살아갑니다. 신자들이 바른 전례에 의식적으로 참여하도록 돕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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