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 다가오면 교회는 대림 시기를 맞이합니다. 사제는 보라색 제의를 입고 미사를 봉헌하고, 본당 공동체는 구세주의 성탄을 기다리며 판공성사를 받으면서 내적인 준비를 합니다. 이 준비 과정을 드러내며 대림환의 초도 하나씩 불을 밝힙니다. 주일 미사에서는 자비송을 노래하다가 대영광송을 생략하고 본기도로 이어집니다. 신부님의 “기도합시다.”라는 말을 들으면 그제서야 “아, 대림 시기라서 대영광송을 부르지 않았지.” 하며 대림 시기의 시작을 실감합니다. 보라색 제의, 판공성사, 사라진 대영광송. 이러한 모습을 보면, 대림 시기는 파스카 축제를 준비하는 사순 시기와 매우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림 시기는 정말로 사순 시기와 같이 참회와 보속, 단식의 시간, 회개의 기도 시간일까요?
먼저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늘 대영광송을 노래하다가 대림과 사순 시기에 중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원래 부르지 않던 대영광송을 성탄과 부활 시기 그리고 연중 시기 주일과 축일, 대축일에 부르는 것입니다. 즉, 없던 대영광송의 자리가 새롭게 마련되는 것이지요. 전례학자 바움슈타르크(A. Baumstark, 1872~1948년)의 말에 따르면, 전례주년에서 특별한 신비를 기념하는 전례 시기에 더 오래된 관습이 보존됩니다. 따라서 대영광송을 부르지 않는 대림과 사순 시기의 관습이 더 오래된 관습이고, 다른 전례 시기에 대영광송을 부르는 관습은 상대적으로 나중에 생겨난 것입니다. 초세기 로마 전례의 미사 그 어디에도 대림 시기나 성탄 시기, 평일이나 주일에 대영광송을 부르는 자리는 원래 없었습니다.
대영광송이 로마 전례의 미사 안으로 들어온 것은 2세기 초반, 제8대 텔레스포로 교황의 지시 덕분이었습니다. 《교황 연대표Liber Pontificalis》 제1권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 미사를 밤에 거행할 것과 이 성탄 밤 미사에서만, 성찬례 앞 부분에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으로 시작하는 천사 찬미가를 부르도록 지시했다.”
처음엔 아주 제한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년에 한 번, 성탄 밤 미사 때만(tantum noctu natale Domini) 부르던 찬미가였던 것입니다. 이 관습이 이제 다른 축일에도 자리 잡게 됩니다. 제51대 심마코 교황은 대영광송을 성탄, 부활, 연중 시기의 모든 주일과 순교자들의 축일에 부르도록 규정합니다.
대림 시기는 성탄 축제를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의 탄생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시기로 다르게 말하자면 ‘설레는’ 시기였습니다.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에서 “만약 오후 4시에 네가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 온 메시아를 설레는 마음으로 그리고 행복한 마음으로 맞이할 준비를 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여러 시대가 지나면서, 다른 지역의 관습에 영향을 받아 파스카 성야에 예비 신자들이 세례를 받는 것처럼, 성탄 대축일에도 세례를 받는 이들이 생깁니다. 파스카에 세례받을 이들이 사순 시기 동안 단식하고 참회하는 것처럼, 성탄 대축일에 세례를 받을 이들과 그들이 속한 공동체는 대림 시기에 단식과 회개, 참회의 시기를 보내게 된 것입니다. 이 두 시기의 성격이 비슷해진 이유를 바로 여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맞이할 구유를 깨끗이 청소하듯이, 모든 그리스도인은 구세주를 맞이할 준비의 일환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회개와 기도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준비하게 됩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많은 본당에서 성탄절 즈음에 세례성사를 거행합니다. 하지만 그 세례를 기다리며 대림 시기에 예비 신자들과 본당 공동체의 이름으로 참회의 보속을 시작했다는 역사적 맥락을 알고 이를 실천하는 공동체는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이번 대림 시기에는 구세주를 맞이할 마음, 세례로 새로 태어날 형제자매들을 맞이할 마음으로 내적, 외적인 준비를 하여 성탄을 맞이하고, 천사들의 찬미가인 대영광송을 기쁜 마음으로 부르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