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말들

영성과 신심

침묵의 말들

하느님의 침묵 가운데 다시 발견하는 시련의 의미

2026. 0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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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야가 죽음을 기다리던 나무 아래는 절망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동시에 하느님을 새롭게 만나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아프고 서툰 삶 역시

아직 그 의미가 모두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문득 마음을 비집고 나오는 말들이 있습니다. 그 말들은 지나간 선택을 자책하고, 오지 않은 내일을 두려워하는 말들입니다. 우리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될 일들을 장난감처럼 붙잡고 놓지 못하기도 합니다. 원하지 않는 삶의 파도가 크게 밀려올 때, 마음속에서 이 소리는 더 커집니다.

 

사랑하는 이가 아플 때, 하는 일이 벽에 부딪혔을 때, 약해진 몸이 마음을 흔들 때 이 생각의 꼬리들은 더 이상 꼬리가 아니게 됩니다. 거센 감정의 바람이 거대한 해일처럼 스스로를 세게 때려 생각의 먼지를 흩뿌리는 것입니다.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스스로 자라기라도 하는 것처럼 거대해진 생각은 자신을 지배하곤 합니다. 다행히 여차저차 파도가 잦아들면, 모른 척해 온 것들이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후의 잔해처럼 냄새를 내뿜습니다. 억눌렀던 슬픔이, 때로는 두려움이 바람 새듯 소리를 냅니다. 그럴 때 이런 목소리가 마음을 흔듭니다.

 

나는 왜 이럴까?’

 

이것은 자책입니다. 현명하지도 못하고, 지혜롭지도 못해서 삶에 여전히 서툴다는 책망입니다. 겉모습만 바꾼 똑같은 실수를 다시 저지르고는, 또다시 힘들어한 스스로에게 실망합니다.

 


 

의 삶이 무겁고 버거울 때

 

다른 이들은 편안하게 잘 사는 것 같은데, 나만 이 삶을 버거워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주 도망을 갑니다. 재미있는 영상으로, 분노를 돌릴 뉴스로, 소비로 관심을 돌립니다. 이 두려움과 불안의 몫을 무엇인가가 대신 짊어져 주기만 한다면 그 어떤 것도 상관없습니다.

 

내 삶은 왜 이리 무거운가?”

 

이 삶은 아프고, 나는 두렵기에, 스스로에게 향할 이 질문을 누구라도 대신 받아 준다면 괜찮아지곤 합니다. 영상 속 누군가를 비난하고, 역사 속 누군가를 탓하며, 거리의 낯모르는 이들을 욕하기도 하고,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다른 문화의 사람들에게 책임을 돌리기도 합니다.

 

아니면 영상 속 낯선 삶을 동경하며 자신을 잊기도 합니다. 대신 웃어 주고, 세상과 맞서는 매력적인 누군가에게 이 삶을 슬며시 맡겨 봅니다. 하지만 그렇게 분노하고 잊으려 해도 다시 돌아온 이 삶은 여전히 무겁습니다.

 


 

나무 밑 엘리야의 곁에서

 

그래서 이런 로 살아가는 삶은, 딱지가 앉기 전에 다시 상처를 내놓은 삶 같습니다. 바람이 불어도 걱정되고, 요란스레 웃으면서 지나가는 손짓이 닿을까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남들은 괜찮다고, 별일 아니라고 하지만, 살짝 닿은 옷깃에 상처가 아리듯이 삶은 꽤나 따끔거립니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이 삶을 미루기 어려워질 때 마음속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내 탓일지도 몰라.’

 

고민 끝에 마주하는 이 목소리는 우리를 더 괴롭힙니다. 나는 나를 선택한 적이 없는데, 내가 나인 것마저 나를 괴롭히는 선택이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나는 헤르만 헤세처럼, 지나치게 얇은 피부를 가지고 세상을 대하는 이들 중 하나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엘리야는 이파리 없는 관목 아래 들어가 앉아, 죽기를 간청했습니다(1열왕 19,4 참조). 종종 엘리야가 누워 있던 나무 밑에 함께 앉아, 그가 보고 있던 세상을 같이 봅니다. 카르멜산에서 거두었던 승리는 온데간데없고, 자신을 노리는 이들만이 주위를 채웁니다. 함께 싸워 주는 이도, 같이 슬퍼하거나 한탄할 동료도 없습니다. 그나마 나무가 한낮의 더위를 막아 주지만, 얇은 나뭇가지는 찌는 듯한 더위에 비참함마저 덧입힙니다.

 


 

하느님의 침묵을 품은 복된 둥지

 

왜 엘리야는 광야의 나무 밑에 있었을까요? 그가 거둔 승리는 어디로 간 것일까요? 어쩌면 그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던 바알 예언자들을 못 견디는 이였을 것입니다. 권력자들의 옆에 붙어 세상이 망가져도 자신의 배만 채우면 된다고 믿는 이들의 탐욕이 껄끄러웠을지도 모릅니다. 삶은 원래 그런 거야.”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시원스레 내지른 고함이 카르멜산에서의 승리였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내 당신의 자리로 돌아가시고 원래의 세상에 다시 서게 된 자신을 보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흘러가던 파도를 막아 세웠으니 이제 세상의 복수가 그의 앞에 떨어집니다. 그래서 그는 쫓겨났던 것입니다. 광야로, 죽음만이 익숙한 그곳으로. 그는 세상에 녹아들지 못한 것을 속죄하기 위해 앙상한 나뭇가지 밑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1열왕 19,12)

 

그때 엘리야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불과 지진, 바람처럼 그의 삶을 흔들던 모든 것이 지나가고 침묵으로 조용히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세상의 어떤 소리와도 다른 침묵이 조용히 그 모습을 드러낼 때 하느님을 알아차립니다. 들리지 않는 소리로,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그를 안아 주시는 하느님을 마주합니다. 주님께서 계시던 침묵은 그를 괴롭힌 모든 소음을 설명해 줍니다.

 

! 이 삶은 선물이구나.’

 


 

아직, 더 두고 봐야 합니다

 

이제 엘리야가 앉아 죽음을 기다리던 나무 밑은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고통과 좌절이라는 이름 대신 인내와 희생이라 불리게 됩니다. 고통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였다고, 뒤늦게 그 의미를 알려 줍니다. 무겁기만 한 이 삶이 실은 하느님의 침묵을 품은 복된 둥지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제대 앞에서, 성당의 침묵 속에서 우리도 엘리야가 마주한 하느님을 만납니다. 우리를 뒤흔드는 모든 소리가 결국 이 침묵으로 감싸여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어설프고 서툰 삶도 아직 더 두고 봐야 합니다. 지금은 온전히 그 의미가 다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나의 삶이 원래 속해 있던 그 침묵으로 돌아가는 날, 그때 모든 의미가 드러날 것입니다. 이 무거운 삶은, 침묵 속에 가벼워집니다.

 


명형진 신부, 문재상 신부, 방종우 신부,

심재현 신부, 은성제 신부, 이한석 신부의 신앙 이야기를 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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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서울대교구 사제. 로마 교황청립 성서 대학에서 성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가톨릭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라는 말씀을 사제 생활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사랑으로 실현하고자 꿈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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