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사도 20,24).”라는 성경 구절은 나의 서품 성구다. 이 말씀은 바오로 사도가 선교 여행을 떠나기 전에 밝히신 포부였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말년에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 4,7).”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셨다.
사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서품 성구로 정한 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와 나를 위해 기도하고 동반해 준 많은 형제자매, 그리고 나에게 맡겨진 수많은 청소년을 위한 것이었다. 나는 이 말씀처럼 살레시오회 수도자로서 평생을 살아가고자 결심했다. 그리고 훗날 바오로 사도처럼 자신 있게 “달릴 길을 다 달렸다”라고 말하고 싶은 욕심도 조금은 있었다. 지금도 나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열심히 달리고 있다.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이만큼 쉬운 일도 없다. 가족, 지인, 직장 동료, 그리고 내가 관계 맺은 수많은 형제자매들을 생각하고 기도하며, 기도의 내용을 실천하는 것이다.
사랑의 실천, 그리스도인이 나아갈 길
사랑은 기회가 올 때만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과도 같다. 하느님께서는 선하든 악하든 차별 없이 하루라는 시간을 주시며, 똑같이 비를 내리고 해가 떠오르게 하셨다(마태 5,45).
우리는 성경과 영성 서적, 강연 등을 통해 사랑의 실천을 접해 왔다. 알로이시오 곤자가 성인은 “우리는 듣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고 새로운 계명까지 주셨다.
사랑이란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덕목이며, 우리의 영적 성장을 도모하고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는 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서는 어떠한 신분이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모든 일에서 하느님의 뜻과 영광을 추구하며 이웃에게 헌신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40항 참조). 따라서 성화의 길을 걷는 데 있어 사랑의 실천은 필수적이다.
일상에서 성화의 길을 걷는 방법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면밀히 돌아보아야 한다. 자신을 돌아볼 때, 우리가 맡은 일상적인 일에서 성화의 길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찾게 된다. 성화의 길이란 하느님께서 일상 안에서 우리를 서서히 변화시켜 가시는 과정이며, 그 부르심은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지금, 나의 삶 안에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가 맡은 일들은 단순한 과업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매일의 상황과 경험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자신을 성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매일의 경험을 성화시키기 위해 거창한 일을 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에 달려 있다. 정해진 기도 시간뿐만 아니라, 하루를 살아가는 순간순간 주님을 생각하며 마음을 여는 것이다. 그렇게 기도를 올리며 이웃을 위한 마음으로 봉헌한다면 이 또한 훌륭한 기도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혼자서 길을 걸을 때도 하느님을 떠올리고, 이웃을 생각하며 화살기도를 드리는 순간도 훌륭한 실천의 순간이다. 설거지나 청소 같은 일상적 일들을 할 때에도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를 성장하게 하는 작은 순간, 화살기도와 의식 성찰
애덕의 성인이자 대영성가이며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화살기도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께서는 화살기도를 통해 “우리 마음은 예수님과 아주 친밀해질 수 있으며, 우리 영혼은 예수님 현존의 향기에 흠뻑 젖게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화살기도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강력한 기도이다. 세상일을 하면서도 어떤 방해 없이 쉽게 바칠 수 있으며, 모든 일을 예수님과 연결시켜 준다. 동시에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께서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이 발견되는 일상의 환경에 전적으로 참여하도록 창조되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성화의 길이란 우리가 매일 겪는 일상에서 펼쳐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의식 성찰이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되새김질하며 묵상하듯, 하루를 되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잠들기 전 3분 동안이라도 자신을 돌아보며 오늘 하루 주님과 얼마나 일치하려고 노력했는지를 의식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어떤 이에게는 이 3분이 귀찮고 번거롭게만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짧은 시간은 우리를 하루하루 영적으로 성장시키는 귀한 시간이 될 것이다. 꿀벌은 꿀을 빨아들이면서 꽃을 조금도 상하게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있어 매일의 의식 성찰은 일상의 시간을 빼앗아 가는 아까운 시간이 아니라, 하루를 완성하고 나를 성장케 하는 중요한 시간이라는 것은 잊지 않아야 한다.
아주 많이 사랑하셔야 합니다
기도 시간을 얼마나 길게 갖느냐보다, 일상에서 하느님을 어떤 식으로 만나느냐가 중요하다. 예전에 어떤 교우분과 영적 담화를 나누던 중 이런 질문을 받았다. “어떻게 매 시간마다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나요?” 이에 나는 되물었다. “혹시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 교우분은 자신 있게 “네, 사랑합니다.”라고 응답했다. 그래서 그 교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냥 사랑하지 말고 많이 그것도 아주 많이 사랑하셔야 매 시간마다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만 있다면 무조건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영적 성장을 바라는 우리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 예수님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한 적 있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마음이 늘 연인을 향해 있고, 그리워하며, 보고 있어도 계속 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어떤 시인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할 때 가장 행복하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사랑은 대단하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을 생각하고, 찾고, 그리워하고, 대화하기를 그칠 수가 없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 스스로가 예수님과 관계를 깊이 맺게 된다면 우리 각자는 더 많은 사랑의 실천을 하게 될 것이다. 또한 말보다 행동으로 일상 안에서 기도하며 담백하고 기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조용히 자라나는 영적 성장의 길
물론 영적 발전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다. 단거리달리기가 아니라 긴 호흡으로 가야 하는 마라톤과 같기 때문이다. 때로는 포기하고 싶고, 뒤돌아보면 별로 나아가지 못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신앙의 여정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분명히 자라나는 생명과도 같다. 콩나물시루에 담긴 물을 부으면, 그 물이 금세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 콩나물이 무럭무럭 자라 있는 것처럼 말이다. 당장은 아무 변화가 없는 듯해도, 일상을 기도로 봉헌하고 화살기도로 하느님께 마음을 연다면 어느새 우리 안에도 조용한 영적 성장이 일어날 것이다.
살다 보면 지금은 알 수 없지만 때가 되면 열매를 맺는 것들이 있다. 일상적으로 하느님을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이 항상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열매를 맺을 것이다. 하루하루 특별히 감사하는 마음만 있어도 우리는 이미 절반은 성공한 길을 걸어가고 있는 셈이다.
베네딕토 성인은 “적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항상 만족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신앙은 바로 이러한 감사의 마음에서 시작된다. 사소한 일에도 감사하고 기도하며 누군가를 위한 마음과 희생으로 봉헌한다면, 그것은 곧 사랑의 실천이 된다. 이렇게 사는 삶은 곧 하느님을 향해 열린 관상의 삶으로 이어진다.
관상의 삶이란 단순히 신비로운 체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신비를 매일의 삶으로 살아 내는 것이다. 신비를 삶으로 살아 내는 일은 누구에나 열려 있으며, 바로 그 길 위에서 누구든지 성인의 삶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당신께서 함께하지 않으신 순간은 제 기억에 없습니다.”(《희망》, 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