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프라도 사제회의 몇몇 동료들과 함께 4박 5일 일정으로 몽골에 다녀왔습니다. 방문의 주된 목적은 몽골에서 오랜 시간 선교사로 살다가 지난 2023년에 세상을 떠나신 김성현 신부님의 무덤을 방문하고, 그 무덤에 고향 공세리의 흙을 한 줌 뿌려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기왕 몽골에 간 김에 무덤만 방문하고 돌아오기는 조금 아쉬워서, 저희는 무덤을 방문하기에 앞서 신부님께서 사셨던 것과 비슷하게 몽골 초원의 게르에서 며칠 머물며 시간을 보내기로 계획했습니다.
울란바타르 신공항에서 내려, 저희를 마중 나온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차를 타고 오래도록 도로 위를 달렸습니다. 처음에는 잘 포장된 아스팔트길이었지만, 몇 시간 지나고 나니 아예 포장된 길이 사라져 버리더군요. 길 없는 길, 초원 위에 남아 있는 바퀴 자국을 따라 이리저리 헤매며 다시 몇 시간인가를 달리니, 갑자기 초원 한복판에 게르촌이 나타났습니다. 세 개의 침대와 작은 탁자 하나만 놓여 있는 게르에 짐을 풀고, 곧바로 3박 4일의 게르 체험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저희는 그곳에서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하려던 것도 아니었고, 특별한 체험을 하려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몽골의 게르에서 머물며, 초원을 보고, 밤하늘을 보고, 함께 기도하고, 미사하고, 밥을 지어 먹으며, 몽골에서 머물다 이제는 초원의 바람이 되신 김성현 신부님의 삶을 조금이나마 느껴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저희의 일정은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삼시 세 끼 함께 밥을 지어 먹고, 밤이면 하늘을 바라보며 맥주와 몽골 보드카도 한 잔 마시고, 함께 복음을 연구하고, 나눔을 하고, 미사를 했습니다.
끝없이 푸르게 펼쳐진 몽골의 초원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한국에 일하러 온 몽골 사람들이 바다를 보면 참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몽골에 사는 동료 사제가 해 주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바다를 처음 보고 신기하고 아름다워서 좋아하는 줄로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푸르게 펼쳐진 바다를 보면 몽골의 초원이 떠올라서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푸른 초원이 정말 넘실거리는 바다처럼 보였습니다.
몽골의 밤하늘도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별이 쏟아진다’는 표현이 그저 관용구인 줄로만 알았는데, 실제로 몽골의 밤하늘을 보니 말 그대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별들이 쏟아질 듯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밤하늘에 흐르는 강과도 같이 뿌연 빛의 은하수도 너무도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초원과 밤하늘, 이렇듯 대자연을 바라보며 그저 경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무도 압도적이고, 너무도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인간이 얼마나 미소한 존재인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얼마나 큰 신비로 가득한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게 있어서 몽골에서 가장 강렬했던 체험은 초원도, 밤하늘도 아니고, 함께 모여 나눔을 하던 때에 일어났던 작은 사건이었습니다. 저희가 그늘진 곳에 놓인 테이블 주위에 모여서 나눔을 하고 있었는데, 참새 한 마리가 테이블 곁으로 포르르 날아왔습니다. 자세히 보니 입에는 무언가 먹을 것을 물고 있었지요. 테이블 옆에서 저희 눈치를 살피다가, 제가 그쪽을 바라보니 황급히 조금 떨어진 곳으로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이내 다시 다가와 테이블 곁에서 알짱거리며 저희 눈치를 살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그쪽을 바라보니 다시 황급히 달아나더군요. 이렇게 다가왔다 달아나기를 몇 차례, 이번에는 일부러 눈길을 그쪽으로 돌리지 않고, 살짝 곁눈질로만 참새를 살펴보았습니다. 참새는 아주 조심스럽게 저희 눈치를 살피다가 아무도 자기를 보고 있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는지, 황급히 테이블 곁의 담벼락 윗부분에 난 구멍으로 들어갔습니다. 잠시 후에 고개를 내민 참새의 부리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참새는 다시 포르르 날아가더니, 또다시 먹을 것을 물고 저희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조심 담벼락의 구멍으로 들어갔습니다. 어쩌면 그 안에 둥지가 있고, 둥지에는 엄마가 물어다 주는 먹이를 기다리는 새끼 참새들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더군요. 참새는 곧 구멍에서 나와 날아갔고, 잠시 뒤에 또 먹이를 물고 나타났습니다. 여전히 저희를 경계하며 테이블 주위를 서성이는 참새를 보며, 괜히 조금 미안해졌습니다. 저희의 존재가 그 어미 참새에게 방해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지요. 사실 어떤 식으로든 그 참새를 도와주고 싶었고, ‘우리는 너희를 해치지 않아.’라고 말해 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참새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그 참새와 참새가 들어가려는 담벼락의 구멍을 향해 눈길을 주지 않는 것뿐이었습니다. 저희의 존재 자체가 참새에게는 경계의 대상이고, 불편함을 주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지요. 아마 저희가 나눔을 마치고 각자의 게르로 돌아갔을 때, 비로소 그 참새는 훨씬 더 자유롭고 편안하게 자신의 둥지를 왕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희가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참새를 대한다 해도, 그 참새에게 저희의 존재는 위협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때로는 나의 존재 자체가 타인에게 위협이 되거나 불편함을 느끼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존재存在가 아닌 부재不在가 진정으로 타인을 돕는 일일 수도 있고, 행위行爲가 아닌 무위無爲를 통해 타인을 더욱 빛나게 만들어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타인을 돕거나 사랑하려고 할 때도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축소시키기’를 주저하곤 합니다. 돕는 행위의 주체가 ‘나’이기를 바라고, 사랑하는 주체가 여전히 ‘나’로 머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더 큰 사랑은 타인이 더욱 빛날 수 있도록 나를 덜어 내는 마음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을까요?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나를 덜어 낼 수 있다면, 나를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 사랑은 참으로 진실한 것이겠지요.
몽골의 밤하늘에는 무수히 많은 별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아마 50년 전 한국에서도 그렇게 빛나는 별들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도시에서는 아무리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눈에 보이는 별이 고작 몇 개뿐입니다. 한국의 하늘이라고 해서 특별히 별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요. 단지 주위에 휘황찬란한 불빛이 너무 많을 뿐. 태양이 물러나고 어둠이 사위를 감쌀 때, 자신을 드러내며 주위를 억지로 밝히려 드는 불빛이 없다면,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은 조금 더 또렷이 우리에게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태양이 스스로 물러날 때, 별빛은 그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둥지 곁을 떠날 때, 참새는 비로소 자유롭게 둥지를 왕래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방식 역시 이와 같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서 당신을 덜어 내심으로써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당신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의 세상, 겉으로 보기에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거짓된 사랑과 평화의 나라를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끝없는 죄악 속에서 번민하면서도, 전쟁과 미움, 고통과 슬픔에 몸부림치면서도, 영원하신 당신을 찾아 헤매는, 자유 의지를 지닌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당신을 덜어 내심으로써 우리가 더욱 빛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부재와 무위의 길, 어쩌면 그 길은 가장 힘든 길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길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이라고, 오늘도 저는 믿고 있습니다. 몽골에서 만난 참새가, 몽골에서 만난 밤하늘이, 그렇게 제게 하느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사랑하라고, 조용히 제게 속삭이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