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오르는 밤

영성과 신심

차오르는 밤

다가올 희년이 모두에게 담대한 희망을 선사해 주기를

2025. 01. 01
읽음 255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예수》(가톨릭출판사, 2023)를 아껴 읽으며 성탄 대축일을 기다렸다. 이 책의 성격을 하나로 정하기는 쉽지 않다. 장면 장면이 감각적으로 묘사되고 195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가 썼다는 점에서는 소설적 성격이 있지만, 복음서를 충실히 해석해 예수님의 기록을 따라간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학문적 성격도 띤다. 가장 가깝게는 평전이 떠오르지만, 고증에 중점을 두지 않고 대상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들어가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 또한 어울리지는 않을 것 같다. 그저 이 책은 말 그대로 예수이고 특히 예수님의 내면을 따라가 보는 여정이다. 그리고 인간으로 육화된 하느님이 경험하셨을 인간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하는 점에서 이는 인간으로 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초상이기도 하다.

 

나는 되도록 자기 전에만 가톨릭 책을 읽기로 했는데, 만약 그러지 않았다가는 내내 그것만 읽고 싶어질 것 같아서였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많은 책의 도움이 필요하다. 직접적인 정보를 제공해 주는 차원의 책뿐만 아니라 작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다주는 소설과 각종 책을 읽어야 하고, 틈틈이 식물과 동물에 관한 책들로 마음의 정화도 도모해야 한다.

가톨릭 책 읽기가 좋은 건 나를 가장 어린 독자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세례를 준비하던 시절부터 나는 손이 가는 대로 종교 서적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해하지 못한다고 자책하거나 조급해한 적이 없다. 모르는 게 당연하니까. 어느 날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는 나를 보고 집사람이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어렵지 않느냐는 말에 나는 아니, 뭐 재밌는데.” 하고 답했고 다 읽은 뒤에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네.” 하는 간단한 말로 소감을 대신했다. 어린 독자는 겁이 없고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충분한 시간이 남아 있다는 자신만만함이 있다. 오해하거나 독법의 오류를 지니더라도 수정될 수 있고 다만 읽기 시작하는 그 마음 자체로서 격려받는다. 그런 독서의 시간이 얼마나 행복할지는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소중한 시간을 자기 전 한두 시간에만 허락했다.

 

마음이 지옥으로 변했던 날들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예수》를 읽는 동안 계엄 후의 시간도 흘러갔다. 여의도 국회 앞에서 탄핵 통과를 기다리다 투표도 하지 않고 자리를 뜨는 여당 국회 의원들을 향해 돌아와.”라고 소리치던 시간이 있었다. 나는 내가 너무나 순진했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이 저렇구나, 국회 의원이라는 자들이 저럴 수가 있구나. 네 시간 동안 앉아 있던 찬 아스팔트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갈 길을 찾는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밀려오고 있었다. 정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 발걸음이 고맙고 미더우면서도 나는 나 자신의 순진함을 탓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하신 말을 떠올렸고 화장실을 찾아 백화점으로 갔을 때는 나처럼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이 얼굴이 발갛게 얼어 줄 서 있는 장면을 보았다.

 

그다음 주에도 광장으로 나갔다. 지하철을 탈 수 없어 마포대교를 걸어갔다. 집사람과 나는 한강이 이렇게 넓은 줄 몰랐다고 이야기를 나눴다. 한강의 은 크고 넓고 길다는 뜻의 우리 말인데 과연 그랬다. 전주보다 더 많은 사람이 나와 있었고 휴대 전화는 또 불통이었다. 국회 상황은 알 수 없었지만, 사람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고 서 있는 것으로 초조함을 견뎠다. 다행히 안테나가 달린 DMB를 가진 사람이 있어 우리는 그 주위로 모여들어 방송을 봤다. 전파보다 더 빠르게 와- 하는 함성이 행렬 앞에서 들려왔다. 가결이었다.

광장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인간에 대한 내 기대를 시험하는 일들은 계속됐다. 세상이 나빠질 때 가장 먼저 나빠지고 가장 오랫동안 앓는 자들이 예술가들이 아닐까. 우리는 세상의 무늬를 옮겨내는 일에 평생을 바치고 그런 존재로서 스스로가 쓰이기를 열망한다. 내란 가담자가 버젓이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이어가고 그들이 계획한 것이 결국은 전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마음은 더 지옥으로 변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데도……

 우리의 구세주가 세상에 오신 기쁜 날,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양처럼 순박한 마음으로 따뜻함을 간구하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데도 그늘은 걷히지 않는 것 같았다. 읽고 있는 책,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예수》도 이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예정된 고난을 치러야 하는 대목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이 부분에서 깊은 슬픔을 느낀다. 성당 미사는 예수님의 공생활을 기리는 일종의 이야기 플롯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축성 기도 전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하는 감사 기도문을 신자들과 외울 때부터 내 마음은 서늘해지기 시작한다. 그 영광의 찬미 뒤에 예수님께 일어난 수난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어린 당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신 예수님을 인간들이 어떻게 죄인으로 만들었는지, 모욕하였는지, 십자가에 매달라고 소리 질렀는지. 그 찬미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살의와 배척으로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나는 미련하게도 잊어버리지 못한다. 인간이 그런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이 두렵고 괴롭다.

 

예수의 존재 안에 있는 또 다른 누군가는 이 끔찍한 소명을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지금 이 순간, 예수는 이 공포에서 도망치려 했던 것이다. 그는 이마에 대고 있던 손을 뗐다. 손이 피로 젖어 있었다. 이 피는 어디서 온 걸까? 애원하는 기도는 그의 입술에서 멈췄고, 그저 듣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어떤 시기에 밤의 정적 속에서 눈과 귀가 멀어 버린 듯한 무관심을 경험한다. 이 상태는 그리스도를 짓눌렀다. 그는 이 무한한 부재에서 오는 공포를 육체로 느끼고 있었다. 창조주는 물러났고 피조물은 메마른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았다. 죽은 별들이 흩뿌려졌다.”(《프랑수아 모리아크의 예수》, 327~328)

 

이 초는 오직 예수님을 위한 거예요.”

 25일 성탄 미사는 저녁 청년부 미사에 참여했다. 전날 성탄 전야 미사 때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성당을 채웠기 때문이었다. 40분 전에 갔는데도 맨 뒷자리를 빼고는 거의 차 있었다. 모범 신자답게 늘 앞자리를 선호하는 나는 그 주변을 기웃거리다 한 노인분이 여기 앉아요!” 하고 권하신 덕분에 무사히 착석할 수 있었다. 구유 예절을 올릴 때나 영성체를 받을 때 모두 그간 본 적 없는 수의 신자들이 물결을 이뤘다. 미사 끝나고 나갈 때 신부님이 인파를 뚫고 나가기 어려워했을 정도였다. 물론 지난해에도 평소보다 많은 이들이 성당을 찾았지만, 올해는 마음이 어려운 탓에 더 많이 모인 것 같았다. 나는 내일 낮 미사에도 자리가 모자랄 테니 저녁에 가겠다고 집사람에게 말했다.

, 다른 사람들을 배려해 주는 거야?”

그렇지. 오랜만에 오는 사람들 한 명이라도 편안히 앉아야지.”

논리가 좀 이상한데?”

집사람이 지적했지만 나는 MBTI가 논리 판단형이라 이해를 못하는군, 하며 넘겼다. 예상대로 여섯 시 미사는 한적했다. 성당 마당으로 들어가 성모자상에 인사를 올리는데, 유리장 안을 두 개의 촛불이 밝히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어제는 초에 불을 켜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렸었다. 오늘도 초를 켤 생각은 없었지만, 촛불 하나를 더하고 싶었다. 그 뒤 기도를 하는데 다른 생각 없이 이 초는 오직 예수님을 위한 거예요.’ 하는 말이 떠올랐다. 탄생을 떠올리면 그 기쁨만큼 시큰한 슬픔이 느껴지는, 가장 여리고 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께, 인간으로 태어나 당연히 인간으로 죽어갈 내가 감히 드리는 작은 축복.

 

어제 사람들이 성당을 꽉 채우자 어느 교우분이 맨날 이랬으면 좋겠다.”라고 하셨는데, 성탄 당일 저녁 미사는 평소와 다름없이 적당한 수의 신자들이 모여 있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아기의 모습으로 와계시는 것은 내게는 너희가 필요하다, 내게도 너희의 구원이 필요하다는 뜻이라는 강론을 들으며 나는 구유 속의 예수님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미사가 끝나고 선물로 받은 떡에서는 갓 만든 온기가 남아 있었다. 나는 여전히 슬프고 무기력했지만, 성탄의 밤을 통과하면서는 어떤 힘이 차오르고 있다고 느꼈다. 일단 어린 독자로 남아 있는 건 나의 탐구를 계속케 하겠지만 어린 신자인 채로 남는 것은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아니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런 실망조차 감싸려 하시겠지만, 사랑하는 이를 슬프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프랑수아 모리아크는 책의 말미에서 이렇게 적는다.

 

마귀는 범죄자 중에 가장 악질이라 해도 여전히 희망을 품는 이에게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가장 무거운 짐 진 영혼 안에 희망의 빛이 남아 있는 한 그 영혼은 오직 한숨으로만 무한한 사랑과 분리될 뿐이다. 파멸의 아들이 이 한숨을 내쉬지 않았다는 것이 신비 중 신비다.”(《프랑수아 모리아크의 예수》, 327)

 

여기서 파멸의 아들이란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를 뜻한다. 하지만 우리의 밤은 다를 것이므로 다가올 희년이 모두에게 가장 담대한 희망을 선사해 주기를 기도한다.

Profile
2009년 <한국일보>로 등단해 《너무 한낮의 연애》(2016), 《경애의 마음》(2018), 《대온실 수리 보고서》(2024) 등의 소설과 《식물적 낙관》 등의 산문집을 냈습니다. 작고 단순하고 환해지기 위해 분투 중이며, 밤마다 가톨릭 책을 읽다가 잠에 들어 가족들에게 ‘재야 신학자’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60여 종의 식물들과 함께 살아가는 식집사입니다.

다른 분들이 함께 본 콘텐츠

시리즈10개의 아티클

김금희의 작은 은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