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24년 1월부터 3월까지 긴 여행을 했다. 남극 세종기지에서 머무른 것이다. 세종기지가 있는 킹조지섬에는 펭귄 마을, 줄여서 ‘펭마’라고 부르는 곳이 있는데, 여름이면 만여 마리의 젠투펭귄, 턱끈펭귄이 모여 조약돌로 집을 짓고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른다. 내가 찾아갔을 때는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기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중이었다. 남극을 다녀온 뒤 어느 독자가 그곳에서 주로 들은 음악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순간 나는 머뭇거렸는데 내내 성가만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질문을 한 데에는 남극에서의 내 느낌에 음악으로나마 동행하고 싶어서였을 텐데, 성가라고 하니 더 구체적으로는 묻지 않았다.
이상한 건 평소에는 나도 성가를 자주 듣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극에서는 성가를 듣거나 아니면 남극 자체의 소리만 들었다. 12m/s의 풍속으로 거칠게 부는 바람 소리, 마리안 소만(Marian cove)에서 무너지는 수천 톤의 빙벽 소리, 비행하는 남극도둑갈매기와 남극제비의 울음소리, 펭귄들이 고갯짓하며 대화하는 소리, 끄엉끄엉 물개가 짖는 소리. 남극을 누비다 방으로 돌아오면 나는 성가를 들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플레이리스트를 찾아보면, <내 모습 이대로>, <선한 능력으로>, <천사의 양식>, <어서 가 경배하세>, <봉헌 340>, <순교자 송가>, <오르시도다>, <할렐루야> 같은 노래들이다. 나는 “하느님 기쁘시죠?”라고 일기장에 적기도 했다. 그건 내가 기뻤기 때문이다. 경이로운 자연 앞에서 나는 기꺼이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은” 생명이 되었다.
그렇게 하느님의 입김을 느끼던 나는 3월에 도시로 돌아왔다. 도시의 아침은 내가 떠나던 1월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아빠가 쓰러져 입퇴원을 반복해야 했다는 것 말고는. 아니, 그건 너무 큰일이었다. 나는 남극에서 행복했던 만큼 가장 나쁜 상황으로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하느님의 존재를 어렴풋이 느꼈던 날들
성당에 가 보면 대대로 종교를 가졌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어려서 유아 세례를 받고 성당 주일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알게 된 신자들. 하지만 나는 매우 이례적인 경우로 마흔 살이 넘어 제 발로 성당을 갔다. 《크리스마스 타일》이라는 연작 소설집 작업을 하다가 종교인을 관찰하고 싶다 생각했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그렇게 2주를 나가자 (후에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알게 된) 어떤 분이 말을 걸었고 내가 신자가 아니라고 하자 놀라며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연신 뒤돌아보며 때론 손짓까지 해 가며 나를 수녀님께 데려가던 프란치스코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전에도 가톨릭에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니다. 어떻게 성당을 다닐 수 있는지 인터넷으로 종종 검색했고, 성당 생활하는 사람들의 사진을 바라보다 말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내 행동은 하느님의 존재를 어렴풋이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
서른 살 겨울, 나는 혼자 부산행 밤 기차를 탄 적이 있다. 작가로 등단한 이후였고 어려서 꿈꾸던 직업을 갖게 된 사람치고는 너무나 무기력하고 아픈 시절을 보내던 때였다. 꿈을 이루었는데 왜 이렇게 슬프지? 왜 더 견딜 수 없이 화가 나지? 그때는 몰랐지만 그건 쓰는 사람이 통과해야 하는 의례였다. 잘 쓰기 위해서는 우선 나를 돌아보아야 했고 내 상처와 대면해야 했고 그것과 싸우고 긴장한 끝에야 ‘쓸 수 있는’ 마음이 되니까. 마지막 기차로 내려가 찜질방에서 잔 나는 내 호적지 주소를 무작정 찾아갔다. 할머니가 마지막까지 계셨던 곳이자 아빠와 삼촌들이 모여 살았던 집이다.
나의 할머니가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는 건 내 유년의 가장 무거운 상처였다. 어른들은 어땠는지 몰라도 당시 열한 살에 불과했던 나는 할머니의 그런 죽음이 무섭고 더 나아가 공포스러웠다. 어디서도 한 적 없는 그 이유에 대해 털어놓으면, 할머니는 부산에서 함께 살던 삼촌이 더는 자신을 맡지 않겠다고 말하기 위해 우리 집으로 온 날 밤 그런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장남인 아빠는 그러면 할머니를 인천으로 데려올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렸고 어른들의 그 대화를 들으며 나는 할머니와 살면 내 방은 어떻게 되는 건가, 그런 셈을 굴리고 있었다. 어려서 인천으로 올라와, 나는 명절에만 할머니를 만났다. 아랫목에서 늘 앓고 계셨으므로 당연히 활기차고 밝은 모습은 아니었다.
밤새 이야기를 나눈 어른들을 뒤로하고 다음 날 학교에 간 나는 할머니의 부고를 듣고 오전에 조퇴했다. 그리고 가족들 각자의 이기적인 셈법이 할머니를 죽음으로 몬 것 아닌가 하는 자책과 공포를 떨치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다.
주소를 들고 어렸을 때의 기억을 바탕으로 동네를 뱅글뱅글 돌면서 나는 그 집이 남아 있을지, 남아 있다면 어떤 기분일지 사라졌다면 또 어떨지 상상했다. 잔존하기를 원하는지 소멸했기를 원하는지도. 그러다 그 집이 있었으리라 생각되는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나는 놀랐는데, 교회가 들어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약간 뒷걸음질 쳤다.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은 죄의 환기도, 공포와의 대면도 아닌 말로 형용되지 않는, ‘어떤 것’이었다.
지금은 하느님께서 기다리고 계셨다고 말할 수 있다. 공포와 자책을 지우고 용서와 사랑에 대해 알려 주고 싶어 하셨다고. 하지만 그때의 나는 당장은 해석이 안 되는 어떤 우연에 압도되어 마냥 울면서 이번에는 찜질방이 아닌 급하게 잡은 바닷가 근처 숙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파도가 밀려오는 꿈을 꿨다. 이상하게 파도는 먼 곳에서부터 밀려오지 않고 해변에서 먼 곳으로 밀려 나갔다. 거꾸로 거꾸로 흐르면서 스스로 깊어졌다.
“하느님께서 부르고 계셨군요!”
지금까지 나는 세 권의 장편소설을 썼다. 《경애의 마음》(2018), 《복자에게》(2020)는 가톨릭 신자가 되기 전에 썼고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견진성사까지 받은 올해 출간했다. 하지만 앞의 두 소설에도 그리스도인과 성경 말씀이 등장한다. 어떤 독자는 이미 내가 신자인 줄 알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역시 내 의문이었다.
수녀님과 연락처를 주고받고 며칠 지나 성당에서 차 한 잔을 함께했다. 소설에 나타나는 그리스도교 색채에 대해 말하자 수녀님은 “하느님께서 부르고 계셨군요!” 하며 웃으셨다. 그 말이 하나도 어색하게 들리지 않았고 나는 벌어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수녀님은 예비 신자 교리는 겨울에야 시작하지만, 미사에는 참여해도 된다고 말했다. 영성체 시간에는 두 팔로 십자가 모양을 하고 신부님 안수를 받으라고.
예비 신자 교리 과정이 궁금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도 어느 블로거가 올려놓은 정보를 열심히 참고했으니까. 그 블로거는 세례를 받고 나서는 더 이상 블로그를 운영하지 않았는데도 세례 과정에 대한 게시물은 남겨 두었다. “검색어로 방문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이건 지우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나처럼 실행은 못하지만 마음만은 성당을 향해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일단 마음을 가늠해 보아야 한다. 하느님을 믿는가, 종교로서의 가톨릭에 뜻이 있는가 하는 복잡한 마음 말고 ‘원하는가’라는 간단한 마음. 비유하자면 우연히 발견한 하늘의 풍선을 한번 따라가 보고 싶은 마음, 단풍으로 물든 나무들을 보고 있으면 세계의 조화가 실감 나면서 그 질서가 궁금해지는 마음, 허공에 손가락으로 나만 알 수 있는 어떤 글자를 자꾸만 적어 보는 마음. 말로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그 마음이 오히려 믿음에 대한 지향을 잘 나타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일단 마음이 향한다면 거주지와 가까운 성당을 찾아보면 된다. 그리고 성당 사무실에 전화해 예비 신자 교리가 언제 열리는지 문의한다. 예비 신자 교리는 세례를 받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수업이다. 하지만 나처럼 전화 포비아가 있는 사람이라면 전화를 걸기보다는 차라리 종교 생활의 시작을 포기하는 편을 선택할 것이다. 다행히 주거지의 본당이 홈페이지를 운영한다면 그곳 게시판을 통해 문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본당처럼 홈페이지가 무척 한적하고 청빈(?)하게 운영되고 있다면 용기를 내어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주일 11시에 열리는 ‘교중 미사’는 신자가 아니더라도 모두 참여할 수 있는 ‘열린’ 미사다. 나 역시 교중 미사에 참석했다가 프란치스코 형제 눈에 띄어 앞에서 말했듯 마리아 수녀님을 만나게 됐다. 하지만 내 이야기를 들은 신부님이나 대모님 모두 “그런 경우는 잘 없는데…….” 하며 신기해하셨다. 신자들은 교중 미사에 낯선 얼굴이 있다고 굳이 말을 건네지는 않는다. 프란치스코 형제가 내게 한 정확한 질문은 “왜 영성체를 하지 않아요?”였다. 헌금은 내고 영성체 때는 그냥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건 내가 깨알 같은 검색을 통해 세례받지 않은 사람은 영성체를 하면 안 된다는 사전 정보를 알고 갔기 때문이었다.
교회 전례의 핵심인 영성체는 사제를 통해 축성(祝聖)된 빵과 포도주를 받아 내 안에 하느님을 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힘을 얻고 어려움을 이기며 신과의 일치 속에 자기 영혼을 세상으로부터 보호한다. 이런 성체성사는 미사 전례의 클라이맥스로 신자가 된 내가 가장 기다리는 순간이다. 동전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얇고 흰 빵이 주는 힘. 가톨릭을 관통하는 가장 아름다운 신비.
미사 참여를 통해 마음을 확인했다면 나가기 전 사무실로 찾아가 예비 신자 교리가 언제 열리는지 물어보면 된다. 아마 전화번호를 남겨 두면 연락이 갈 것이다. 참고로 성당 사무실 직원분들이 ‘다소’ 친절하지 않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변명하자면 그건 불친절하거나 배척하는 태도는 아니다. 서비스 직종 종사자들이 내보이는 정형화된 친절이 필요 없는 곳이라 으레 데면데면하고 노인분들을 많이 상대하다 보니 대체로 말이 정확하고 짧다.
각자의 ‘허들’을 넘는 ‘유예의 시간’을 선물하고 싶으신 건지도
내가 성당에 찾아갔을 때는 예비 신자 교리가 12월로 예정되어 있었다. 6월쯤 찾아갔으니 거의 반년을 기다려야 하는 셈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릴 수 없다면 매달 첫 주일에 예비 신자 교리를 시작하는 명동 성당을 찾아가면 되고, 혹시 거리 때문에 어렵다면 통신 교리나 인터넷 교리를 이수할 수도 있다. 예비 신자 교리는 일반적으로 6개월 정도 진행된다. 물론 6개월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아직 세례도 받지 않은 그 시절의 나조차 “가톨릭은 일단 들어가기가 어렵네. 교세 확장을 위해 좀 단축해야 하는 거 아냐?” 하고 집사람(나는 남편을 ‘집에서 만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글을 쓸 때 이렇게 지칭한다) 앞에서 나름의 의견을 피력했으니까. 최근 취미로 시작한 마작 교실(도박이 아니라 정말 건전하게 진행된다)에는 “하나라도 더 꼬셔서 마작 멤버 확보하자.” 하는 다짐이 표어로 걸려 있는데, 하물며 대중 종교가 이토록 문턱이 높다니.
그런데 이런 내 생각을 따끔히 짚는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 날 성당에 주교님이 오셔서 “요즘 예비 신자 교리 기간이 너무 짧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날 주교님이 낭독하신 노천명의 시 <사슴>보다, 정작 강론 내용보다 내게는 이 말이 더 뇌리에 남았다. 일본에서는 2년, 심지어 어느 나라는 7년이 걸린다며 더 이상 내가 교세 확장 운운할 수 없게 만드셨다. 주교님이 지금도 너무 짧다고 하시는데 내가 뭐라고 말하랴.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실 하느님께서 그 정도는 호수와 그물 사이를 노닐다 들어오라고 하시는 데는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몇 개월, 몇 년 하는 인간의 시간 단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야트막하든, 사람에 따라 벽처럼 높게 느껴지든, 각자의 ‘허들’을 넘는 ‘유예의 시간’을 선물하고 싶으신 건지도 모른다.
최근 은사님과의 대화 중에 ‘유猶’와 ‘예豫’가 조심스럽고 자꾸 뒤돌아보는 동물을 뜻하는 한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자 그건 반성하고 의문을 갖는 동물의 특성, 다름 아닌 인간의 특징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러니 유예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했다. 예비 신자 교리를 기다리는 동안 영국을 잠깐 다녀왔을 때를 빼고는 미사를 빠지지 않았다. 누가 출석 체크를 하는 것도 아닌데 주일마다 앉아 있었고 영성체 대신 꼬박꼬박 안수를 받았다. 그 유예의 시간 동안 나는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종교의 세계로 다가갔다. 전례 절차도, 주님의 기도도, 당연히 성가도 전혀 몰랐지만, 사제 그리고 신자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하느님에 관한 단서들이었다. 나는 내 앞에 새 길이 열렸음을 느꼈고 걸어가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 길에서 마치 흰빛처럼 투명하고 정직하리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