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행복을 알려 주는 포기: 수도승들의 금욕 영성

신학 칼럼

진정한 행복을 알려 주는 포기: 수도승들의 금욕 영성

결핍을 선택하는 삶과 복음적 권고

2026. 0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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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우리 시대의 영성가들> 시리즈의 아티클로 '일상 안에서 하느님 발견하기: 로욜라의 이냐시오 영성'에서 이어집니다.

 


 

 

🙏 우리는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누릴수록 행복해질 것이라 믿으며 결핍과 부족함은 피해야 할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수도승들은 오히려 결핍의 자리를 선택해 왔다. 순명과 가난, 정결의 덕의 실천으로 구체화되는 수도승들의 금욕적 삶은 교회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가장 오랜 전통 중 하나이다.

이 글은 수도승들의 금욕 생활을 통해, 절제와 포기가 어떻게 진정한 자유와 행복으로 이어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지난 여름, 나는 몽골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한 동기 신부가 오래전부터 제안한 여행이었는데, 처음에는 바쁜 와중에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내기가 부담스러워 선뜻 결정하기가 어려웠지만, 결국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몽골에서 선교하고 있는 동기 신부에게 한 번 방문하겠다는 말을 지킬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고, 아름답다고 말로만 들었던 몽골 밤하늘의 별도 한 번쯤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을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곳이 바로 사막이었기 때문이었다. 결핍의 땅이자 버려진 땅. 온전히 혼자가 되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고독의 공간이며, 하느님 외에 기댈 것이 하나 없는 불모의 자리. 이러한 공간이 주는 어떤 종교적 분위기를 느껴 보고 싶었다.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사막은 언제나 하느님을 열렬히 원했던 사람들이 향했던 곳이었다. 사막에 무엇이 있길래 그곳에 갔을까? 그곳에는 결핍과 부족함이 있었다. 그들은 세상이 주는 풍요와 안락함을 포기하고, 결핍과 부족함을 찾아 떠났다. 아마도 결핍과 부족함 속에서 더 중요한 것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으로 나는 여정을 준비했다.

 

하느님의 모습은 결핍되고 부족한 상황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깊은 사막으로 들어가는 이 여행은 편안한 휴양지의 여행이나 모든 것이 갖추어진 도시의 여행과는 다른 고되고 불편한 여정이었다. 하지만 여유와 편안함이 부족했기 때문에, 작은 것에도 더욱 큰 기쁨과 감사를 드릴 수 있었다. 구름 한 조각이 태양을 가려줄 때, 광막한 사막에서 저 멀리 게르의 지붕이 보일 때, 낯선 손님에게 우유 한 모금을 내어 주는 작은 환대를 받았을 때, 하느님의 손길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순명과 가난, 정결의 덕으로 이루는 금욕의 삶

 

얼마 전 결핍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글 하나를 접했다.

 

물은 원래 맛이 없지만, 목마른 자에게는 달콤하다. 공기는 원래 향기가 없지만, 숨이 가쁜 자에게 향긋하다. 그래서 허기진 영혼이 삶의 맛을 만들고, 절실한 마음이 삶의 향기를 피운다. 삶의 진정한 맛을 느끼기 위해서는 먼저 굶주려야 하고, 삶의 향기를 맡기 위해서는 먼저 메말라야 한다.

 

이 글은 결핍이 행복을 감지할 수 있는 내면의 감각을 회복시켜 주고, 본질적인 삶의 의미를 찾게 해준다는 통찰을 나눠주고 있다. 사실 현대인들은 부유하고 넘치는 삶에서 오히려 영적으로 빈곤함을 경험한다. 이 글은 결핍되고 부족한 생활을 통해 삶에 정말 중요한 것을 깨닫고, 진정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초대 교회의 수도승들이 사막으로 간 이유도 이것이다. 결핍과 부족함 속에서 도리어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을 찾을 수 있었다. 배고프고, 목마를 때, 하느님께 대한 감각이 회복되고, 삶의 본질적 의미가 더욱 뚜렷해진다. 금욕의 삶은 사람을 단순하게 만들고, 더욱 하느님을 바라고 사랑하게 한다. 그렇게 수도승들의 금욕적 삶은 교회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가장 오랜 전통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 전통의 영성은 포기에 바탕을 둔 절제의 삶이다. 이러한 삶은 복음적 권고, 곧 순명, 가난, 정결의 덕의 실천으로 구체화된다. 수도자들은 이 세 가지 덕을 바탕으로 완덕을 향한 삶을 살아간다. 이 세 가지 덕은 모두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며 결핍의 상태를 선택하는 것이다. 순명은 자신의 의지와 뜻에 대한 포기이고, 가난은 자기가 소유한 모든 것에 대한 포기이며, 정결은 육체적 욕망과 성적 쾌락에 대한 포기이다.

 

우리를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는 세상의 것들을 포기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이런 변명을 할지도 모른다.

 

이 좋은 것들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지 않는가?

예수님께서도 먹고 마시고 즐기지 않았는가?

주님 안에서라면 모든 것이 허용되지 않는가?

 

하지만 자신을 속이지 않고 성찰해 보면, 세상 것들은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세상의 것들은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이용하여 자신에게 더 강력하게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경계하셨던 재물을 생각해 보자. 재물은 우리의 기본적인 삶에 필수적이기도 하고, 그 재물을 이용해서 이웃을 도울 수도 있다. 하지만 재물의 끝없는 욕망은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결국 재물의 노예가 되게 한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유용하면서도 가장 골칫거리가 된 스마트폰은 어떠한가? 스마트폰은 우리 영적 생활에 매우 유용할 수 있다. 스마트폰으로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이웃과 더 깊이 연결되고 멀리 떨어진 이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절제와 포기 없이 사용한다면, 스마트폰이 주는 세속적 즐거움의 노예가 되기 쉽다.

 

현대 사회는 자기 뜻을 더 많이 이루고, 더 많이 소유하며, 더 많이 즐길수록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이 아닌 것 같다. 현대인은 과거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졌지만, 오히려 과거의 사람들보다 더 우울하고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 개인들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자기 의지를 실현하고, 더 많이 즐기려는 욕심에 사로잡혀 정말로 행복하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 이러한 문화에 맞서기 위해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건 결핍과 부족함의 진가를 알고 그 속으로 뛰어든 수도승들의 지혜가 아닐까? 더 큰 성취와 더 많은 소유와 더 강한 즐거움을 강요하는 이 시대에 역설적이게도 우리에게 필요한 영성은 절제와 포기가 아닐까? 부족한 것은 부족하게 두고, 결핍된 상태를 받아들일 때, 진정한 행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것들에 시선을 고정할 수 있다.

 

몽골의 사막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사막에 누워 반짝이는 별들과 은하를 보며 경이로운 사막의 밤하늘에 경탄하고 있었다. 옆에서 함께 밤하늘을 감상하던 동기 신부가 불쑥 자신의 묵상을 나누어 주었다.

 

저 별들이 서울 하늘에도 분명히 있을 텐데, 서울에서 보지 못했어. 거리의 네온사인, 건물의 빛, 가로등 같은 도시의 불빛이 별보다 더 밝기 때문이야. 하느님을 보는 것도 비슷하지. 하느님께서 어디 계시냐고 투정하지만,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곁에 계셔. 단지 욕심, 욕망, 쾌락의 불빛들이 너무 밝아 하느님을 보지 못할 뿐이지. 그 불빛을 거두었을 때, 비로소 하느님을 뵐 수 있지 않을까?”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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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서울대교구 사제.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일상의 모든 순간 안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하고자 노력하며, 그 깨달음을 통해 더 깊이 사랑하고 더 따뜻하게 섬기는 사제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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