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우리 시대의 영성가들> 시리즈의 아티클로 '진정한 행복을 알려 주는 포기: 수도승들의 금욕 영성'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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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관상 기도와 신비 체험을 특별한 소수의 영역으로 여기거나, 반대로 그것만을 신앙의 전부처럼 오해하기도 한다. 가리구 라그랑주는 이러한 극단을 넘어, 수덕과 신비가 분리된 두 길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된 여정임을 밝힌다. 이 글은 라그랑주의 관상 기도 신학을 통해, 하느님과의 신비적 일치가 모든 신자에게 열려 있는 성덕의 정상적인 길임을 살펴보고자 한다. |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하느님과 직접적인 만남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된다. 특히 관상 기도 속에서 의식의 깊은 상태로 들어가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보고, 그분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지 궁금해한다. 사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초월적 존재와의 만남을 열망하는 존재이기에, 이러한 신비적 종교 체험에 관심을 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실제로 이러한 체험 없이 인간은 만족할 수 없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우리는 하느님을 향하도록 지어졌기 때문에, 하느님 안에서 쉬기 전까지 평안하지 않다.”
― 《고백록》 1.1.1.
그런데 교회 안에서 ‘신비’에 대한 극단적인 태도를 지니는 두 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첫 번째 유형은 신비를 위험하다고 이해한다. 신비는 신앙생활의 본질이 아니라 생각하며, 하느님과의 신비적 일치를 멀리한다. 그들에게 완덕은 하느님과의 만남에 있지 않고, 의지적인 덕행과 실천에만 달려 있다. 성사와 기도를 충실히 바치고, 꾸준한 선행으로 공덕을 쌓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신비의 길은 잘못된 오류로 빠질 숨은 위험이 많다고 경계한다.
두 번째 유형은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신비 체험의 중요성을 과도하게 강조한 나머지, 다른 인간적 방식의 신앙 활동을 거부하고 오직 관상 기도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신비적 만남이란 그분께서 신적인 방식을 통해 무상으로 주시는 것이기에 인간의 노력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영성 생활에 대한 균형 잡힌 올바른 이해
이러한 두 가지 왜곡된 이해를 극복하기 위해서 영성 생활에 대한 균형 잡힌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사실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신비’에 대한 개념은 그리스도교 영성사 안에서 일찍부터 있어 왔다. 4~5세기의 위 디오니시우스의 《신비신학》이나, 이집트의 사막 교부들, 동방 교회의 헤시카스트들, 14세기 라인강 주변과 플랑드르, 영국의 많은 신비주의자들, 16세기 스페인의 가르멜 수도자들은 관상 기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만남을 체험했으며, 그들의 가르침은 교회 안에서 전해졌다.
영성 생활에서 신비 생활이 분리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이다. 17세기 신비주의적 이단인 정적주의와의 논쟁 이후, 교회 안에서 신비주의에 대한 언급이 금기시되었다. 교회는 잘못된 신비에 대한 과도한 관심을 경계하며, 인간 편에서 능동적이고 의지적으로 수행하는 수덕 생활을 강조했다. 곧 완덕은 비범한 신비 체험이 아니라, 정기적인 성사의 참여와 끊임없는 기도와 애덕 실천, 꾸준한 덕의 함양이 본질이라고 가르쳤다. 신비 생활과 관련된 관상 기도는 기적, 현시, 사적 계시와 같은 예외적이고 비상한 현상으로서, 숨은 위험이 많기에 원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특히 18세기에 예수회 신학자 조반니 바티스타 스카라멜리는 《신비 지침서》와 《수덕 지침서》를 저술하며 이 두 생활을 명확하게 분리하였다. 그는 대부분의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에게 능동적으로 덕행을 실천하는 수덕 생활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며, 신비 생활은 소수의 사람만 부르심을 받은 길로 보았다. 20세기 초까지 영성 생활에 두 가지 길이 있다는 가르침은 교회 안에서 주류를 이루었고, ‘위험한’ 요소가 다분한 신비는 언급하기 꺼려졌다. 이러한 이유로 17세기 이후 거의 300년 동안 교회 안에서 ‘신비’는 거의 사라졌다.
영성과 신비의 조화를 추구한 라그랑주
교회의 안에서 신비가 사라진 상황에서 영성 생활 안 ‘신비’의 올바른 자리를 다시 찾아 준 인물이 바로 도미니코회 신학자인 가리구 라그랑주였다. 그는 수덕과 신비라는 두 가지 길의 종합을 이뤄 내며, 올바르고 건전한 신비의 길을 제시한다. 가리구 라그랑주는 도미니코 수도회 신학자답게, 자신이 정통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으로 신비 신학의 위대한 스승인 가르멜의 두 성인, 곧 십자가의 성 요한과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을 설명하였다. 신비 생활을 표현하고 가르치기 위해 문학적 양식을 취했던 십자가의 성 요한이나, 신비 상태에 들어선 영혼의 내적 현상을 섬세하게 묘사한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달리, 그는 두 성인의 가르침을 토마스의 신학으로 체계화하고 조직하며 신비 생활의 본질을 밝힌 것이다.
특히 자신의 저서 《그리스도교 완덕과 관상》(1923)에서 영성 생활을 둘로 나누는 전통적인 가르침을 강하게 공격하며 신비 생활과 수덕 생활이 두 개의 길이 아니라 하나의 여정임을 증명했다. 수덕 생활과 신비 생활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길로 수덕 생활은 신비 생활을 준비하고, 신비 생활 수덕 생활의 열매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비적 관상 기도는 성덕을 향한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길이며,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충만한 완성을 위해 윤리적으로도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처음에는 관상이 잠정적으로 작용하겠지만, 성령의 활동에 순응하며 자신을 내면으로 거둬들인다면, 그의 신앙은 점점 더 관상적이 될 것이다. 결국 가리구 라그랑주는 천국에서 보게 될 것을 미리 맛보는 정상적인 전주곡으로서의 관상이 모든 신자에게 열려 있다는 – 물론 모든 이가 도달하지 못하지만 – 결론을 내린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관상과 신비 생활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례를 받고 은총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이에게 신비 생활로 나아가는 길을 안배하셨다.
갈림길이 아닌 하나의 길에서 보이는 것
신비 생활을 영성 생활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수덕 생활과 신비 생활이 하나로 이어진 연속된 길로 이해할 때, 우리는 두 가지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첫째는 신비 생활을 너무 빨리 시작하려고 서두르는 정적주의적 오류이다. 이는 묵상 기도, 성사 생활, 꾸준한 기도, 덕행, 금욕 등 수덕 생활을 건너뛰고, 처음부터 신비 체험을 하도록 이끄는 특별한 은사만 기다린다. 두 번째는 주님께서 신비 생활로 부르시는 초대에 너무 늦게까지 응답하지 않으면서 인간적 방식을 놓지 않는 펠라지우스적 오류이다. 하느님께서 신비 체험을 허락하시는 순간조차도 이를 거부하며, 인간의 능동적 활동과 의지에 구원이 달려 있는 것처럼 여긴다. 마지막에는 구원이 주님께서 주시는 무상의 선물임을 간과한다.
관상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은, 이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보게 하시는 특별한 선물이다. 관상 속 신비 체험은, 제자들이 다가올 고통과 고난을 잘 이겨 내며 끝까지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부활의 영광을 미리 보여 주신 타보르산의 체험과도 같다. 우리 또한 삶에서 맞이할 시련 앞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끝까지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주님께서는 이 지상에서 영원한 행복을 잠시나마 맛볼 수 있는 선물을 베푸신다. 교회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이 하느님의 선물을 가리구 라그랑주가 우리에게 다시 찾아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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