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철학 스케치> 시리즈의 아티클로, 이 글은 ‘보편적인 것은 실재하는가?’에서 이어집니다.
|
✔ 복습 | 일상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선함’이라는 보편?
“이 세상에 모든 붉은 사물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붉음 자체는 여전히 존재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개별자는 분명 실재하지만, 그 본질인 보편자 또한 실재하는가라는 질문은 중세의 ‘보편 논쟁’을 낳았습니다. 이 논쟁은 보편의 실재를 인정하는 실재론과, 보편을 이름에 불과하다고 보는 유명론의 대립으로 이어졌으며, 단순한 개념 논의를 넘어 인간 본성과 윤리, 존엄성의 근거와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보편이 실재함을 분명히 고백합니다. 우리가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이유는 ‘좋음’이라는 보편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며, 그 궁극적 근원은 하느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는 오래된 철학적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인간 존재가 완전무결한 신 존재를 과연 제대로 알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은 항상 남기 때문입니다. 짧은 인간의 지식으로 영원한 신적 지혜를 파악한다는 것이 정말 가능한 일이냐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신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부분적으로는’ 파악할 수 있다.”라고는 말할 수 있겠지요.
인간이 아무리 신에 대해 잘 안다고 하더라도, 신은 인간보다 우위에 있는 존재이므로 신에 대한 인간의 앎은 불완전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인간은 자신보다 하위에 있는 개나 고양이에 대해서는, 신을 아는 것보다야 완전한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의 앎만을 추구해야 한다면,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대로, 우리는 아마 “완전한 것(곧 신 존재)에 대한 불완전한 지식”이나 “불완전한 것(곧 피조물)에 대한 완전한 지식”이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앎이 완전하든 불완전하든, 정말 인간의 이성으로 신을 알 수 있기는 한 걸까요? 만약 알 수 있다면, 인간은 신에 대해 어느 정도를, 어떻게, 어디까지 알 수 있는 걸까요?
부정신학과 유비적인 앎
토마스 아퀴나스는 우리가 신의 본질이나 본성에 대해 ‘일의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일의적univocal’이란, 어떤 것이 다른 맥락에서도 동일한 하나의 의미로 사용된다는 뜻입니다. 이를테면, 고양이는 애완동물 가게에서도, 동물 병원에서도 동일한 한 가지 의미로 파악됩니다. 그런데 더 깊은 차원의 하느님 사랑에 대해서는, 인간이 아는 ‘사랑’의 개념을 하느님 사랑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다시 말해 신은, “신은 무엇이다.”라고 정의한 후, 그 동일한 하나의 지식으로, 일의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인간은 “신이 무엇이 아닌지”에 대한 것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이는 위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 Areopagita, 5세기 말-6세기 초)가 말한 ‘부정신학theologia negativa’의 길입니다. 무한한 하느님에 대해서 유한하고 불완전한 언어로 진술하거나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차라리 ‘하느님은 무엇이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하느님을 조금씩 더 알아 간다는 겁니다. 하느님은 무엇이라고 하나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무엇이 아니라고는 더 많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또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앎이 아무리 많아져도 하느님에 관해 전부 아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인간은 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일의적인 지식이 아니라, 또 신이 무엇이 아닌지를 통해 알게 되는 지식이 아니라, 신이 ‘무엇과 같은지’, 아니면 신과 ‘닮은 것’에 대한 지식만을 가집니다. 이것을 ‘유비적analogical’인 앎이라고 합니다.
‘유비’는 원래 비례 관계를 뜻합니다. 카메라의 렌즈는 인간의 눈과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유사한 관계를 ‘유비’라고 하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유비를 ‘하나와 관련된 진술’이라고 정의합니다. 예를 들어, 건강은 일차적으로 신체의 상태를 의미하지만, 건강한 음식, 건강한 독서와 같이, 본래의 의미와 연관된 의미로도 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유비’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에 관한 진술이 바로 이런 식의 유비에 해당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만약 우리가 신에 대한 긍정적인 지식을 원한다면, 유비적인 지식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가령, 신은 나쁜 양치기보다는 좋은 양치기와 더 닮았고, 양보다는 양치기와 더 닮았지만, 양도 양치기도 둘 다 아니며, 나쁜 양치기나 좋은 양치기는 더더욱 아니지요. 하느님을 좋은 양치기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유비적’으로 말할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의 존재와 속성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에, 특히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느님과 모든 피조물은 유사성을 띠고, 그래서 피조물에게 쓰는 경험적 표현들을 하느님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요컨대, 인간은 신에 대해 ‘유비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다의적equivocal’ 의미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의적 의미는 어떤 단어가 여러 맥락에서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배’는 같은 단어지만 선박, 과일, 신체 부위를 나타낼 수 있지요. 이처럼 만약 신과 피조물이 같은 표현을 쓴다고 할 때, 아무리 표현이 같아도 나타내는 의미는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신과 피조물 사이에는 절대적인 차별성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하느님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는 같은 ‘용서’라는 말을 써도 각각 다른 차원의 용서를 의미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유비 이론으로, 일의성과 다의성이라는 두 극단을 피하면서 신을 인식하는 적절한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만약 신앙과 종교의 언어가 ‘일의적’이기만 하다면, 모든 피조물과 신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인간이 파악한 신에 대한 지식과 피조물에 대한 지식이 같아지는 겁니다. 즉, 피조물이 신과 같은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는 것이지요. 이는 신을 모든 것에 너무 가깝게 만드는 범신론으로 치달을 위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다의적’인 것만 주장한다면, 우리의 지식과 언어로는 신을 설명할 수 없게 됩니다. 신에 대한 지식과 피조물에 대한 지식이 모두 다른 것을 의미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이는 결국 인간은 신을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에 빠지게 되거나, 신과의 어떤 관계도 부정함으로써, 신을 너무 멀게 만들어서 종교를 유신론적 철학으로 축소시켜 버립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비 이론은 원인과 결과의 측면에서 서로 닮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신의 선함은 피조물의 선함이 존재하기 전부터 미리 있었던 것으로, 피조물의 선함의 기원이 되는 선함으로서, 유사하게 닮았다는 겁니다. 그리하여 모든 피조물 안에서 우리는 신의 본성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은 신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유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 함께 보면 좋은 아티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