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철학 스케치> 시리즈의 아티클로, 이 글은 ‘인간의 이성으로 신을 알 수 있는가?’에서 이어집니다.
|
✔ 복습 | ‘유비적’인 앎이란?
“신의 선함은 피조물의 선함이 존재하기 전부터 미리 있었다. 신의 선함은 피조물의 선함의 기원이 되는 선함으로서 유사하게 닮았다.”
인간은 신에 대해 ‘일의적’인 지식을 갖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은 동일한 하나의 지식으로, 일의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과 닮은 우리 인간은 ‘신이 무엇이 아닌지’에 대해서 알 수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신이 ‘무엇과 같은지’, ‘무엇과 닮았는지’에 대한 지식만을 가집니다. 이를 ‘유비적’ 앎이라고 합니다. |
인간은 많이 알기 때문에 더 사랑하게 될까요, 사랑하기 때문에 더 많이 알게 될까요?
이 문제의 인과관계를 굳이 따져보라고 한다면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망설이게 됩니다. 아는 것은 인간의 지성 또는 이성의 영역에 속하지만,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 또는 자유 선택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한 인간 영혼의 서로 다른 두 영역이라서 단순히 시간적 선후 관계로 규정 짓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쨌든 인간 고유의 능력인 지성과 자유의지 문제는 철학적 인간학의 역사에서 아주 오래된 주제 중 하나입니다.
동물들은 지능을 가지고 있지만, 추상할 수 있는 이성적 지능, 곧 지성은 없습니다. 동물들은 욕구와 본능에 의해서 고집을 부릴 수가 있지만, 그들은 인간처럼 자유로운 의지로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동물들은 생존을 위해 먹잇감을 찾아다니며 배를 채우지만, 인간처럼 의지적으로 단식할 수는 없지요.
동물들의 지능은 사물을 구별하거나 자연적 조건을 이해하고 습성을 파악할 수는 있지만, 이론적이거나 윤리적인 보편 개념을 이해하는 수준에까지는 이르지 못합니다. 이를테면, 동물은 인간이 가진 ‘양심’을 알지 못합니다. 즉, 동물은 양심에 따라 판단하거나 실천하지 못합니다. 또한 동물은 자유롭고 책임 있는 선택을 하거나, 죄를 짓고 회심하여 성화(聖化)될 능력도 없습니다. 동물의 지능에 대해서는 ‘훈련’을 시킨다고 하지, 이성적으로 ‘교육’시킨다고 말하지는 않는 이유입니다. 인간만이 지성과 자유의지라는 두 가지 고유한 능력을 갖습니다.
그렇다면, 추상할 수 있는 이성적 지성과 도덕적 자유의지 중 어느 것이 우선할까요?
이 질문은 어느 것이 시간적으로 우선하며, 어느 것이 다른 것의 원인이 되는지에 대한 물음인 동시에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지성과 자유의지에 관해서는 딜레마에 빠져 있는 듯합니다. 만약 지성이 우선한다고 하면, 우리는 이데아와 앎을 중시했던 플라톤처럼 지성주의자가 되어, 모든 도덕적 악은 지성적 무지에 의해 발생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악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한 책임이 아니라 완전한 선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원죄로 인해 손상된 인간 지성이 보편적인 인식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의 조명을 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같은 맥락입니다.
그런데 지성이 우선한다고 하면 의지의 자유가 박탈당할 위험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내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의지는 내가 ‘알고 모르고’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이는 지성이 의지에게 명령하는 셈이 되어, 의지가 지성에 의해 결정되고 맙니다.
반면에, 의지가 지성보다 우선한다고 하면, 우리는 의지론자가 되어, 지성이 무엇을 생각할지 말지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의지가 지성에게 생각할 권한을 부여하고 명령하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인간은 “내가 지성으로 생각하고 파악해야지!”라고 의지적인 선택을 할 때야 비로소 지성이 작동한다고 보는 겁니다.
지성을 우위에 둔 사상을 ‘주지주의intellectualism’라고 하고, 의지를 우위에 둔 사상을 ‘주의주의voluntarism’라고 합니다. 중세 스콜라 전통에서는 지성을 의지보다 우위에 두었습니다. 즉, 지성이 최고의 선을 인식하면 의지가 그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실천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던 것이지요.
하지만 지성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면서도 지성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의지를 지성보다 더 완전하다고 본 사람은 둔스 스코투스(Johannes Duns Scotus, 1266?-1308)입니다. 그가 말하는 지성의 한계란, 지성은 결국 눈앞에 보이는 대상이 있어야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대상에 매여있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지성이 자신과 관계하는 대상에 종속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지성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의지는 지성보다 자유롭기 때문에 지성보다 더 완전하며, 의지가 지성의 활동을 규정한다고 보았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주지주의(또는 지성주의)와 주의주의(또는 의지주의)는 인간과 신의 관계를 규명할 때 매우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주지주의는 인간의 지성이 신의 완전한 뜻을 반드시 ‘알아야만’ 합니다. 그것을 알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신의 섭리는 필연적이라는 것을 파악하게 됩니다. 하지만 지성이 파악한 그 필연적 신의 섭리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는 불필요하게 됩니다. 어차피 지성이 파악한 섭리대로 세상이 돌아갈 테니까요. 반면에, 주의주의는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자의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진리의 절대성을 상실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딜레마를 극복할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신에게는 지성과 의지가 간극 없이 동일하다고 보는 겁니다. 이를테면, 선에 대한 신의 앎은 곧 선을 향한 그의 의지이고, 신의 의지는 곧 그의 앎입니다. 오히려 지성과 의지의 구별은 인간에게 있습니다. 인간의 의지는 이성에 반하여 행동할 수 있고, 우리의 이성은 의지에 반하여 생각할 수 있다는 겁니다. 지성과 의지 중에 무엇이 더 우선하며 인과적인지는 단정할 수 없어도,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인과적으로, 시간적으로, 그리고 가치적으로도 앞설 수 있습니다. 지성과 의지는 어느 하나를 우위에 두고, 우선순위를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남성이 여성을 필요로 하고, 여성은 남성을 필요로 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주지주의자로 보는 측면도 있지만, 사실 위의 해결책은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그는 둘의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한 인물입니다. 그는 인간이 신에 대해서는 의지나 사랑이 앞서며, 인간이 세상에 대해서는 지성이나 앎이 앞선다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하느님을 의지적으로 사랑하여 그분을 더 닮게 되고, 세상에 대해서는 지성으로 잘 파악하여 세상을 잘 돌보고 다스릴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보다 우위에 있는 존재에 대해서는 더 사랑하고, 우리보다 하위에 있는 존재에 대해서는 더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쨌든 중요한 건,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지성과 의지 모두 부여하셨다는 것입니다.
🔍 함께 보면 좋은 아티클
- [이종원 바오로 신부] 교회가 이야기하는 노동과 존엄의 올바른 가치
- [최지영 프란치스카 수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는 삶
- [김윤우 안젤라 메리치] 사랑의 증인,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성인
- [문재상 안드레아 신부] 내어 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