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인 것은 실재하는가?

철학 탐구

보편적인 것은 실재하는가?

‘좋음’을 추구하는 신앙인의 삶에 실재하는 것

2026. 0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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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교 철학 스케치> 시리즈의 아티클로, 이 글은 신앙과 이성은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에서 이어집니다.

 


 

✔ 복습 | 신앙과 이성의 관계는?

 

믿기 위하여 이해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

 

신앙과 이성은 협력적인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이성으로 아는 진리와 신앙으로 아는 진리는 모두 궁극적인 진리에 속하기에, 서로 모순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은 모두 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므로 신앙과 이성을 서로 밀어내지 않고 통합시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실재實在한다고 말합니다. 저기 있는 무엇을 눈으로 볼 수 있고 직접 손으로 가리킬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어떤 대상이 저기에 있다라는 뜻입니다.

 

정원에 피어 있는 저 붉은 장미는 실재하는 꽃입니다. 시장에서 파는 붉은 사과도 실재하는 과일이지요. 장미나 사과 말고도 실재하는 붉은색 사물들은 많습니다. 이때 각각 장미나 사과처럼 다수의 붉은색 사물을 개별자라고 합니다. 반면에 그것들의 공통된 하나의 성질과 속성 또는 본질이나 본성, 예를 들어 붉은 장미의 경우, 붉음 자체를 보편자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붉음 자체(보편)는 하나이지만 붉은색 사물(개별)은 여럿입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각 개별자이지만 모두 인간이라는 하나의 보편성을 갖는 것이지요.

 

그런데 궁금증이 생깁니다. 붉은색 사물들은 세상 어디에서든 찾을 수 있지만 붉은색 사물들의 본질인 붉음 자체도 과연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이를테면, 동물인 사자, 호랑이, 코끼리는 동물원에서 찾아볼 수 있겠지만, 그것들의 본성인 동물성()’은 어디에 가야 찾을 수 있는가요? 즉 붉은색 장미는 손에 쥘 수 있지만, 붉음 자체는 손에 쥘 수 없습니다. 개별자로서 장미는 실재하는 것이 확실하지만, 보편자로서 붉음은 실재하는 것인지는 분명하게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결과적으로 보편자는 정말 실재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개별자는 눈에 보이고 경험되기에 실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본성이나 본질을 가리키는 보편자는 정말로 실재하는 것일까요?

 

이렇게 보편이 실제로 존재하는가와 보편과 개별에 대한 우위 여부를 두고 벌어진 철학적 논쟁을 보편논쟁controversy of universal이라고 합니다. 특히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 격렬하게 벌어진 이 보편논쟁은 그리스도교 신학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수많은 종교적, 학문적, 정치적 논박을 발생시켰습니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계시 진리, 특히 삼위일체 교리에 담긴 보편적 개념들은 모두 신비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실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학은 진정한 의미에서 학문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교가 받은 혐의는 이와 같습니다. 이 논쟁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쪽은, 보편이 현실에서도 존재하며 오히려 개별적인 것들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다른 한쪽은, 보편 개념은 그저 만들어 낸 말에 불과할 뿐이며 현실에서 존재하는 것은 오직 개별의 것들 뿐이라는 입장이었지요. 전자를 실재론realism후자를 유명론nominalism이라 부릅니다.

 

실재론자들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그 논리적 근거를 찾습니다. 이데아의 형상에서 이 세계를 이루는 개별적인 것들이 생겨난 것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실재론을 주장했던 대표적인 학자로는 보에티우스(Anicius Manlius Boethius, 480-524?), 에리우게나(Johannes Scotus Eriugena, 810-877), 캔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us Cantuariensis, 1033-1109)가 있습니다. 반대로 유명론자들은 이 세상에 실재하는 개별 사물이 갖는 의미와 언명이 바로 보편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그 근거를 찾습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로스켈리누스(Roscellinus, 1050-1125?)와 윌리엄 오컴(William of Ockham, 1285?-1349?)이 있지요. 한편 아벨라르두스(Pierre Abélard, 1079-1142)는 이 두 이론을 종합하여 높은 차원에서 조화를 시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를 간략하게 정리해 볼까요?

 

플라톤은 보편자가 그 자체로 객관적인 실재로 존재하며, 개별 사물들과 별개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우주에 있던 모든 붉은 사물들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붉음 자체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라는 뜻이지요. 이러한 입장은 극단적 실재론 또는 극단적 형이상학적 실재론이라고 불립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형상(이데아)를 지상으로 가져와서 실체, 곧 구체적인 개별 사물들의 형태로 만들었습니다. 다시 말해, 사물의 본성이자 형상적 이데아는 그 사물들 안에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만일 우주의 모든 붉은 사물들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붉음이라는 보편성은 객관적인 현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이는 보편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하기 때문에 실재론이지만, 보편이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에서만 실재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온건한 실재론이라고 부릅니다.

 

이에 비해 아벨라르두스 같은 학자는 보편은 실재가 아닌 개념일 뿐이고, 보편은 개별 사물 간의 실제적 닮음 또는 유사성에 기반한다고 말하면서 종합하고자 하였습니다.

 

눈여겨볼 것은 유명론입니다. 윌리엄 오컴으로 대표되는 유명론은, 보편자는 실재도 아니고 명확한 개념도 아니며, 그저 개념과 이름을 혼동한 것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보편은 정신의 바깥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 속에 있는 이름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는 실재하는 붉은 것에 붉음이나 장미와 같은 막연하고 포괄적인 이름을 명명하여 사용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신앙의 보편적 진리를 증명하거나 이성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여, 아는 것믿는 것을 별개라고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보편논쟁이 가톨릭 교회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유는 보편의 실재 여부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결과의 차이가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 존재와 인간의 본성을 예로 들어 말해 볼까요? 만약 객관적인 현실 세계에 인간 본성과 같은 보편성이 없다면, ‘자연법과 같은 윤리 정신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인간 본성이 실재가 아니라면, 우리는 인간 존엄성에서 벗어나는 비윤리적인 현실(실재)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됩니다. 만약 보편적 본성과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모든 인간이 본질적으로 평등하고 동등한 인격체라고도 말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 평등에 위배되는 어떠한 행위(그것이 범죄 행위라도)에도 무어라 말할 수 없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 잘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 존재하는 선한 행위는 선함이라는 보편 그 자체가 있기 때문에 선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신앙인이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건 좋음이라는 보편자가 우리 삶에 실재하기 때문이고, 우리는 삶에서 그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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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의정부교구 사제. 현재 가톨릭대학교 대신학교에서 지성양성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철학과 신학의 두 날개로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이루는 삶을 추구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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