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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숙하게 바치는 주님의 기도에는 우리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부터 ‘악에서 구하소서.’까지, 양식과 용서, 유혹에 대한 청원을 통해 주님의 기도를 새롭게 만나 봅니다. |
지난 “주님의 기도③│‘아버지의 뜻’은 어디에서 이루어질까?”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는 청원을 통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순명의 길과 주님의 기도에 담긴 하느님 나라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주님의 기도 앞부분의 세 가지 청원은 모두 예수님께서 직접 이루신 일들을 정리한 기도로, 그분을 통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기를, 아버지의 나라가 오고 아버지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청한다. 이번 글에서는 ‘일용할 양식’부터 ‘악에서 구하소서.’까지, 주님의 기도 뒷부분에 담긴 우리 삶에 도움을 청하는 양식과 용서, 유혹의 깊은 의미를 살펴보자.
오늘도, 내일도 필요한 양식
주님의 기도 뒷부분의 첫 번째 청원은 ‘양식’, 곧 ‘빵’(ἄρτος)을 청하는 것이다. 그만큼 양식은 중요한 문제다. 그래서일까? 빵이라는 단어는 마태오 복음서에서 생활에 필요한 빵이라는 의미로 21회 등장한다. 그런데 기도 속 ‘주시고’(δός)로 사용된 동사인 ‘디도미’(δίδωμι)가 ‘빵’(ἄρτον)과 함께 사용된 경우는 모두 3회인데, 이는 모두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주시는 기적과 성찬례의 장면들과 연결된다(마태 14,19; 15,36; 26,26 참조). 여기서 우리는 양식이 단순히 먹는 빵을 넘어 성찬례를 통해 주어지는 예수님의 몸, 곧 영적인 양식도 함께 의미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일용할’이라는 한 단어가 품은 이야기
그런데 문제는 우리말로 ‘일용할’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형용사인 ‘에피우시오스’(ἐπιούσιος)다. 이 단어는 마태오 복음서에 단 1회 등장할 뿐 아니라 그리스 문학,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사용된 예가 없어 정확한 뜻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었는데, 여기서는 두 가지 의미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이 단어를 ‘에피’(위)+‘우시오스’(οὐσίος: 있다)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이 단어는 ‘위에 있다’, ‘넘어서다’, ‘초월해 있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실제 불가타 번역에서 예로니모 성인은 이를 ‘초본질적인 빵(panis supersubstantialis)’이라고 번역했고, 오리게네스도 우의적인 의미를 덧붙여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요한 6,41; 6,51; 6,58 참조)으로 이해했다.
두 번째로는 ‘에피’(ἐπι)를 ‘접촉’, ‘지지’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면 이 단어는 존재를 지탱하기 위한 것이라는 뜻을 지닌다. 오늘날 ‘일용할’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이 해석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이 단어가 ‘초월적’이라는 의미도 함께 지닐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받은 가장 큰 용서, 우리가 건네야 할 작은 용서
두 번째 청원인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에서 루카 복음서는 ‘죄’(ἁμαρτίας)라고 직접 표현하지만, 마태오 복음서는 ‘빚’을 의미하는 ‘오페이레마타’(ὀφειλήματα)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용서하시고’에 해당하는 단어로는 ‘빚을 탕감하다’라는 의미의 ‘아페스’(ἄφες)를 사용한다. 따라서 마태오 복음서의 청원을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저희에게 빚진 이의 빚을 우리가 탕감하오니, 우리 빚을 탕감해 주소서.’가 된다. 이 청원은 매정한 종의 비유(마태 18,23-35)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매정한 종의 비유에서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 이야기가 나온다. 임금이 셈을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종 하나가 끌려 나온다.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자, 주인은 갑자기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준다. 그런데 그 종은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나자,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버린다. 이 소식을 들은 동료들이 안타까워하며 주인에게 알리자, 주인은 이렇게 말한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2-33)
그러면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모두 갚게 하고,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기도에 담긴 본래의 배경을 확인하게 된다. 먼저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서 만 탈렌트에 달하는 빚을 탕감해 주셨다. 1탈렌트가 6,000데나리온이고, 1데나리온은 숙련공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다. 이를 하루 20여만 원으로 계산하면 만 탈렌트는 약 12조 원에 해당한다. 우리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그런 액수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어 이런 큰 빚을 탕감해 주셨다. 이런 빚을 탕감받은 이는 100데나리온, 곧 2천여만 원 정도의 빚은 탕감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마태오 복음서가 말하는 용서다.
이런 측면에서 주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는 만큼만 용서해 달라는 청이 아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미 용서해 주신 것처럼, 그 용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빚진 이의 빚을 탕감해 줄 테니, 처음 그 빚을 모두 탕감해 달라는 청이라 하겠다.
악에서 멀어지게 해 달라는 기도
주님의 기도에 담긴 마지막 두 청원은 사실 하나의 청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루카 복음서에는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청원이 없지만, 마태오 복음서는 악이 이끌어 들이는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오히려 그 악으로부터 멀리 떨어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청원으로 기존의 청원을 확장한다. 이 점은 ‘악에서’에 사용된 전치사 ‘아포’(ἀπό)를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이 전치사는 ‘안에서 밖으로’라는 의미가 아니라 ‘어느 지점으로부터 밖으로’라는 뜻이다. 즉, 마지막 청원은 우리가 유혹에 빠져 악에 허우적거릴 때 그 악으로부터 밖으로 끌어내 달라는 청이 아니라, 우리를 끌어당기는 그 악에서 애초에 멀어지게 해 달라는 청원이다. 이는 악이 끌어당기는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는 청과 같은 청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유혹’이라고 번역된 ‘페이라스몬’(πειρασμον)은 주로 ‘시험’, ‘시련’, ‘유혹’ 등의 의미를 지닌다. 구약 성경에서는 하느님께서 백성에게 시련을 주심으로써 그들을 시험하신다고도 생각하였다(창세 22,1; 탈출 15,25; 2역대 32,31 등 참조). 특히 사무엘기 하권 24장 1절에서는 하느님께서 다윗을 시험하시는데, 경건한 유다인들은 이처럼 하느님께서 시험에 들게 하시어 온전한 순명을 표현할 수 있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역대기 상권 21장 1절에서는 같은 장면을 사탄이 다윗에게 하는 일로 표현한다. 결국 구약적 시각에서 보자면 유혹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어 사탄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주님의 기도 속 청원은 사탄의 유혹에 빠져들지 않게 보호해 주시고, 그러한 사탄에게서 멀어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청원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겟세마니에서 들려온 마지막 당부
여기서 이 구절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배경이 되는 겟세마니 기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겟세마니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신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마태 26,41)
여기서 제자들이 유혹에 빠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십자가를 외면하고 피해 달아나는 것이다.
결국 이 청원은 예수님을 따르다가 겪게 될, 혹은 이미 겪고 있는 시련 속에서 헤매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라고 말할 수 있다.
“주님, 우리가 배신하지 않게 하소서.”
즉, 이 기도문은 이러한 청이다. 그리고 주님을 배신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들이는 ‘악’으로부터 우리가 멀어지도록 해 달라는 청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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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읽는 ‘주님의 기도’
<주님의 기도, 다시 읽다>는 익숙한 말씀 속에 담긴 예수님의 깊은 뜻을 묵상하는 연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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