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특집④ 아직도 한국을 사랑하는 중입니다

영성과 신심

월간 특집④ 아직도 한국을 사랑하는 중입니다

시와 차, 사람으로 채운 안선재 수사의 삶

2026. 08.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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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5, 광주에 총성이 울리던 그 봄에 낯선 땅 한국에 첫발을 디딘 한 외국인 수사가 있습니다.

 

🍵 46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는 한국의 시와 차, 국악과 사람들을 사랑하며 이 땅에 머물고 있습니다.

 

✍ 천상병 시인의 찻집 '귀천'에서 나눈 인연, 그리고 김대건·최양업 신부의 편지를 번역하기까지—안선재 수사가 들려주는 한국살이 46년의 기록을 만나보세요.

 


 

낯선 땅에서 만난 한국 사람들

 

저는 198057일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그 후 며칠 동안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새 헌법과 자유선거를 외치는 학생들을 보았습니다. 서울 거리에는 탱크가 나타났고, 중무장한 군인들이 대학 입구를 봉쇄했으며, 광주에서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저는 이 나라가 오랫동안 독재 정권 아래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새로운 시작을 바라는 젊은이들의 희망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시내에 나가려면 교통수단이 필요했습니다. 지하철 노선은 하나뿐이었고, 집에서도 멀어 다른 사람들처럼 버스를 타야 했습니다. 버스는 늘 만원이었고 자리는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앉아 있는 사람들이 서 있는 고등학생들의 무거운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 주는 모습을 보며 감동했습니다.

 

학생들은 종종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부모님과 함께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왔다고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당시 서울에서는 많은 가정이 다른 가족과 함께 한두 개의 방을 나누어 쓰는 한국식 가옥에서 살았습니다. 고층의 현대식 아파트 단지는 특정 지역에서만 볼 수 있었습니다. 몇 년 뒤 강남에 사는 친구들을 방문했을 때는 새로 지어진 건물들 사이로 여전히 논밭이 펼쳐져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한국살이를 배우다

 

연세대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우던 시절, 점심 식사 후에는 신촌에 있는 카페 미네르바에 가곤 했습니다. 그곳에서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여러 나라에서 갓 볶은 원두로 사이폰 커피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 동네에서 그런 커피숍은 그곳 하나뿐이었습니다. 명동 근처에도 한 곳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외에는 모두 다방에서 네스카페에 설탕과 프리마 크림을 넣어 마셨습니다.

 

그러다 서강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1980년 당시 서강대학교의 학생 수는 1,600명이었고, 몇몇 학과에서는 대학원 과정을 막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영어를 가르치던 선생님들 가운데는 모든 학생의 이름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캠퍼스에는 건물이 몇 채 없었지만, 서강대학교는 도서관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학생들이 책을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도록 개방한 최초의 대학 도서관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학생들은 대부분 시골 출신으로, 대학 근처 하숙집에서 두 명이 한 방을 쓰며 생활했습니다. 아침과 저녁은 집주인 아주머니가 차려 주셨습니다. 저도 초창기에는 아주 소박하게 생활하며 집에서 간단히 저녁을 해 먹었는데, 어느 날 광화문 근처 골목에 있는 남원식당을 알게 되었습니다. 백반은 700, 정식은 1,000원이었는데, 전라도 특유의 푸짐한 음식이 식탁 가득 차려졌습니다. 정말 놀라웠습니다. 당시에는 학생들이 버스를 이용할 때 75원짜리 할인 승차권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어른들은 100원을 내야 했습니다. 한국어를 공부하는 동안에는 저 역시 학생으로 대우받았습니다.

 


 

한국 시와의 첫 만남

 

세월이 흘렀습니다. 저는 교수가 되어 고전 영문 시를 가르치게 되었는데, 어느 날 한국인 동료에게 현대 한국 시에 관해 물어보았습니다. 그녀는 한국 시를 영어로 번역해 보라고 권하며, 자신이 존경하는 원로 시인 구상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구상 시인은 1919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현재 북한에 있는 원산 근처에서 자랐고, 일본에서 유학했으며 가톨릭신문 논설위원 등으로 활동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형은 북한에서 사제가 되었지만, 다른 한국인 사제들과 마찬가지로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살해당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구상은 젊은 시절 신앙을 떠나 일본에서 아시아 종교를 공부했지만, 나중에 다시 가톨릭 신앙을 되찾았습니다. 그의 시에는 번역하기에 좋은 선()적 분위기가 담겨 있었고, 일상에서 마주한 순간의 경험을 시 속에 자연스럽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생태학적 감수성을 지녔으며, 많은 시에서 한강 변을 따라 산책하며 목격한 오염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또 다른 친구는 김광규의 시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는 독일에서 유학하며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귄터 아이히의 사회 풍자시에 매료되었습니다. 독일에서 그들의 작품을 접하기 전까지는 한국 시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그들의 작품을 접한 뒤에는 독재 정권 아래의 한국 사회를 풍자하는 미묘하고 유머러스한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총명한 학생들은 그의 시를 좋아했지만, 군사 검열관들은 그 풍자의 의미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19935월 초, 한 친구가 저를 인사동의 작은 카페로 데려가 차를 사주었습니다. 카페 주인인 목순옥은 바로 전 주인 428일 세상을 떠난 시인 천상병의 아내였습니다. 그 카페에서는 그녀의 어머니가 직접 담근 모과차와 유자차 등 과일차를 팔았고, 카페 이름은 천상병의 대표작 제목인 귀천이었습니다.

 

그곳은 제 단골집이 되었습니다. 저는 천상병 시인의 시를 모두 번역했고, 그 시들은 한국에서 한국어 원문과 영어 번역을 함께 실은 합본판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그 책은 지금까지 26쇄를 찍었는데, 천상병 시인은 지금도 한국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아마도 젊은 시절 천 시인의 시를 좋아했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그 시집을 선물하면서, 영어 공부도 할 겸 번역본을 읽어 보라고 권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멋에 빠지다

 

제가 처음으로 한국 녹차를 맛본 것도 같은 시기였습니다. 인사동에 있는 반야로 차문화연구원의 작은 방에서였습니다. 그곳에서 차를 내주고 차에 대해 강의하던 채원화는 위대한 다도 스승인 효당 스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녀는 효당 스님에게서 4월 말에 갓 딴 찻잎을 덖고 말려 차의 풍미를 최대한 끌어내는 방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채원화의 제자들은 그녀와 함께 이목의 《다부(茶賦), 초의의 《동다송》과 《다신전》 등의 한국 차 문화의 고전을 읽었습니다.

 

1994년부터 ​​1995년 사이에는 저도 하동의 차밭을 방문하여 찻잎을 따고 덖고 말리는 과정을 지켜보며 한국 전통 차 문화를 직접 체험하는 뜻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후 여러 해 동안 다른 차 장인들을 만나 한국 차 관련 고전 세 권을 영어로 번역했고, 한국식 다도에 관한 개론서도 출간했습니다.

 

1990년대에는 민요, 판소리, 농악, 가야금 등을 통해 국악의 매력을 발견하게 되었고, 뛰어난 예술가들의 전통 무용 공연도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서울 중심부, 특히 호암아트홀에서는 공연이 자주 열렸는데, 저는 이매방과 임이조의 공연을 보았고, 김숙자의 아름다운 도살풀이춤도 감상했습니다.

 

줄타기 명인 김대균과는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처음 그를 본 것은 민속촌에서였는데, 이후 그는 국가무형문화재 줄타기 보유자로 인정받아 그 전통을 후대에 전하고 있습니다. 제가 국악을 듣고 있을 때면 동료나 학생들이 제 사무실에 찾아와 국악은 생소해서 좋아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국이 선물한 아름다운 날들

 

제 나이가 80대 중반이다 보니 요즘 K(혹은 다른 K로 시작하는 단어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영화관에도 거의 가지 않습니다. 커피도 마시지 않고, 패스트푸드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는 장사익이고, 그를 친구라고 부를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그의 노래를 좋아하고, 그 나이에도 계속 공연하는 모습에 감탄합니다. 저는 80명이 넘는 한국 시인들의 시를 번역했고, 12편의 소설과 많은 단편소설도 번역해 출간했습니다. 어떤 작가를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고 꼽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그들 모두를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지금 저는 19세기 반가톨릭 박해 시대의 문서를 연구하며 영어로 번역하는 데 몰두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쓴 편지의 영어 번역본이 미국에서 출간되었습니다. 1821년 동갑내기로 마카오에서 함께 유학했던 두 위대한 인물의 차이점을 살펴보는 일은 제게 매우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출판물이 나올 예정입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생전에 우리 떼제 공동체에 한국으로 수도사들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시며, 한국의 젊은이들이 신앙을 더욱 깊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바라셨습니다. 최근에는 김수환 추기경의 시복 준비 과정에서 증언할 기회를 얻게 되어 매우 기뻤습니다. 제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어떤 도움을 드렸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제게 여러 아름다운 방식으로 깊이 있는 인간적인 경험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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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떼제 공동체 수사이자 서강대 명예교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공동체 생활의 본질로 삼고, 한국 교회의 역사와 신앙을 위해 헌신한 안토니오 다블뤼 성인을 본받고자 합니다. 한국의 차와 문학, 교회사 연구 및 번역 활동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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