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바람이 전하는 말>
2025년 11월 5일 나의 감독 데뷔작인 <바람이 전하는 말>이 개봉했다. 한국 대중음악의 살아 있는 전설이며 1세대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인 김희갑의 음악과 인생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2014년부터 10년에 걸쳐 촬영했고 꼬박 여섯 달을 편집했다. 그리고 다시 1년을 매만지며 편집과 후반 작업을 거쳐 세상에 내놓았다. 독립 예술 영화에 스크린을 내어 주는 극장은 많지 않았다. 전국 3,200여 개의 스크린 중 약 1.5퍼센트인 50여 개 스크린에서 영화 상영을 시작했다. 상영관이 없는 도시의 관객들은 직접 대관을 해서 영화를 보았다.
나는 그 눈물겨운 격려가 고마워 상영관마다 달려가 ‘관객과의 대화’를 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두 번 놀랐다. 김희갑이 작곡한 노래가 대부분 자신의 애창곡이라는 점에서, 그다음은 이 작업이 10년에 걸친 대장정이라는 점에서 놀라고 감동했다. 촬영은 10년을 했지만 실제 곁에서 그분을 뵌 것은 20년. 카메라에 담긴 시간은 그가 78세에서 88세까지 이르는 10여 년이었다.
작곡가 김희갑
작곡가를 처음 만난 것은 2006년, 그의 음악 인생 70세를 기념하는 헌정 음악회서였다. 그때만 해도 칠순의 작곡가는 산악자전거, 스노보드 등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겼고 산책에도 등산에도 선수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평소엔 과묵하지만 좋아하는 맥주를 마실 때면 목소리 톤을 높여 즐거운 대화를 이끌어 가곤 했다. 사진 촬영을 배우기 위해 남대문을 다니며 새 카메라를 사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 나이에 뭘…….’ 하며 주저하는 태도 같은 것이 없었다.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뒤늦게 시작한 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배우고 익히는 미덕도 잊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그럴 것 같았다. 그런데 팔순이 가까워지면서부터 선생님께서 해마다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안타깝고, 아까웠다. 위대한 작곡가의 시간이 속절없이 가고 있는데 아무도 기록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렇게 ‘왜 아무도 기록을 안 하지?’라는 의문의 끝에서 시작한 기록이 10년에 걸쳐 쌓이게 되었고 그것이 모여 영화가 되었다.
바람이 전하는 말

“너의 시선 머무는 곳에 꽃씨 하나 심어 놓으리.”
“그 꽃나무 자라나서 바람에 꽃잎 날리면”
“바람이 불어오면 귀 기울여봐.”
영화의 챕터마다 조용필의 노래 ‘바람이 전하는 말’의 가사를 화면 한 귀퉁이에 적어 넣었다. 하지만 정작 노래는 넣지 않았다.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 잠들기 전 노래를 한 번 찾아보기를 바랐다. 그 노래를 음미하며 가사를 되뇌어 보기를 말이다.
이 노래가 영화 제목이 된 데에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다. 촬영을 하며 나는 자연스레 김희갑 작곡가와 아내인 양인자 작사가 두 분께 물었다. 세상을 떠난 뒤에 어디에서 영원히 안식하고 싶은지, 떠난 후에 노래비를 세운다면 그 내용은 무엇으로 할지……. 양인자 작사가는 이미 노래로 남겨 놓았다고 했다. 그 노래가 바로 ‘바람이 전하는 말’이다. 집에 돌아와 가사를 찾아보았다.
“내 영혼이 떠나간 뒤에 행복한 너는 나를 잊어도
어느 순간 홀로인 듯한 쓸쓸함이 찾아올 거야.”
이는 마종기 시인의 <바람의 말>에서 영감을 받아 가사로 쓴 곡이었다. 세상에 남겨질 남매에게 하고 싶은 위로의 말이자, 김희갑의 노래로 위로받으며 살아온 우리 모두에게 주는 유언이기도 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영화의 제목이 되었다.
착한 당신 속상해도
“쓸쓸한 너의 저녁 아름다울까.”
“착한 당신 속상해도 인생이란 따뜻한 거야.”
10여 년의 제작 기간을 지내 오며 제일 힘들었던 것은 점점 허물어지는 작곡가를 바라보는 일이었다. 긴 세월은 선명했던 예술가의 기억과 눈빛, 걸음까지도 흐리고 무뎌지게 만들었다. 어느 날부턴가 선생님은 하루에 20시간 가까이 누워만 계신다고 했다. 하염없이……. 그뿐 아니었다.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던 중요한 날짜와 이름마저 그분에게서 차츰 잊혀 가는 게 눈에 보였다. 스스로 걸을 수 없어 휠체어에 의지하기도 했다. 찾아가 인사를 드려도 그저 반가운 얼굴로 “왔어요!”라고 하시며 손을 잡으실 뿐 내 이름을 기억해 부르진 못하셨다.
가장 힘든 일은 그런 선생님께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이었다. ‘이런 장면은 절대 영화에 넣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며 촬영을 했다. 선생님의 노쇠해진 모습을 그대로 담고 싶지 않아 창문에 비친 모습을 주로 찍었다. 그러다 선생님께서 자신의 기억이 점점 흐려지고 있음을 알아차리신 그날, 나는 넌지시 물었다.
“기억이 점점 흐려져 가는 게 어떠세요?”
그의 답은 간단하면서도 철학적이었다.
“괜찮아요. 너무 많이 기억하는 것보다 잊을 건 잊는 게 낫죠.”
소년 김희갑은 1·4 후퇴 때 아버지와 함께 평양서 대구로 피난을 내려왔다. 그때가 열다섯이었다. 의사였던 아버지는 미군 부대에서 접시를 닦았고, 그는 소스 통이나 테이블을 정리하는 ‘하우스 보이’를 했다. 그러다 아버지에게 기타를 배웠다. 1년 6개월을 연습한 끝에 기타를 잘 친다는 소문이 나서 서울로 스카우트가 되었고, 용산 미8군에서 기타를 연주했다.
그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기타리스트였기에 음반 작업, 밤무대 연주 등 하루 종일 스케줄이 빡빡했다. 새벽부터 다시 새벽이 될 때까지 기타를 치고 또 쳤다. 쪽잠을 자면서 연주했던 그런 시절이 그에게도 있었다. 그러니 잊을 것이 한두 가지일까? “잠 좀 실컷 잤으면…….” 하던 젊은 날의 소원을 아흔이 다 되어 이루었다. 요즘은 깨어 있는 시간보다 잠자는 시간이 훨씬 많다는 것이 아내인 양인자 작사가의 말이다.
개봉을 앞둔 기자 간담회에서 영화를 본 소감을 물었다. 수많은 기자와 관객 앞에서 그가 말문을 열었다.
“지난 시간이 순식간에 스쳐 가네요. 벅차고 감동적으로 봤어요”
자신이 지나온 인생이 펼쳐지는 100분 동안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벅찬 마음 끝이 쓸쓸하진 않았겠지? 사실 5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져 뇌에 ‘무수히 많은 은하수’를 지니게 된 그는 많은 기억을 잃었다. 젊은 시절 열심히 연주하며 큰 소리를 많이 들었던 탓에 소리도 거의 잃었다. 기자 간담회에서 나는 그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기자들의 질문을 알아듣지 못할 때 다시 말해 주기 위해서였다. 한참 기자들의 질문이 오가고 있을 때 그는 내게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왜 사람들이 많아요?”
간담회가 끝나고 일간지 단독 취재가 이어질 때도 그는 그곳에 앉아 있었으나 그곳에 있지 않았다. 그저 다소곳이 앉아 있는 참을성 있는 소년이 있을 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박수와 꽃다발 속에서 나는 조금 쓸쓸했다. 그 쓸쓸함을 감추려고 카메라를 들어 렌즈를 그에게 향했다. 그때 그가 내게 미소를 보냈다. 90년을 훌쩍 살아 내고, 3천여 곡을 작곡하고 돌아와 소년이 된 ‘작곡가 김희갑’이었다. 그 미소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쓸쓸하고 외로워도 인생이란 따뜻한 거라고. 그가 내게 준 유언은 아마도 이것이라고.
사진 ©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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