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집 《식물적 낙관》이 출간되어 폴란드에서 초청받았다. 일정을 확정하고 한 달 정도 지났을까, 주최 측에서 아우슈비츠를 방문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어 왔다. 박물관 해설사로 계신 한국인 교수님이 가이드를 해 주실 수 있다고. 그때 하느님을 떠올렸다.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자서전 《희망》에서 “침묵 중에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강제 수용소 정문에 들어섰”다고 회상하셨기 때문이다. 그 부분을 유심히 읽고 담아 두었는데 그곳에 직접 가 보겠느냐는 질문 앞에 내가 서 있었다. 당연히 가고 싶다고 말했다.
폴란드에 갈 준비를 하면서도, 폴란드에 도착해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아우슈비츠 방문은 가장 긴장되는 일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두렵고 무서웠다. 동행자가 “꺼리는 분도 있는데 어떻게 가실 결심을 하셨어요?” 하고 물었을 때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저는 이제 이런 일이 생겨나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구나, 하고 생각해요. 하느님께서 직접 가서 보라고 하시는구나. 경험해 보라고 하시는구나. 그러면 행동하게 돼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 안으로

방문 당일, 묵주를 두 개 챙겼다. 하나는 손목에 하나는 가방에 넣었다. 크라쿠프에서 한 시간 반쯤 버스를 타고 내리니, 카토비체 실레시아 대학의 Y 교수님이 나와 있었다. 우리는 걸어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에게 알려진 ‘아우슈비츠’라는 이름은 수용소가 건설된 폴란드의 소도시 오시비엥침(Oświęcim)을 독일어로 부른 명칭이다.


수용소는 원래 폴란드 군용 막사로 사용되던 건물을 이용하여 1940년에 처음 만들어졌고 이후 그 근방을 강제 수용해 ‘비르케나우’ 지역에 두 번째 수용소를 지었는데 우리가 기억하는 가스실은 바로 이곳에 있었다. 노동력 착취를 목적으로 한(어차피 처형이 남발됐지만) 제1수용소와 달리 제2수용소는 오직 살상만을 위한 ‘절멸 수용소’였다.
수용소 정문에는 사진으로만 보았던 간판이 실제로 양 철문 사이에 다리처럼 놓여 있었다.
“ARBEIT MACHT FREI,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 슬로건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를 비꼬아 만든 문장으로, 구원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노동하다 죽으리라는 조롱이었다고 한다. 마치 신이 된 듯한 기분이었을까. 비가 와서 질척질척한 흙을 밟으며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신은 인간을 조롱하지 않는다. 두 얼굴을 하지 않는다. 인간을 기만하지 않고 물건이나 재료 혹은 값싼 물자쯤으로 보지 않는다. 인간을 살리려는 신 대신 인간을 죽이려는 인간이 만들어 낸 지옥도. 그곳이 아우슈비츠였다.
투어를 시작했을 때 가장 놀란 건 유대인들만 수용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여기에는 일상을 살아가던 폴란드인도 이유도 없이 잡혀 와 갇혔고 처형되었다. 어느 날에는 마을의 구역을 임의로 정해 그 안의 모든 폴란드인을 끌고 가기도 했다고 한다. 신부나 사제 같은 지식인들은 처형 1순위였다.

수용소 안은 어둡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비극적인 전시품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내 마음은 하나둘씩 무너지고 있었다.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슬픔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분노에 가까운 그 눈물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그냥 우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는 표현할 수 없어서 할 수 있는 반응을 간신히 해 보는 것이었다. 새로운 곳으로 가서 살라는 말을 믿고 짐을 쌌던 유대인, 폴란드인, 집시(현재는 로마, 신티Sinti로 지칭)들은 10미터 남짓한 가축 수송용 화물칸에 100명씩 실려 수용소에 도착한 다음, 그대로 가스실로 옮겨졌다.
독일군은 피해자들을 살해하기 전 머리카락을 잘라 냈는데 모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이불로 사용하는 그 모포 말이다. 그 살상을 증언하는 산 무더기 같은 머리카락이 전시실에 쌓여 있었다. 사람이 사람에게서 벗겨내 모포를 만들다 만들다 전쟁이 끝나고 창고에서 발견된 머리카락이 2톤이나 되었다고 한다. 머리카락으로 2톤을 만들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죽음이 필요했을까.
슬픔과 분노로 계속 울고만 있던 나는 피해자들이 새 삶을 꿈꾸며 챙겨 왔던 수많은 가방 앞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졌다. 가방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아주 큼지막하게 썼을 그 마음과 동작, “절멸”이라는 비극을 예상조차 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이 가졌던 희망이 가방 하나하나에 담겨 있었다. 오직 살기만을 희망한 그들이 안경(철제로 되어 있어 전쟁 물자로 사용 가능하다), 의수와 의족(역시 전쟁 물자로 사용 가능하다), 머리카락(전쟁터에 모포로 공급되었다)을 공급할 자원이 되어 약 백삼십만 명이 사라졌다는 역사가 믿기지 않았다. 인간이 인간을 그렇게 했다는 사실이.
“잠깐만요.”
나는 일행들에게 말하고는 전시실 창가로 가서 한참을 울었다. 일행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감출 수 있는 눈물이 아니었다. 얼른 그치고 마저 관람을 마쳐야 한다고 스스로 다그치면서도 쉽게 마음이 다스려지지 않았다. 왜라는 질문이 떠나지 않았고, 그것은 세계 대전 이후 너무 많은 사람이 가져온 물음이지만 그런 악행의 원인을 우리는 끝내 알 수 있을까? 깊이도 모르고 점점 파 내려가는 지옥 같은 살상을 지금도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질문은 악을 향해서가 아니라 다른 곳을 향해 던지는 것이 나을 것이다.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돌보소서.”


Y 교수는 전시된 몇몇 사진을 가리켰다. 수용소 곳곳에서 이루어진 살상을, 숨은 각도에서 몰래 찍은 그 사진들은 독일군이 퇴각하며 없애지 못한 주요 증거였다. 사진을 찍어 기록한 사람들은 존더코만도(Sonderkommand)라고 불리던 유대인 부역자들이었다. 시체를 소각하거나 가스실로 끌려온 사람들의 물건을 정리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작업에 동원되었다. 그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하지 않으면 처형되기에 일했고 비인간적인 행위를 거듭해서 목격한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적지 않은 증거들을 땅속에 파묻어놓았다. 자기 역시 언제 어느 순간 살해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들은 사진을 찍고 때론 메모하고 기록해서 묻어 두었다. 그건 마지막으로 인간을 믿어 보는 행위가 아니었을까.
비르케나우까지 돌아보고 나니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패전을 예감한 독일은 가스실을 모두 폭파했고 그 잔해들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침엽수 숲 너머에는 더 큰 살상을 위해 나치가 건설하던 또 다른 수용소들의 흔적이 있다고 했다. 얼마나 더 죽이고 싶었던 걸까.
“그런데 이런 시설들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군에서요? 아니요, 민간의 회사들이 입찰 경쟁 끝에 들어와 건설했죠. 어떻게 비용 절감하며 죽일 것인가 연구했고요. 막판에는 가스실에서 사망한 사람들을 옮길 필요 없이 바닥이 열려 그대로 불태울 수 있는 시설까지 고안했다고 합니다.”
더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사방이 확 트인, 도망자들을 감시하기 위해 어떤 은폐물도 만들지 않은 그 황량한 들판에 서자, 마냥 두렵거나 슬프기만 하지 않았다. 어쩌면 기운이 완전히 빠져 버린 탓일 수도 있지만. 독일군은 화장한 유해를 아무 데나 버렸고 그러니 사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공간이 거대한 묘지인 셈이라는 설명이 들려왔다.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기도문을 마음으로 외웠다. 파티마에 발현한 성모님이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문이었다.
“예수님, 저희 죄를 용서하시며 저희를 지옥 불에서 구하시고 연옥 영혼을 돌보시며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돌보소서.”
이 중 나는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돌보소서, 하는 말을 할 때 내 안의 인간성이 성히 살아 있는 것을 느끼곤 했다. 마치 하느님과 손을 잡고 내가 어떤 일, 그러니까 안쓰러운 누군가를 안아 올릴 수 있을 듯한 힘을 느끼곤 했다. 나는 이제 울지 않았다.
내가 투어의 마지막을 그렇게 마무리할 수 있었던 건 서점에서 산 책들 때문이기도 했다. 그 책들의 제목은 이렇다.
- 《아우슈비츠의 스케치북》, 홀로코스트를 직접 목격한 사람이 남기고 종전 후에 발견된 그림들을 모은 책.
- 《아우슈비츠의 시 노트》, 수용자들이 아우슈비츠에서 지은 시를 모은 책.
- 《아우슈비츠 동화책》, 아우슈비츠 수용자가 자기 아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지은 동화.
그 유례 없는 살상과 비극 속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점에서 들었다가 “도저히 못 읽을 것 같아요.” 했던 나는 “그래도 읽어야겠죠.” 하며 책을 들고 왔다. 그렇게 해서 증언자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 몰려들던 용기와 어떤 평화를, 내내 기억할 것이다.

사진 ⓒ 김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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