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의 파견자들

영성과 신심

싱가포르의 파견자들

세상이 우리에게 중대한 질문을 던질 때마다

2025.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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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머튼의 아름다운 글을 읽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꼭 안고 잠들고 싶은 장면이었다. 수도원의 밤, 머튼은 낮 동안 수사들이 머물며 공부하고 글을 쓰고 더러는 편지도 썼던 방들을 둘러본다. 그들이 일과를 끝내고 돌아간 자리에는 낮 동안의 그들의 영혼이 남아 있다. 그들은 회의하거나 의문을 갖거나 다행히는 주님의 은총을 되새겼을 것이다. 절대 고요할 리 없는, 하지만 외면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비약적 여정. 그 하루치 묵상이 끝난 뒤 머튼의 눈으로 바라보는 수도원 도서관 장면은 육체가 떠난 자리에 남아 있는 영혼들의 자취를 너무나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직접 서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나는 한 번도 미국에 가본 적 없고 글의 배경은 심지어 1960년대인데 말이다.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옛 수도원 건물을 복합 문화 건물로 탄생시킨 싱가포르의 차임스.

 

한 달 동안 싱가포르와 오스트레일리아를 다녀왔다. 일과 휴가가 합쳐진 출장이었다. 출발 전까지 강연을 다녔던 나는 한 달 짐을 출국 날 당일 새벽까지 싸고, 기절할 듯한 피곤함을 느끼며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오죽하면 싱가포르 대학의 교수님이 날 보더니 작가님 좀 쉬셔야 할 것 같아요.” 할 정도였다. 그냥 서울에서 싱가포르로 옮겨진, 물에 푹 젖은 마대였다고 할까. 숙소에서 쉬다가 겨우 정신 차려 저녁 먹을 곳을 찾아보니 바로 앞에 수도원을 개조한 식당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 뒤는 싱가포르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다. 정신없이 숙소를 잡아 근처에 뭐가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외국에 나가서도 미사를 (가능한) 빠지지 않는 새 신자로서 다행이다 싶었다. 하느님께서 기지를 발휘해 주신 것 같았다.

 

종교를 가지면서 생긴 좋은 점과 나쁜 점은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시겠지.하고 말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이 대개 그렇듯 절대 하느님께 모두 맡겨 드리지는 또 못한다. 재고 계산하고 따지고 애쓰고 안되면 화내고 억울해하고 투정하고 항의하다가 무겁게 하루를 마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시겠지하고 낙관하는 순간은 또다시 찾아온다.

 

만약 내내 그럴 수 있다면 좋은 일일까? 마치 서치라이트처럼 내내 신이 또렷하게 감지된다면? 왠지 그건 불가능하거나 심지어 위험할 것 같다.

 

저녁을 먹기 위해 찾아간 곳, ‘더 차임스(CHIJMES)’1840년 처음 건축된 이후 증축과 재건을 거듭한 건물로 원래는 수녀원과 고아원, 학교가 함께 있었다고 한다. 1983년까지 운영되다 지금은 식당가와 문화시설이 결합한 복합 건물로 바뀌었다. 30,000장의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아름다운 예배당인 차임스 홀과 오래전 모습 그대로 보존된 칼드웰 하우스는 국가 지정 역사 건축물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배가 고파서 뭐라도 당장 밀어 넣어야 했으므로 저녁 어스름 환하게 빛나는 아치 사진을 얼른 찍고는 식당들을 둘러보았다. ‘미식의 천국답게 여러 나라 음식이 있었고, 심지어 생활맥주라는 한국 프랜차이즈도 있었다.

 


 

싱가포르에서 봉헌한 미사

 

싱가포르 대학의 학생들과 한국 책 서점에서 열린 행사를 모두 마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주일을 맞았다. 다행히 컨디션도 슬슬 살아나 이제 제법 사람 꼴을 하고 싱가포르를 누비고 있었다. 작고 복잡하고 화려한 그곳은 무엇보다 다양성의 나라였다. 강연을 마치고 학생 식당을 가로질러 갔는데, ‘할랄음식 코너가 눈에 들어왔다. 한국과는 다르구나 싶었다.

 

미사 날, 아침 식사를 위해 숙소 식당으로 내려왔더니 이번에도 정장을 잘 차려입은 지배인이 나를 알아보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많이 먹어.”

 

첫날 들었을 때는 내가 어려 보이나 했는데 아주 정중히 그러는 걸 보면 그게 누구에게나 쓸 수 있는 인사라고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고쳐 줄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냥 넘어갔다. 어쨌건 나는 그 인사처럼 많이 먹을 생각이니까.

 

미사 시간은 한국의 교중 미사처럼 11시였다. 조금 일찍 가서 사진도 찍고 차분하게 미사를 기다릴 계획이었지만 갑자기 카메라 줌 기능이 고장나 버렸다. 결국 성당에 도착하고도 내내 그걸 고친다고 챗지피티를 이용해 검색하며 끙끙대고 있었다. 여행을 위해 큰맘 먹고 구입한 카메라가 시작부터 고장 나면 큰일이었다. 그러는 동안 차를 타고 신자들이 속속 도착했고 그 길을 막고 카메라를 들여다보던 내게 비켜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렇게 관광객 티를 팍팍 내며 나는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성 요셉 성당은 포르투갈 공동체 문화가 남아 있는 곳이었다.

 

성 요셉 성당은 1853년 포르투갈 선교부가 설립한 곳으로 이후 포르투갈계 유라시아인들의 핵심 커뮤니티였다. 1912년에 개축되었다는 성당 내부는 기둥 하나 없는 넓은 홀이었다. 2층에는 커다란 파이프오르간이 있고 흰옷을 입은 성가대가 연습 중이었다. 일렬로 놓인 나무 의자의 형태는 우리 본당과 비슷했지만, 제단과 제대의 분위기가 독특했다. 청백색의 화려한 도자기 타일을 배경으로 십자가가 달려 있었고, 성당에 쓰인 색채들이 좀 더 강렬하고 대비가 크게 느껴졌다.

 

미사가 시작되기 전에 극적으로 카메라를 고친 나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과 화려한 제대를 찍어 두었다. 의자 아래에는 말로만 들었던 장궤틀이 있었다. 기도할 때 무릎을 올려놓는 그 나무대는 이제 우리나라의 많은 성당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었다. 이국에서 이국의 형제, 자매들과 참회 기도를 올리고 독서를 듣고 강론에 귀를 기울였다. 한국에서는 형제들이라고 하는 기도문마다 형제, 자매들이라고 시스터즈를 넣는 것이 귀에 들어왔다. 한국 기도문에도 자매를 넣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부님의 강론은 이런 당부로 끝났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이 우리에게 중대한 질문을 던질 때마다 기쁨의 상징을 머리에 두르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미사가 끝나고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데 소원을 적어 넣을 수 있는 박스가 보였다. 기도하면서 나는 하느님께 구체적으로 뭔가를 바라본 적이 없다. 건강, 지혜, 평안, 보람 등을 빌지만 그건 그날 꼭 필요한 것이라기보다는 평생 간직하고 싶은 소원들이다. 그래도 어떤 말이라도 남겨놓고 싶어 볼펜을 집었지만, 그냥 사랑한다고만 썼다. 영어로 써야 하나, 한국어로 써야 하나 고민하다가 영어로 남겼지만, 나중에 숙소로 돌아오고 나서 생각해 보니 하느님께서 언어를 가려들을 분도 아닌데 왜 고민했나 싶었다.

 

싱가포르를 거쳐 조선으로 들어간 뒤 순교한 성 앵베르 주교 동상한 손에 쥔 형제, 자매들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다.”라고 쓰여 있다.

 

성당 출입구에는 피에타상이 있었고 한 노인이 십자가에서 막 끌려 내려온 예수님의 발을 어루만지고 입 맞추며 사랑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 간절한 모습에 마치 내가 빌고 있는 것처럼 눈물이 났다. 눈물을 참지 않기로 하면서 시시때때로 나는 울고 있었다. 뒤뜰을 한 바퀴 돌기로 하고 살피다가 한복 차림의 동상을 발견했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St. Laurent Imbert). 그는 싱가포르에 처음 파견된 사제이자 이후 조선 땅까지 건너간 최초의 주교였다.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하며 한글 기도서를 편찬하기도 한 그는 이후 1839년 새남터에서 순교했다고 했다. 싱가포르에 오기 전까지는 아예 모르던 사실이었다. 나는 싱가포르에서 만난 한복 차림의 성인 앞에서 착잡한 마음으로 오래 기도했다.

 


 

여행자가 아니라 파견자

 

싱가포르 전경 싱가포르 국립 미술관 옥상에서 본 도시 풍경.

 

싱가포르의 한낮은 덥고 햇빛이 강했다. 주일을 맞은 거리에는 외국에서 온 노동자들이 그늘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싱가포르의 메이드문화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공원과 거리, 미술관 옥상에서 시간을 보내는 수많은 젊은 여성을 직접 보니 실감이 났다. 집에 있으면 근무의 연속이기에, 일단 밖으로 나와 종일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이래서 나는 주말에는 안 나와. 메이드들이랑 구별이 안 되거든.”

 

여성이고, 젊고, 차려 입지 않은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메이드로 보일 수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무심코 한 그 말은 내게 묵직한 질문을 던져 주었다.

 

그렇다면 다른가?

다르고 싶은가?

달라야 하는가?

 

그런 질문들은 아까 성당에서 들었듯 세상이 던지는 아주 중요한 질문들이었다. 우리가 그런 질문들 앞에 설 때, 우리는 하느님 앞에 서는 것이다.

 

미술관과 마리나 베이를 돌아보고 돌아올 때는 어느덧 밤이었다. 쓰레기를 버리면 엄청난 처벌을 받는다는 싱가포르이지만 적어도 그 밤, 술병과 음식 봉지와 포장지들이 곳곳에 나뒹굴었다. 심지어 노래방 기계를 틀어놓고 술을 마시는 이들도 있었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었어.”

 

일행과 나는 말을 주고받았다.

 

그럼 그렇지, 어떻게 하나하나 다 통제하겠어?”

 

그 많던 메이드는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내게는 낮의 미사와 메이드들의 소풍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천천히 걸으며 나는 언젠가 이 순간에 대해 글을 써야지, 라고 생각했다. 메이드들이 가져왔던 각자의 도시락과 차려입은 원피스와 셀피를 찍기 위한 셀카봉에 대해서 써야지. 연애하다가 임신하면 추방된다는 이해할 수 없는 노동 조건이나 일하러 온 노동자에게 그런 자유가 없는 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니 그것에 대해서도 써야지 하고.

 

그렇게 숙소로 돌아가는 동안 어느새 여행의 기분은 사라져 있었다. 밤에도 빛나는 거대한 쇼핑몰들과 F1 대회를 앞두고 트랙을 만들고 있는 복잡한 공사장을 통과해 걷는 나는 여행자가 아니라 목적을 품은 채 걷는 파견자였다.

 


 

사진 ⓒ 김금희.

 

Profile
2009년 <한국일보>로 등단해 《너무 한낮의 연애》(2016), 《경애의 마음》(2018), 《대온실 수리 보고서》(2024) 등의 소설과 《식물적 낙관》 등의 산문집을 냈습니다. 작고 단순하고 환해지기 위해 분투 중이며, 밤마다 가톨릭 책을 읽다가 잠에 들어 가족들에게 ‘재야 신학자’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60여 종의 식물들과 함께 살아가는 식집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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