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바스티아노 성인, 인내와 용기를 말하다

영성과 신심

세바스티아노 성인, 인내와 용기를 말하다

모든 국군 장병, 그리고 아버지를 위해 바치는 글

2026. 02.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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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 나를 소개할 때면, 자연스레 이 말을 꺼내게 된다.

 

저는 군종교구 소속입니다.”

 

돌아오는 반응은 대개 군인이세요?” 혹은 군종교구가 뭐예요?”라는 질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군종교구는 의무 복무 중인 용사(병사), 장교와 부사관, 그리고 그 가족들을 위한 교구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어떻게 군종교구에 오게 되었어요?”라고 묻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거창한 사연이 없다. 단지 아버지가 육군 장교이기에 온 것이기 때문이다. , 태어나 보니 군종교구였던 것이다.

 

그렇게 나를 군종교구 소속이 되게 한 아버지가 올해로 군 복무를 하신 지 만 30년이 되었다. 그런 이유에서, 세바스티아노 성인은 나에게 군인의 수호성인이라는 호칭 이상으로 가깝게 다가온다.

 


 

세바스티아노 성인의 생애

 

세바스티아노 성인은 프랑스 남부 나르본에서 태어나 부모의 본향인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에서 자랐으며, 성장 과정에서 신앙과 교양을 두루 익혔다. 청년 세바스티아노는 빼어난 자질로 로마 군에 입대해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신임을 받는 지휘관까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지위를 세속적 영예로만 여기지 않았다. 감옥에 갇힌 그리스도인들을 비밀리에 찾아가 위로하고, 신앙을 흔드는 협박 앞에서 굳건히 견디도록 격려했다. 특히 마르코와 마르첼리아노 형제 부제를 끝까지 붙들어 주었고, 간수와 궁정 관리들 가운데서도 많은 개종자를 이끌어 냈다.

 

황제는 한동안 세바스티아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박해의 부당함을 숨김없이 비판하면서, 배교자의 고발을 통해 정체가 드러났다. 황제 앞에 선 세바스티아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고백했다. 격분한 황제는 그를 궁수들에게 넘겨 화살형을 명했다. 성인은 온몸에 화살을 맞고 쓰러졌으나 하느님의 섭리가 그와 함께했다. 순교자 카스툴로의 아내였던 이레네 성녀가 시신을 수습하러 왔을 때, 그는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이레네는 이를 알아보고 그를 극진히 간호하여 회복시켰다.

 

이후에도 세바스티아노는 숨어 지내지 않았다. 그는 다시 황제 앞에 나아가 주님께서 나를 일으키셨다.”라며 그리스도인들을 짓밟는 폭정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꾸짖었다. 황제는 그를 곤봉으로 때려죽일 것을 명했고, 시신은 로마의 하수로인 클로아카 막시마에 던져 버리게 했다.

 

그날 밤, 로마의 신심 깊은 부인 루치나에게 성인이 나타나 시신을 거두어 달라 청했다. 루치나는 이레네 등과 함께 성인의 유해를 찾아 아피아 가도인근 카타콤바에 안장했다. 후일 교황 성 다마소 1세는 그 자리에 성 세바스티아노 성당을 세워 그의 증언을 기억하게 했다.

 

680년 로마에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 로마인들은 성인의 유해를 모시고 행렬하며 전염병의 종식을 청했다. 이후 전염이 잦아들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러한 전통은 훗날 밀라노와 리스본에서도 반복되며, 세바스티아노 성인이 전염병 환자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그는 군인과 운동선수, 궁수들의 수호성인으로도 불린다.

 


 

주님, 아버지를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어릴 적 내게 아버지는 유니콘과 같은 존재였다. 내가 세 살이던 해에 아버지는 남동생을 임신한 어머니와 나를 두고 이라크로 파병을 떠났다. 아버지는 남동생이 태어난 뒤 100일이 지나서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오랜만에 아버지를 만난 네 살의 나는 아버지에게 안녕하세요. 얘는 제 동생 김신형이에요.”라며 남동생을 소개했다고 한다. 평소에는 아빠~!” 하며 반기던 딸의 어색한 행동에 아버지는 당황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번도 만나기 힘들었다. 오죽하면 아침마다 어머니에게 아빠 다녀가셨어요?”라고 물었다.

 

아버지가 곁에 계시지 않는 날이 숱하게 많았다. 한번은 가족 여행을 출발했는데, 아버지가 비상 상황으로 출근을 하고 어머니와 나, 남동생만 어영부영 여행지에 갔었다. 그뿐인가. 명절에 아버지 없이 아버지의 친인척을 뵙는 일은 다반사였다. 아버지는 내가 대학생이 되어서도, 집에 오면 잠만 주무시고 바로 출근하는 분이었다. 그 세월만큼 때로는 오해나 서운함이 생겨도 해결하지 못해 어색함이 오래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훈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를 철저히 따랐다. 아버지의 근무지가 바뀔 때마다 함께 이사를 다녔고, 그 결과 주민등록초본을 떼면 17개의 주소지가 나온다. 딱 한 번, 1년 정도 떨어져 지낸 시기가 있었다. 아버지는 강원도 인제의 원통으로, 나는 대학교 기숙사로, 동생은 기숙사 고등학교로 흩어졌다. 가족이 각자의 자리에 머물러야 했던 시간이었다.

 

그 무렵 나는 휴학을 했고, 아르바이트가 없는 이틀은 아버지 집으로 향했다. 아버지가 출근하시면 나는 속초에서 시간을 보내고, 아버지가 퇴근하시면 함께 저녁을 먹기를 반복하며 지냈다. 아버지와 동네 단골 식당에서 차돌박이에 소주를 그렇게도 먹었는데, 아버지는 그때가 가장 좋으셨다며 딸 있는 여느 아버지들에게 자랑으로 말씀하시곤 한다.

 

내가 바라본 아버지는 언제나 참된 군인이었다. 아버지의 구체적인 임무는 모르지만, 군 기밀이기에 알 수도, 알 필요도 없다. 다만 가끔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듯 들려주시는 이야기에는 가족에게조차 털어놓을 수 없었던 책임감과 고독이 스며 있다. 물론 동료들과 함께였겠지만, 혼자 감당해야 했던 그 무게를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그저 대대장이나 학군단장으로 계셨던 시절, 청년들을 대하던 아버지의 진심 어린 태도를 보며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그 모습에 나 또한 언젠가 군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갖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가 이제 전역까지 약 3년을 앞두고 있다. 여전히 바쁜 임무를 맡고 있지만, 예전보다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드라마 한 장면에도 눈물이 많아진 50대 중년의 아버지를 보며 생각한다. 군인의 사명을 마치신 뒤,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전쟁과 죽음이라는 두려움과 한 걸음 멀어지기를, 남은 복무 기간에도 주님께서 항상 함께하시기를 바라본다.

 

평화의 주님,

오늘도 조국을 지키고


정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군인들을 굽어보시어


어려움을 이겨 내는 굳건한 힘과 용기를 주소서.

_ 군인을 위한 기도 中

 


Profile
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도보 여행을 하다 보면 때로는 예상치 못한 만남을 경험합니다. 길가에 피어난 작은 생명, 끝없이 출렁이는 바다, 광활한 하늘은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하고, 저를 주님께로 이끌어 줍니다. 혼자 떠나는 길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바라보는 경이로운 순례입니다. 길 위에서 마주하는 삶의 조각들 속에서 발견하는 은총이 저를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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