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특집④ 내 사전에 ‘나눔’은 없었다

영성과 신심

월간 특집④ 내 사전에 ‘나눔’은 없었다

동생 젖병부터 오병이어까지, ‘소유’가 ‘나눔’을 배우는 과정

2026. 0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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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생의 젖병도, 간식도, 부모님의 무릎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나눔보다 소유가 먼저였던 아이는 그렇게 누구보다 치열하게 내 것을 지키며 자랐습니다.

 

🍞 시간이 흐른 뒤, 그 아이는 십일조 앞에서 망설이고, 로또 당첨을 상상하다가 오병이어의 기적 앞에서 주님이 건네는 질문과 마주합니다. “너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 동생과의 유쾌한 추억에서 시작해 소유나눔의 의미를 배워 가는 이야기. 웃으며 읽다 보면 어느새 나의 오병이어 경험을 떠올리게 됩니다.

 


 

내 동생은 내 이었다

 

나에게는 한 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 엄청나게 싸우면서 컸겠네요.”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싸움이라는 건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이 맞아야 할 수 있는 거니까. 우리의 경우에는 일방적으로 동생이 당하며 컸다는 게 맞는 표현이다.

 

엄마의 증언에 따르면 분유를 진작에 뗐음에도, 나는 동생에게 물려 있는 젖병을 기어이 뺏어 입에 물었다고 한다. 동생 젖병을 뺏었다고 혼이 나면 나도 우유를 먹겠노라 하도 울고불고하는 통에 한동안 다시 분유를 주었을 정도였다나!

 

그뿐 아니라 동생이 엄마 한쪽 무릎에 누워 있으면 다른 한쪽 무릎을 베면 될 것을, 굳이 동생을 발로 밀쳐 내고 엄마의 양쪽 무릎을 차지했다. 동생 입에 들어가는 건 무엇이든 손가락을 후벼 파서 뺏어 먹었던 아주 강한 누나였다.

 

부정하려 해도 할 수 없는 것이, 내 기억으로도 나는 동생을 상당히 미워했다. 한 살 인생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이 아이는 나에게는 동생이 아니라 적이었으니까. 내 것을 빼앗겼다는 억울함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나를 더 괴팍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첫째라는 이유로 동생보다 늘 용돈도 많이 받았고, 부모님 등골도 더 많이 빼먹었음에도, 동생 것을 뺏지 못해서 안달이었던 걸 보면 말이다. 앞에서처럼 무조건적인 폭력을 행사하여 뺏은 적도 있었지만, 영악하게 뺏은 적도 많았다.

 

예를 들면 엄마가 나누어 먹으라고 준 간식이 있으면 똑같이 나누는 척하면서 현란한 손기술로 동생 것을 뺏는다든지, 동생이 간식을 저장해 놓는 곳을 알아 두었다가 동생이 자는 동안 몰래 훔친다든지 하는 식이었다.

 

한마디로 어린 시절, 동생과 똑같이 나눈다는 건 내 사전에 없었다. 무조건 내가 더 많이 소유해야 했다. 물론 부모님의 사랑을 차지해야 한다는 일종의 생존 본능이었겠지만, 상당히 극성맞긴 했다.

 


 

나는 돼도 남은 안 돼!

 

하지만 참 이율배반적이게도 내가 동생 것을 뺏는 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었으나, 남들이 내 동생 것을 뺏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성정이 순했던 동생은 자기보다 나이 많은 형들에게는 물론이고, 동생들에게도 뭐든 뺏기고 오는 아이였다.

 

울면서 들어오는 동생을 보면 혈연으로 맺어진 뜨거운 피가 솟구쳐 올라 곧바로 전투태세로 뛰쳐나가 도로 찾아왔다. 동생을 위해 1학년 주제에 6학년 오빠에게 달려들고, 동네에 유명한 호랑이 할머니에게 따박따박 달려들었던 일화는 몇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엄마의 단골 옛날 옛적에레퍼토리다.

 

그렇게 동생 것을 뺏고 뺏어 주던 어린 시절의 나는 나눔보다는 소유에 집착하는 아이였다. 변명하자면 그때는 어렸고, 소유한 것이 너무 없었으니까.

 


 

주님, 10%는 너무 센데요…

 

시간이 흘러 나는 성인이 되었고,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나눔이라는 것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성경에 나온 대로 십일조를 내려고 했지만, 10분의 1이라는 게 생각보다 많았다.

 

, 십일조 하면 사는 게 너무 힘든데! 다른 신자들은 어떻게 그렇게 선뜻 내어놓는 거지? 저는 아직 멀었습니다, 주님!’

 

시원하게 인정하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홀로 20분의 1 정도로 주님과 일방적인 합의를 본 채 살아가고 있다.

 


 

로또보다 어려운 상상

 

나처럼 겨우 이 한 몸 건사하며 근근이 버는 이들이 모이면 늘 나오는 단골 주제가 있다. 바로 로또. 어디가 로또 명당인지, 이번 당첨금이 얼마인지,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이야기하다 보면 이런 질문이 나온다.

 

너는 로또 당첨되면 뭐 할 거야?”

 

처음에는 즐거운 상상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정말 당첨이라도 된 것처럼 진지해지는 질문이다.

 

‘내가 만약 로또에 당첨된다면……

 

문득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자서전을 읽다가 알게 된 영화 <바베트의 만찬>이 떠오른다. 이 영화는 덴마크 감독 가브리엘 악셀Gabriel Axel1987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이자크 디네센Isak Dinesen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바베트는 여러 사정으로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는데, 그때 어느 작은 마을에 사는 마르티네와 필리파 자매가 그녀를 자신들의 집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한다. 그때부터 바베트는 자매의 집에서 가사를 도우며 살게 되는데, 어느 날 로또에 당첨되는 행운을 얻게 된다. 자매를 포함한 마을 사람들은 바베트가 당연히 마을을 떠날 거로 생각하지만, 바베트는 뜻밖의 결정을 내린다. 그동안 자신을 받아 준 자매와 동네 사람들을 위해 만찬을 준비하기로 한 것이다. 그것도 로또 당첨금 전부를 사용해서!

 

여기까지 봤을 때, 한 끼 식사에 그 많은 돈을 불사른다는 게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내 돈도 아닌데도, 실제 상황도 아닌데도 어찌나 아깝던지 화면 속 바베트를 붙잡아 말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이 만찬으로 분열했던 동네 사람들이 하나가 되고, 가난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모습을 보면, 조금도 아깝지 않은 나눔이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만찬이 끝난 뒤 바베트 역시 더없이 행복해하는데, 그 모습을 보면 나눔으로써 소유하게 되는 풍요로움이 저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이 영화를 보다 보면 식탁 장면이 많아서 그런가, 식탁에 모인 이들이 12명이라 그런가, 자연스럽게 최후의 만찬이 떠오른다. 예수님을 등에 업고 한자리 차지하려 하거나, 배움이 부족하거나, 다른 사람을 속여 재산을 불렸던 죄인이거나, 앞으로 예수님을 배신할 예정이거나, 아무리 봐도 자격 없는 이들이지만, 그런 제자들을 위해, 또 그보다 낫다고 할 수 없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몸과 피를 거저 내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 말이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5)

 

그 모습과 함께 주님의 이 말씀이 가슴을 둥둥 두드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둥둥거리는 가슴으로 다시 생각해 본다. 주님께서 내게 로또처럼 엄청난 소유를 허락하신다면, 나는 바베트처럼 전부를 내어놓을 수 있을까? 흠…… 다시 생각해 봐도 선뜻 결심이 서지 않는다.

 

일단, 주님! 로또 1등에 먼저 당첨시켜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면 그때 어떻게 할지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눔 DNA, 분명 있었는데…

 

아주 유명한 실험 중에 이런 것이 있다. 2세에서 4세 정도 되는 두 아이를 앉혀 놓고, 한 아이에게만 간식을 준다. 대부분 간식을 받은 아이는 처음에는 신나 하지만, 곧 간식을 받지 못한 아이를 의식하고는 자기 간식을 나누어 준다. 물론 어린 시절의 나처럼 혼자 홀라당 먹는 아이도 있긴 있다.

 

이 실험에서 알 수 있는 건 이것이다. 아직 제대로 말도 못 하는 아이가 친구와 간식을 나누는 것으로 보아, 인간은 학습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공감과 나눔 DNA’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간식의 양이 많고 적음도 상관없었다. 아이들은 많아도 절반을, 적어도 절반을 뚝 떼어 나누어 먹으며 행복해했다.

 

그런데 대체 이 나눔 DNA는 언제 사라지는 것일까? 오히려 학습하면서 사라지는 걸까? 아니면 성인이 되면 사라지는 걸까?

 

가끔 유명인이 기부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나도 그렇게 많이 벌면 기부하겠다. 그만큼 벌었으면 기부해야지.”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알고 있을 것이다. 돈이 많아도 내어놓기 쉽지 않다는 것을.

 

사람은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어진다. 소유는 소유를 낳는다. 내 몸 누일 곳만 있어도 좋을 것 같다가도 누일 곳이 생기면 더 넓은 집을 소유하고 싶다. 인터넷 쇼핑몰 옷으로도 만족하다가도 더 좋은 명품 옷을 입고 싶고, 중고차를 가지면 더 좋은 차를 갖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나눔도 나눔을 낳는 모양이다. 본가에 갈 때마다 우리 부모님은 집에 있는 치약까지 챙겨 넣어 주신다. 집안을 샅샅이 뒤져도 줄 게 없으면 시장에 가서 사서라도 내 손에 쥐여 주신다. 그런 걸 보면 나누면 나눌수록 더 나누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자 사랑인 듯하다.

 

나도 나누어 봤더라면 확신에 찬 표현을 썼을 텐데, 지금은 짐작하는 문장을 쓸 수밖에 없음이 안타깝다.

 


 

빵보다 마음에서 시작된 기적

 

네 개의 복음서에 모두 나와 있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면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먼저 물으신다.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저 많은 이를 먹이려면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

 

이 질문은 현실적인 상황을 확인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먼저 저들과 나눌 마음이 있는지를 물으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보고 저들을 다 먹이라고요? 저희가 그럴 돈이 어디 있습니까?”

 

칠색 팔색을 하던 제자들이 누군가가 내어놓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밀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으로 무려 오천 명을 먹이신다.

 

나눌 마음! 그 마음만 있다면 주님께서는 무엇이든 가능하게 해 주시고, 흘러넘치도록 채워 주신다는 것을 보여 주는 기적이 아닐지 생각한다. 기적이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모이는 일이라는 걸 말이다.

 

그래서 결국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작은 나눔도 엄청난 소유를 낳을 수는 있지만, 엄청난 소유가 꼭 엄청난 나눔을 낳지는 않는 법인가 보다. 그러니 잠자는 나눔 DNA’를 깨워 봐야겠다! 나에게 오병이어는 무엇일까?

 


 

은총도 나누면 커진다

 

책을 좋아해서 1년 정도 영적 독서 모임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누군가 이런 질문을 했다.

 

성모님께서는 잉태하신 후에 왜 엘리사벳을 찾아가셨을까?”

 

평소 엘리사벳과 마음속 이야기를 나누실 정도로 친하셔서? 엘리사벳도 임신했다는 것을 아시고 태교나 출산의 조언을 얻으시려고? 이런저런 추측이 난무한 가운데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께 받은 은총을 나누고 싶으셔서가 아닐까?”

 

정답은 성모님만이 아실 테지만, 우리는 그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살면서 하느님께 받은 은총이 너무 커서 가슴이 벅찬 순간이 있다. 이 벅참을 누군가와 나누면 함께 기뻐하고 함께 놀라워하며 하느님을 찬양하게 된다. 나와 같은 경험이 있는 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성모님께서는 주님께 받은 엄청난 은총을 엘리사벳과 나누고 싶지 않으셨을까? 성경에서도 주님의 은총을 체험한 성모님과 엘리사벳, 두 여인과 태중의 아이는 기쁨에 넘쳤다고 하지 않는가(루카 1,39-56 참조)!

 

꼭 기쁨만이 아니라 슬픔을 나눌 때도 주님의 은총과 사랑은 커진다. 성서모임에서는 성경 말씀을 읽고 그 내용을 공부하기도 하지만,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주님의 메시지와 연결하여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시간이 있다. 그걸 흔히 나눔이라고 한다.

 

성서모임뿐 아니라 꾸르실료에서는 팀 회합을 통해 자신의 신앙 이야기를 나누고, 포콜라레에서는 생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자신의 경험을 나눈다. 예비자 모임에서도 그날의 교리 내용과 연관된 질문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다. 이외에도 내가 모르는 다른 공동체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아마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왜 교회 공동체에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게 할까?

 


 

비웠는데 왜 더 차오를까?

 

알고 지낸 지 얼마 안 된 사람에게, 심지어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나의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때, 나도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어려웠다. 심지어 화까지 났다. 그래서 그럴 때마다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적당한 이야기를 골라 나누기도 했었다.

 

하지만 희한한 것은 그렇게 나눔을 하면 스스로가 찜찜함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뭐랄까? 삼겹살을 먹고 볶음밥을 안 먹고 온 느낌? 며칠 집을 비우는데 가스불을 확인하지 않은 느낌? 씻으려고 비누칠했는데 물이 안 나오는 느낌? 아니, 그보다 더한 찝찝함이다.

 

반면에 진짜 내 마음과 내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는 내가 바뀌고, 내가 치유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상처를 나눔으로써 막혔던 가슴이 뚫리는 느낌이 들고, 풀리지 않았던 문제가 해결되는 기분이 든다.

 

게다가 나의 나눔으로 용기를 냈다거나 위로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때는 가슴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무언가가 뭉클하게 수면 위로 떠올라 날아가는 느낌이다.

 

나누면 비워져야 하는데 오히려 채워지는 이 경험은 기쁨뿐 아니라 아픔마저도 나눌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눌 수 있는 것은 물질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채우기 위해, 또 다른 이를 채우기 위해, 또 하느님 은총의 무한한 넘침을 위해 나를 나누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자주 나누는 것 가운데 하나는 시간과 에너지다.

 

누군가가 바쁘다고 할 때 대신해 주는 것, 봉사 자리가 부족하다고 할 때 손을 드는 것! 그런 것들이 내가 할 수 있는 오병이어, 나눔이다! 나눈다고 나누는데 더 많이 받고 더 채워져서 나눔이라 하기에 민망하지만 말이다.

 


 

선先 나눔, 후後 소유

 

마지막으로 소유와 나눔을 주제로 글을 쓰다 보니 순서가 어쩐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소유하면 나누는 것이 아니라, 나누면 소유하게 되니 선先 나눔, 후後 소유가 맞겠다 싶다.

 

어머! 그러고 보니 지금도 그렇네! 이렇게 글을 나누니 희미한 깨달음을 소유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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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공연, 연극, 뮤지컬, 애니메이션, 수필 등 다양한 콘텐츠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현재 '가톨릭방송작가모임' 대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로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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