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핵심에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있다. 예를 들어, 한 신문사 안에서도 원고지에 기사를 작성하는 기자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즉시 간단한 설명을 덧붙여 기사를 작성하고, 동시에 인터뷰한 내용을 동영상으로 촬영해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SNS)에 올리는 기자가 공존한다. 정말 짧은 시간 안에 예상치 못한 기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 이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처음에는 젊은이들의 점유물로 여겨졌던 유튜브도 이제는 수백만 팔로워를 가진 어르신 유튜버들이 활발히 활동한다. 또한, 인공 지능(Al)은 산업 전반에 변화와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AI는 복잡한 문제에 대한 해결 능력을 보여 주며, ‘자동화’와 ‘지능화’를 통해 시스템의 생산성을 높이고 ‘개인화’를 통해 사용자 경험을 개선해 나가고 있다(* M. Zhang, 2023 참조).
전 세대에 걸쳐 인터넷과 모바일 기술의 발전으로 소셜 미디어는 우리 일상에 필수적인 디지털 도구가 되었다. 소셜 미디어는 사람들 사이의 연결과 소통을 돕고, 우리는 이를 통해 가족, 친구, 동료와 사진과 동영상을 주고받으며 소식을 전하고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새로운 사람들과도 관계를 맺어 나갈 수 있으며, 실시간 뉴스와 정보 공유의 공간으로 활용되며, 상품이나 서비스의 마케팅 도구로도 점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미래연구> 8권 1호, <생성형 AI와 소셜네크워크 서비스의 융합(AI-SNS)>, 방준성 참조).
여러 조사 기관에 따르면 TV보다 스마트폰을 이용한 유튜브 시청 시간이 점점 더 많아지는 추세이다. 당장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책을 보는 사람은 “심봤다!” 할 정도로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대부분 스마트폰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시대에 영성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면서 소셜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과 쉽게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지만, 동시에 사람들 사이에서 소외감과 허전함을 느끼는 이들은 점점 더 많아진다. 곧 다가올 미래의 가장 큰 정신적인 문제로 ‘소외감’과 ‘고독감’을 꼽았던 옛 철학자의 지혜가 존경스럽다. 만남과 관계도 다양해지지만, 보통 사람들이 마음속에 느끼는 행복감이나 안정감은 점점 사라지는 듯하다. 그래서 ‘소통Communication’이란 단어가 자주 사용되지만, 가정 내에서도 부부 사이에, 부모와 자녀 간의 소통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주말에 식당에서 아무 말 없이 밥만 먹는 한 부부와 자녀들을 보면, ‘100% 가족’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가족들이 각자 방에서 문자로 소통하는 세상 속에서, 영성이 설 자리는 어디인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사람들은 외롭고 고독할수록 영성에 대해 관심이 깊어지고, 영성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어 한다.
영성, 삶을 풍요롭게 하는 개념
흔히 영성靈性이라고 하면 유럽의 고풍스러운 수도원을 떠올릴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일반 사람들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한 영역이나 고상한 무엇을 상상하기도 한다. 나 역시 신학생 시절, “과연 나처럼 소심하고 감성적인 사람이 영적인 삶에 투신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그때 영성 지도 신부님께서 “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죄인입니다. 일어서고 또 쓰러지겠지만 일어서려고만 노력한다면 주님이 손을 내밀어 주실 것입니다.”라는 말씀을 하셨고, 그 말씀에서 큰 위로를 받았다.
사제가 된 후, 본당 주임 신부로 사목하면서 약 4년 동안 신학생들을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영성 지도 신부로 활동한 적이 있다. 신학생들과 만나며 소소한 일상 이야기부터 성소에 대한 고민 등 폭넓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때 특히 완벽주의형(?) 신학생들은 자신이 늘 부족하다며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그때마다 바오로 서간에서 읽은 달리기에 관한 비유를 이야기하곤 했다. “우리 인생을 오래달리기, 혹은 마라톤에 비유할 수 있는데 초보 달리기 선수인 우리가 어떻게 끝까지 같은 속도로 빠르게 달리며 결승점에 도달할 수 있겠어. 오르는 고갯길에서는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고, 너무 지치면 쓰러질 수도 있지. 중요한 것은 잠시 쉬었다가 최선을 다해 다시 달리는 것뿐이야.” 신학생들이 이 이야기에 얼마나 공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 담당했던 수십 명의 신학생들은 모두 중견 신부가 되어 각자의 사목을 잘 수행하고 있으며, 일부는 신학교를 떠나서도 사회생활을 잘하고 있어 기특하게 생각한다.
‘영성Spirituality’의 사전적 정의는 ‘신령한 품성이나 성질’이다. 여기서 신령하다는 것은 ‘인간의 지혜로는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신기하고 영묘한 데가 있다.’라는 뜻이고, 품성은 ‘사람의 타고난 성품’을 의미한다. 이 사전적 의미에서도 그리스도교 영성의 신앙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앞부분에서는 신적 존재로서의 예수를 만날 수 있고, 뒷부분에서는 인간이 되신 예수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타고난 성품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암시도 포함되어 있다. ‘애초에 나는 신령한 품성이나 기질이 없는데, 나 같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걱정을 할 수 있지만, 다행히 영적인 성장은 노력과 훈련으로 가능하다.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대 초부터 ‘영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영성이란 말을 여러 분야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지금 내가 일하는 곳도 ‘영성심리상담 교육원’이다. 일반적으로 ‘심리상담’ 하면 이해하기 쉽지만, 영성이 붙으면 복잡하고 어려운 느낌이 든다. 과거에는 영성이란 말 대신에 고전적이고 정적인 의미로 ‘신비神祕’ 또는 ‘신비주의’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했다. 영성은 영혼이나 자신과의 내면적인 관계, 내적이고 영적인 생활을 성숙하고 풍성하게 하는 삶을 의미한다. 또한 영혼이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현대 사회를 영성의 시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보통 사람들은 영성이라 하면, 종교와 연관 지어 생각한다. 그러나 영성은 항상 종교와 일치하지 않으며, 종교라는 범주에 제한되지도 않는다. 엄밀히 따지면 불교의 영성, 이슬람의 영성이라고 종교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지만, 비움의 영성, 만남의 영성, 지도자의 영성 등 생활 전반에 거쳐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영성’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성경에서는 영성이 ‘인간 삶의 현장인 이 세상과의 연관 속에서 계속되는 인간의 총체적 체험의 의미를 명상과 성찰을 통해 살펴보는 추구’로 설명된다. 그리스도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신앙 체험이나 하느님 체험이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증거가 되는 모습을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성 생활에서 위험도 있다. 가장 큰 위험은 어떤 신념이나 일련의 행동에 일방적으로 집착하여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유익에 삶의 기준을 두었을 때 발생한다. 이단을 구별할 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성경의 자의적 해석이나 개인 숭배 등이며, 마지막 단계에는 예외 없이 재물, 즉 돈이 존재한다. 이러한 위험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