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화목한’ 일주일은 이러하다. 화요일 아침은 늦게까지 푹 잔다. 새벽 미사가 없는 날이다. 아점을 잘 챙겨 먹고 근처 숲으로 달리기하러 나간다. 목요일도 그렇게 한다.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 화요일과 목요일에 이렇게 하는 것은 몸과 마음의 화목을 챙기는 나의 루틴이다.
예전에 대구에서 가장 큰 성당 보좌 신부로 일할 때였다. 주일 미사가 여덟 대였는데 내가 주례를 맡은 미사 세 대 외에도 다른 모든 미사에서 성체 분배를 해야 했다. 말 그대로 주일은 파김치가 되는 날이었다. 잠시 쉬는 시간이면 사제관 소파에 앉아 TV 리모컨을 무심결에 누르면서 바뀌는 장면을 초점 없는 눈으로 보았던 기억이 난다.
스트레스와 과다한 업무, 불규칙적이고 건강하지 못한 식습관, 충분히 못 자는 현대인들은 쉬면서도 쉬지 못한다. 그저 생각 없이 TV 채널이나 유튜브, 인터넷 숏폼을 넘기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래서 과도한 자극이라야 관심을 끄는 것인지도 모른다. 살아 있으려면 무언가를 느낄 수 있어야 하는데 몸이 건강하지 못하면 그럴 수 없다.
“삶은 움직임에서 만들어지며 삶의 본질은 움직임에 있다.”(아리스토텔레스)
건강한 움직임이 절실한 시대다. 많은 사람이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건강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몸과 마음, 일과 휴식의 균형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는 것 같다. 사람이 기계가 아닌 이상 에너지를 쓰면 언제나 보충해야 하는데 나에게 그날은 달리기하는 ‘화목한’ 날이다.
내가 좋아하는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가로서 한없이 개인적인 직업에 완벽하게 맞추어 살아가기 위해 매일 달린다.
“매일 달린다는 것은 나에게 생명선과 같은 것으로,
바쁘다는 핑계로 인해 건너뛰거나 그만둘 수는 없다.
만약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달리는 연습을 중지한다면
틀림없이 평생 달릴 수 없게 될 것이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
사제 생활도 그와 같아 영적인 삶을 잘 유지하기 위한 육체적 단련이 꼭 필요하다. 하루키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자신의 혼돈마저도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것을 충실하고 성실하게 언어화하는 데 필요한 것은 과묵한 집중력이며, 좌절하는 일 없는 지속력이며, 견고하게 제도화된 의식,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러한 자질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데 필요한 체력이다.
나에게 사제직은 직업이 아니기에 더 치열한 집중력과 지속력, 의식, 그리고 체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나의 삶 전체가 바로 내가 누구인지 말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달리러 가는 숲을 말하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만나고 위로받을 장소가 필요하다. 자연을 사랑하는 나는 숲의 고요 속에 평화를 맛보며 숨을 깊게 쉬고 땀을 흘리며 ‘살아 있는’ 사람이 되어 달린다. 그래서 숲은 나만의 공간인 ‘리틀 포레스트(Little Forest)’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인생에서 가장 긴 여행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신영복 선생은 《담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또 하나의 가장 먼 여행이 남아 있습니다.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 그것입니다.
발은 여럿이 함께 만드는 삶의 현장입니다.
수많은 나무들이 공존하는 숲입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가슴에서 다시 발까지의 여행이 우리의 삶입니다.
머리 좋은 사람이 마음 좋은 사람만 못하고,
마음 좋은 사람이 발 좋은 사람만 못합니다.”
나는 오늘도 ‘화목한’ 나와 만나고자 운동화 끈을 매고 숲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