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상징
아주 오래전, 주일 학교 선생님이 나누어 주던 예쁜 부활 달걀이 떠오른다. 한 번에 먹기가 아까워 전축 위에 장식해 두었다가 며칠 후 껍질을 깠는데 그만 썩어 버려 아쉬워하며 버렸던 일도 있다. 부활절이 되면 신자들은 달걀을 예쁘게 장식해서 주고받는다. 달걀은 죽은 듯이 보이지만 그 안에 생명이 숨 쉬고 있는 특징 때문에 부활의 상징 중의 하나였다. 그뿐만 아니라 얼어붙은 겨울 뒤에 오는 봄이나 풍요의 상징이기도 했다. 부활절에 달걀을 주고받는 풍습은 중세 때부터 시작됐다. 사순절 동안 고기와 달걀을 먹을 수 없었던 신자들은 부활절에 달걀을 주고받았다. 오늘날 부활 달걀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 부활의 상징이며, 세상에 부활의 기쁜 소식을 알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기쁨의 부활 시기
주님의 수난과 부활의 파스카 3일은 전례 주년의 정점을 이룬다. 본래 부활절은 구약의 파스카 축제와 연결된다. 유다인들은 음력으로 계산하여 초봄의 만월인 니산(Nisan)달의 14일을 파스카 축제일로 지냈고 동방교회도 이를 따랐다. 서방교회는 니산달의 14일이 아니라 그다음 날인 일요일을 부활절로 지냈다. 성 빅토리오(St. Victor, 189∼199) 1세 교황은 춘분이 지나고 만월이 되면서 맞이하는 첫 주일을 부활절로 지내도록 했다. 교회는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의 50일을 부활 시기로 보낸다. 그러니 은총의 부활 시기는 ‘성령 강림 대축일’로 끝맺는 것이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부활을 기념하여 새 옷을 입고 부활 달걀, 부활 과자 등을 주고받으며 기쁨을 나누었다.
절망 속에서 꽃피운 희망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심리학자 빅토르 프랑클은 오늘날 가장 무서운 절망은 삶의 가치를 상실하는 것이라 했다. 문화와 물질 문명의 발달로 의식주는 더 풍족해졌지만, 오히려 삶의 가치를 잃고 육체적 쾌락과 술과 마약에 빠져 방황하는 사람은 늘었다.
빅토르 프랑클 박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유다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용되어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겪게 된다. 고통 속에서 그는 짐승 취급을 받느니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자기 삶 어디에서도 가치를 발견할 수 없었다. 삶의 목적도 의미도 없이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로 아내를 다시 만나 못다 한 사랑을 하는 것이었다. 그 생각이 숱한 괴로움과 슬픔을 견디는 힘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아내를 만나지 못했다. 그의 아내는 이미 죽고 없었다. 그런데 그는 처절한 삶의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된다. 삶의 목적과 존재 의미를 다시 깨닫게 된 것이다. 오늘날 그의 체험과 연구, 여러 저서가 많은 이에게 희망과 도움을 주고 있다.
인간 회복의 길
인생을 긴 여행으로 비유할 때가 많다. 인생이라는 긴 여행은 때로는 절망과 실패를 보여 주고, 때로는 희망과 기쁨을 맛보게 한다. 우리는 삶의 목표와 희망을 잃었을 때 방황한다. 지금까지 추구해 온 인생의 목표가 한 번에 무너질 때의 참담한 심정은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삶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이 그분의 죽음 앞에서 느꼈을 실망감은 얼마나 컸을까? 그래서 도망치듯 떠난 제자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은 잃었던 삶의 목표와 의미를 회복했음을 의미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수없이 많은 갈등과 방황을 경험한다. 우리가 본래 모습으로 회복하는 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기심, 인본주의, 욕심, 죄 등에 물들어 있다면 주님을 제대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먼저 주님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본래의 우리 모습과 자리로 돌아가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고난을 이겨 낼 힘
에릭 클랩튼(1945~)이라는 영국 음악가는 1960년대에 세계적으로 뛰어난 기타 연주자로 손꼽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얻은 인기와 명성은 그를 마약과 방종으로 타락하게 했다. 또 그의 유일한 기쁨이던 아들마저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아파트의 베란다에서 추락사하고 만다. 그는 자살 충동을 느끼면서도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천국의 눈물(Tears in Heaven)’이라는 노래를 작곡한다. 아들에 대한 애정을 담은 슬픈 곡이다. 그는 마약과 타락으로 물들었던 자신의 어두운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에게 힘을 주십시오(Give me strength)’라는 노래도 만들었다. 이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나에게 힘을 주십시오 / 당신이 가지신 / 주님 부디 힘을 주십시오 / 그 힘을 주십시오 / 세상을 살아갈 나는 / 아마도 너무 덧없이 살았나 봐요 / 그래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나 봐요 / 그러니 주님 힘을 주세요 / 이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 오, 주님! 힘을 주소서
에릭 클랩튼은 마약과 타락, 아들을 잃어버린 절망과 고뇌 속에서도 주님께 힘을 달라고 기도했다. 술과 마약의 중독을 인간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벗어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주님과의 만남이야말로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었다.
실패 속에서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
부활은 바로 이런 것이다. 주님이야말로 우리에게 생명의 힘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임을 믿는 것, 그리고 주님을 통해서 죽음의 절망에서도 힘을 얻을 수 있다고 고백하는 일이다.
주님의 부활, 그 믿음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힘을 얻는다. 부활의 믿음으로 우리는 지금 힘들고 어려워도 희망할 수 있다. 무엇이 우리를 지탱해 주는지, 무엇이 우리를 어둠의 사슬에서 풀어 주고, 누가 우리를 죽음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주님 부활 대축일’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다시 일어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사람들은 연말연시가 되면 크리스마스를 크게 준비하지만, 사실 그리스도교 축일 중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축일은 ‘주님 부활 대축일’이다. 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과 하느님의 완전한 구원 사업을 완성하신 날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되찾아 주셨다.
부활의 증거
‘예수께서 죽음을 넘어서 살아 계시다.’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예수님의 죽음으로 실망하던 제자들이 불과 며칠 사이에 완전히 태도를 바꾸어 예수님의 부활을 용감하게 선포했다. 이것은 어떤 큰 사건이 없이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사태다. 만일 그들이 살아 계신 예수님을 체험하지 않았다면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나서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체험한 부활은 초자연적 사건이다. 부활은 하느님이 개입하신 행위이다. 예수님께서 천상 세계에 계신다는 것을 뜻하며 이는 인간의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복음사가들은 복음서를 끝맺으면서 부활에 대한 첫 증인들의 체험, 즉 빈 무덤 이야기와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초대 교회는 빈 무덤의 발견 사실을 알면서도(사도 2,25-32 참조) 강조하지 않았고, 나아가 예수님의 발현보다 사도들의 증언에 역점을 두었다. 이에 부활 증인들의 명단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바로 성경에서 언급하는 베드로와 제자들, 부활을 목격한 여자들이다.
체험과 증언
이는 부활의 내용을 밝히는 데 있어서 필수 요건이다. 이 체험은 주로 예수님의 발현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이 체험은 표징에 불과하다. 부활은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그분이 남기신 언행을 통해 드러났다(요한 2,22 참조).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 부르시며, 당신의 훗날을 맡기셨으니, 이로써도 부활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언행을 전수하는 첫 증인들의 역할도 결정적인 요건이다(사도 1,21-22). 그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도 부활 내용을 전한다. 구약 성경은 하느님께서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는 사실과 그 방법을 알려 주고 있으며,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를 골고루 인용하였다.
무덤이 비어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증명한다고 결론짓는 일은 금물이다. 그러나 이는 부활의 신비를 암시해 주는 표징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발현 시기와 장소 문제는 제쳐 놓더라도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전승 자료와 체험 이야기는 다양하다. 그러나 이 전승들에 공통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증인이 예수님을 봤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여러 차례에 걸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5-7)라는 이야기다. ‘나타나다’라는 말은 성경의 표현이며 환상이나 환각이 아니다. 증인들 앞에 살아 계신 예수님이 나타나셨더라도 하느님께서 주신 신앙과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하시던 말씀 없이는, 인간으로서 그 신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생의 위기에서 구원의 길 찾기
인생 여정에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다. 특히 청년기를 지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마치 사춘기처럼 혼란기를 겪는다. 그래서 중년과 노년에도 교육이 필요하다. 나이가 들어 가면 너무나 자명하게 받아들여지는 것들에 의혹과 의심이 생기며 혼란에 빠진다. 어떤 이들은 존재론적인 위기에 봉착하기도 한다. 육체나 심리적인 문제뿐 아니라 전 존재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삶 전체의 의미에 대한 문제이다. 이것은 분명히 위기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자신의 의미는 무엇인가?
인간은 무언가를 분명하게 손에 넣고 소유하려고 한다. 하느님께도 자신의 힘으로, 노력으로 도달하려고 한다. 기도, 선행, 희생. 봉사를 통해서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의 가장 깊은 내적 심연, 자신의 깊은 내면에는 어떤 행동을 통해서 도달되는 것이 아니다. 마치 부자 청년이 구원을 행동으로 성취하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느님께 온전히 내려놓기
새 옷을 입으려면 먼저 옷을 벗어야 한다. 영적 부활의 시작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위기로부터 도망치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을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많은 경우 자신의 불만을 외부로부터 해결하려고 한다. 또한 지금의 편안한 상황에 안주하려고 한다. 멈추어 서는 것이다. 때로는 전통이나 원칙을 고수하려는 것이라 변명한다. 그러나 진실은 자신이 가장 잘 안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자신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으며, 자신이 이룬 것들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에 발을 내딛지 못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내면의 문제이며, 자신 안에 해결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자아 인식이라는 문제, 자신과 마주 서는 것, 마치 혼자 서 있는 듯한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
자신의 내면, 밑바닥까지 들어가 보자. 거기에는 부정적인 요소가 있다. 어두움, 비겁함, 적당히 지나쳤던 우리의 본모습을 마주하자. 적나라한 나의 모습, 공허와 외로움, 지극한 소외감 속에서 자신을 마주해야 한다. 이상하게도 하느님은 이런 방법을 택하신다. 그리고 내맡기길 원하신다. 내맡김이란 자기부정이나 자기포기와는 다르다. 하느님께로 전진하는 것이며 집착을 놓는 것이다. 하느님께 내려놓는다는 것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단순해지는 것이다. 고통과 궁지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기다리는 믿음의 단계를 의미한다. 이제는 하느님께로 손을 들어야 한다. 온전히 힘을 빼고 하느님께로 투항하자.
《부활》, 예술적 성경이자 신앙 고백서
대문호 톨스토이(1828~1910)는 일흔 살이 넘은 노년에 그의 걸작품인 《부활》을 썼다. 이 작품은 한 명의 귀족과 창녀의 영혼이 부활하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어느 날 재판소의 배심원으로 나온 주인공 네흘류도프 공작은 살인과 절도의 혐의로 재판을 받는 까츄샤를 만난다. 그리고 주인공이 청년 시절에 만났던 까츄샤가 타락하게 된 원인이 자신의 무책임한 행동에 있음을 깨닫는다. 그는 까츄샤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귀족사회에 속한 자기 삶에 깊은 의구심을 갖는다. 까츄샤의 감형을 위하여 감옥에 드나들면서 무고한 죄인들을 발견하고 그에 대한 냉혹하고 불합리한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귀족인 주인공이 까츄샤라는 한 창녀를 따라 괴로운 시베리아 유형을 자청하여 시베리아의 황막한 벽지에서 끝없이 바라던 용서의 정신으로 영혼의 부활을 발견한다는 것이 부활의 줄거리이다.
《부활》은 톨스토이의 예술적 성경이며 신앙 고백서다. 톨스토이는 당대의 최고 문인으로 존경받고 엄청난 부를 누렸음에도 인생을 비관해 여러 번 자살을 기도했다. 그러다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고 믿음 안에서 《부활》이라는 대작을 남긴 것이다.
부활의 의미
교회는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를 부활시키셨다.’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며, 예수님 스스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일으켜 주셨다고 표현한다. 부활은 그리스도 신자들의 신앙의 원천이며 핵심이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주님이 가르친 모든 말씀과 가르침, 복음도 헛된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 인생은 부조리와 모순만이 있을 뿐이며, 인간 삶의 종말은 멸망과 죽음뿐이다.
그분은 새로운 형태로, 새로운 차원을 유지하면서 우리를 다시 찾아 주셨다(마태 28,20 참조). 바오로 사도는 믿는 이들의 부활 문제를 언급할 때마다(1테살 4,13-18 참조) 부활한 몸의 실재성과 몸의 변화를 강조한다.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필립 2,9)라는 구절에서 드높이 올리셨다는 말과 가장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다는 표현들은, 실제로 예수님의 신성을 말하고 있다. 초기 교회는 예수님의 신성을 고백하기 위하여 하느님께 국한되었던 주님이란 존칭을 예수님께 그대로 적용하였다(1코린 1,2-3). 하느님의 아드님은 신성에 따라 영원토록 계시고, 인간이 되신 순간부터는 신성과 인간성에 따라 사셨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죽음으로 인하여 파괴되었던 인간성을 부활로 되찾으셨기에 이제 두 본성에 따라 한 주체로 살아 계신다.
믿음과 확신으로 선포하는 부활
부활 신앙은 그리스도교 믿음의 핵심이다. 물론 이것을 유다인의 묵시 문학적 배경 속에서 죽은 자의 부활이 하느님의 전능으로 완성될 종말의 사건이라는 견지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 유다인들은 세상의 종말에 죽은 자들이 부활하리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 역사의 종말에나 가서 이루어질 죽은 자의 부활이 바로 이 자리에서, 예수님 안에서 앞당겨져 이루어졌음을 선포한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부활을 선포하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의 기초를 역설한다. 베드로와 바오로,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였으며, 그 부활한 사람 중 첫 번째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그들이 부활한 예수님을 실제로 만나거나 체험하지 않았다면 그와 같은 믿음과 확신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전파하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의 희생적인 죽음이 참된 가치이며, 인간의 불의한 행동에 대한 하느님의 정의를 나타낸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지만, 그것은 하느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한 대속적 죽음이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 죽음의 참된 가치를 확인시켜 주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처럼 죽은 자의 부활이 있기에,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 의식을 갖고 용기를 얻는다고 말했다(1코린 15,30-32 참조).
지금 살아 계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에 대한 희망이며 보증이다(1코린 15,20-22 참조). 예수님께서는 종말에나 이루어질 부활을 완성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이 바라는 희망적 요소들의 완성이며, 그 희망의 실현 가능성을 보게 하는 참된 요인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께서는 부활해서 지금 살아 계신다는 것이다.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부활한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사도 24,15 참조). 만약에 예수님께서 단순히 우리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신 거라면 부활의 사건은 의미가 없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는 더 이상 죽음 아래 있지 않고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거칠고 상처가 있다고 해도, 믿음 안에서 주님과 같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해 새로운 하늘과 새 땅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