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의 한 대학에 초청받았다. 내 단편을 튀르키예어로 옮기는 세미나를 학생들이 한 학기 동안 진행하고, 마지막에 작가와 대화하는 형식이었다. <보통의 시절>이라는 제목을 지닌 그 단편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성탄절에 가족들이 만나는 건 나쁘다. 사 년 만이라면 더 그렇다.”
타인에 대한 용서의 문제를 다루는 이 소설이 외국 학생들에게는 어떻게 읽혔을까, 초청을 받은 날부터 기다렸다.
그런데 방문하기 이주 전쯤, 대학의 교수님이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초대하셨다. 외국을 돌아다니기는 했어도 저녁 식사에 초대받은 것은 처음이라, 기쁘고 더 나아가 놀라웠다. 그런데 그때부터 걱정이 시작되었다. 튀르키예는 내게 이슬람 국가로 기억되었기 때문이다. 식전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강연 일정은 사흘로 잡혀 있는데, 나는 앞뒤 며칠을 여행으로 잡아 둔 차였다. 그렇다면 혹시 식당에서 식전 기도를 하다가 불미스러운 일을 당하지는 않을까. 여행 짐을 싸는 동안에도 계속되던 그 막연한 불안감을 안고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이스탄불은 단 하루 둘러볼 시간이 있었다.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이슬람 문화가 융합된 이곳은 마치 인간 역사의 거대한 기록장 같았다.
튀르키예는 고양이 천국으로 동물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아주 중대한 범죄라고 한다.
정말 여행만을 위해 왔다면 평소처럼 천천히 하루에 한두 군데의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만으로 여정을 짰겠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신간을 낸 터라 내내 정신이 없어 공항에 내린 나는 당장 호텔에 어떻게 가야 할지도 막막한 상황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불필요하게 비쌌던) 밴을 불러 겨우 호텔에 도착했다. 빡빡한 일정에도 이스탄불을 들른 건 아야 소피아 성당 때문이었다.
성당은 537년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건축되었고 마치 하늘을 떠받치는 듯한 돔 구조로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 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선정된 매우 중요한 건물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중심이 되었음을 기억하게 하는 성당이고 이후 역사적 변화를 겪으며 때론 그리스도교의 분열을, 쇠락을, 그에 따른 파괴와 재건을 모두 보여 주는 성당이었다.
다음 날 나는 미리 예약해 둔 가이드 투어를 떠났다. 그런 몰아보기 스타일의 관광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무런 준비도 못한 ‘혼여’ 여행자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였다. 하지만 아야 소피아 성당을 보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유적지를 봐야 했다. 술탄의 호화로운 궁전과 고대의 지하 수도 시설과 모스크와 또 다른 모스크. 물론 그것들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긴 비행으로 지쳐 있던 내게 대체 아야 소피아 성당은 언제 보는가 하는 조바심이 일었다는 것이다.
오후가 되어 드디어 아야 소피아 성당 앞에 도착했는데 가이드는 내 기대와 달리 그 앞을 ‘지나가기만’ 했다. 최근에 튀르키예 정부에서 관광객들에게 높은 입장료를 받기 시작해 원한다면 나중에 개인적으로 둘러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아연해졌지만 그냥 말없이 가이드를 따라 또 다른 궁전과 잔혹한 전쟁 무기들을 둘러보았다. 체력은 점점 떨어졌고 나는 이러다 정작 성당 안을 못 보면 어쩌나 더더욱 초조해졌다. 그 뒤 가이드가 이번에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다이아몬드를 보러 가자고 했을 때 투어에서 빠지겠다고 이야기했다. 가이드 투어의 특성상 입장료를 이미 모두 낸 상태였지만 지금 86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문제가 아니었다.
아야 소피아 성당의 외관. 성당은 지금도 보수되고 있었다.
성당은 2층만 개방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1층에도 관광객 입장을 허용해 정성스레 기도를 올리는 무슬림들과 그리스도인으로서 이곳을 벅찬 감동으로 찾은 이들이 자연스레 섞였다고 하는데, 그런 아름다운 풍경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성당으로 가려면 히잡이나 스카프를 머리에 써야 했다. 돈을 받고 대여도 해 준다고 했지만 왠지 하나쯤 사고 싶었다. 가게로 들어가니 튀르키예 청년들이 나를 맞았다. 이미 한국인 관광객들이 스카프를 고르고 있었다. 그들이 몇 개를 골라 착용해 보더니 청년들에게 어떤 게 가장 어울리냐고 물었는데, 반응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얘네들은 왜 이렇게 적극적이지가 않아, 물건 팔기 싫은가.” 하고 한국어로 말했다. 민망해진 나는 얼른 흰 스카프를 집어 목에 대충 친친 감았다. 미사포와 닮은 그 색이 가장 낫게 느껴졌다.
“제가 해 드려도 될까요?”
그때 한 청년이 영어로 말을 걸었고 나는 스카프를 내밀었다. 청년은 스카프를 반으로 정성스레 접었고 이마에 가운데가 오게 한 다음 모양을 잡아 주었다. 아주 빠르게 별다른 기술 없이 둘러줬는데도 모양은 예쁘게 잡혔다. 거울 안에 비친 내 모습을 잠깐 보다가 이걸로 하겠다며 스카프를 풀고 신용 카드를 내밀었는데, 그 순간 어차피 살 거라면 왜 풀어 버렸는가 싶어 아, 하고 깊이 한숨을 쉬었다. 그 정도로 낙담한 건 내가 지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걸음 수를 나중에 호텔에서 확인했을 때 2만 2천보를 기록하고 있었으니까.
“괜찮으면 다시 해 줄게요.”
고맙다고 하자 청년은 “아니에요. 이게 내가 할 일이에요.” 하고 답했다.
이 성당은 로마 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공인되었다는 가장 화려한 선언이기도 했다. 보좌에 앉아 계신 예수님과 콘스탄티누스 9세(왼쪽) 그리고 조이(Zoe) 황후(오른쪽).
성당 입구는 점토를 구워 만든 테라코타 벽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관광객들에게 허용된 이른바 ‘테라스’로 들어가자 중앙 돔의 창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바닥에서 꼭대기까지는 55.6미터이고 그것은 신의 위엄을 나타낸다고 오디오 가이드에서 설명했다. 웅장하고 압도적인 높이였지만 그보다는 돔의 상부에 난 작은 창들, 그 창을 뚫고 들어와 곧 가뭇없이 사라져 버리는 저 흰 빛이야말로 하느님의 위엄이 아닐까. 네 모서리의 펜던티브에는 네 명의 천사, 세라핌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펜던티브가 돔의 하중을 나누기 위해 설치된 구조라는 점에서 하느님을 돕는 천사들이 머물 만한 곳으로 적당했다.
그렇게 지붕에서 바닥으로 내려오면 짙은 녹색의 카펫이 깔려 있었고, 무슬림들은 기도하거나 아이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2020년까지만 해도 보고 밟아볼 수 있었던 비잔틴 시대 대리석은 이제 테라스에서의 관망만 가능했다.
아야 소피아 성당은 거대한 돔 구조로, 이는 하느님의 천상 세계를 감동적이고 위엄 있게 보여 주려는 의도였다. 삼각기둥에 천사 세라핌의 모습이 보인다.
그래도 나는 가능한 오랜 시간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거기에는 인간의 아주 오랜 마음이 기록되어 있었다. 믿음과 흠숭, 존경과 숭배, 아주 많은 단어로 그 마음의 역정은 표현되겠지만 결국 그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자꾸만 닦아 보는 마음 아닌가. 세상의 숨은 진리를 찾고 자기 삶을 성스러움의 세계에 맞추어 보려는 발심 아닌가. 우리는 인간이기에 결국 완벽히 성공하지 못하지만 그런 불완전함을 사랑한 끝에 여태껏 살아남은 매우 이례적인 존재들 아닌가. 불완전함이 우리의 약점으로만 기능했다면 1층이든, 테라스든, 모자이크에 새겨진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님의 모습 또한 파괴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야 소피아 성당은 남아 있고 지금도 튀르키예 정부는 계속 보수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1,500년을 견딘 고성당의 테라스를 천천히 걸었고, 현재 가장 대립적인 종교가 6월의 한낮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이 순간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기도했다.
* 다음 화에 계속 이어집니다.
사진 © 김금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