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루의 루틴을 지키는 편이다. 오전에 눈을 뜨자마자 간단한 아침을 먹고 카페로 글을 쓰러 나간다. 9시 전에 카페에 도착할 수 있으면 가장 좋고 10시쯤 되면 마음이 급해진다. 점심시간이 되어 직장인들이 쏟아져 나오면 적당히 눈치를 봐서 자리를 피해 주어야 하니까. 벌써 6년 동안 한 카페에서 오전 작업을 시작하고 있고, 그사이에 일하는 사람들도 무수히 바뀌었다. 그대로인 건 카페 건물과 사장님뿐이다. 그리고 오전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늘 뭔가 아련한 표정의 소설가 한 명.
2월에 이사하기 전에는 서울에서도 복잡하기로 손꼽히는 오거리를 통과해야 카페에 도착했다. 신호를 기다릴 때의 자동차 소음, 엔진 소리와 경적도 문제였지만 거의 빠짐없이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 다급한 소리는 언제 들어도 긴장이 들고 불시에 찾아오는 그 불행에서 누구도 제외일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어서 병원에 도착하기를 불안하게 지켜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이 동네의 편리한 교통을 고평할 때면 조그만 소리로 덧붙이곤 했다.
“아침마다 사이렌 소리를 들어야 해요.”
이미 도시 소음의 한 부분이 된 그것이 왜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사를 한 뒤 나는 다른 길을 통해 카페로 출근할 수 있게 된 것을 가장 좋은 변화로 받아들였다. 이제 나는 그 오거리를 통과할 일이 거의 없다.
무엇보다 좋은 건 성당을 지름길로 이용한다는 점이다. 성당 마당 끝 엘리베이터를 타면 한 기관 건물로 내려갈 수 있고 언덕길을 따라 걸으면 내 작업 공간이 나온다. 그 지름길을 찾은 것도 이사하고 한참 지나서였다. 우연히 길 안내 앱을 켰더니 기관 안을 통과하는 지도가 등장했고, 그런 건물을 허락 없이 지나도 되나 이 엘리베이터는 어디로 연결되어 있나 의심하며 한 발 한 발 옮겼던 기억이 난다. 올라가니 붉은 벽돌의 성당 건물이 등장해서 아, 여기는 성당이잖아, 하고 안도했다. 이 세상 모든 성당은 하느님의 집이니까.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아주 커다란 귀가 있다는 것
그렇게 해서 ‘성당길’은 내 지름길이자 출퇴근길이 되었다.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자식 키우듯 정성 들여 가꾼 화초입니다. 가져가지 마세요”라고 쓰인 집 앞을 지나 나무들이 가지를 시원하게 뻗고 있는 또 누군가의 집을 지나면 성당의 높은 곳에서 예수님께서 팔을 활짝 벌리고 계신다. 우선 꾸벅 인사를 하고 들어와서는 어린 예수님을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상 앞에 선다. ‘보편 교회’답게 성당들은 그리 다르지 않은 구조와 환경을 가지고 있다. 마리아상이 있어야 할 곳에 마리아상이 있고, 촛불을 켤 수 있는 곳에 촛불이 있으며, 꽃과 식물들이 그 주변을 환하게 밝힌다.
세례성사를 받을 때만 해도 나는 매일 묵주 기도를 하는 신자였다. 기도문을 외우는 데 묵주 기도만 한 것이 또 있을까. 하지만 묵주 기도 횟수는 줄어들어 어느새 식사 전 기도와 화살기도, 잠이 들 무렵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로 하루의 기도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래도 사랑하실 테니까, 마리아의 지친 하루를 이해하실 테니까.
오늘 내가 감내해야 했던 타인의 무례함과 마음을 어지럽게 만든 질시와 열등감, 자책, 늘 메고 다니는 고독감 같은 것. 하지만 기도는 탄원이 아니라 대화이기에 하느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아주 커다란 귀가, 이 세상의 모든 소리가 은하수처럼 흘러들어도 무방할 귀가 있다는 것. 그런 분의 귀에는 오거리의 사이렌 소리는 고요에 가깝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린 양들을 떨게 만든다면 어떤 별의 무너짐보다 그 숨소리를 크게 들으시겠지.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받은 가장 큰 선물은 바로 그런 존재의 보살핌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기도의 일상을 시작하다
지름길을 통과해 카페로 출퇴근하면서 나는 새로운 기도의 일상을 시작하게 되었다. 예수님과 환하게 인사하고 성모상 앞에 서서 성모송, 영광송, 구원송을 바친다. 봄부터 시작된 기도는 날이 맑으나 궂으나 아침이든 밤이든 계속되었다. 나는 루틴을 지키는 사람이니까. 아니, 나는 기도를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기도문 중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구절이 특별한 건 타인을 위한 가장 위대한 축복이 들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바로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돌보소서.”라는 구절이다.
누구에게 버림받은 영혼일까. 바로 앞에 연옥이 등장해 그것이 죄의 심판과 이어져 있으리라 생각할 수 있지만 ‘돌보소서.’라는 호소가 하느님을 향해 있다는 점에서 결코 하느님께서 버리신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타인일까. 부모, 연인, 친구, 공동체. 하지만 우리는 그 모든 타인이 ‘나’를 버렸다고 표현하지, ‘내 영혼’을 버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보다 ‘내 영혼’이 좀 더 본질적이며 더 항구적이다. 구원을 바라는 첫 탄원, ‘저희 죄를 용서하시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것이 내 영혼이 나를 버린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죄는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 짓는 것이니까.
그래서 나는 마지막 구절을 바칠 때면 더 벅차고 단단한 마음이 된다.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버리고 싶은 순간들이, 혹은 그렇게 살아온 결과로써의 삶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중에서도 구원의 우선순위는 자기 생을 ‘가장’ 잃어버린 자들에게 주어진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양보하며 모두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택한다. 그것이 가장 바르고 빠른 지름길임을 알기 때문이다.
겨울의 마지막 자락에서 봄의 기척을 듣고 푸른 잎들이 돋아나 마음을 풍성하게 만드는 과정을 나는 성모상 앞에서 지켜보았다. 카페를 갈 때나 돌아올 때 똑같은 길을 걸어 운동하러 가거나 볼일을 보러 갈 때마다 기도했으니, 계량적으로는 정기적으로 묵주 기도를 바친 셈이 아닌가 얄팍하게 위안하면서. 아니, 그보다 하느님 입장에서는 무거운 노트북을 메고 아침마다 집을 나서는 마리아가 그래도 용케 영혼을 열어 보이며 말을 건네는구나 생각하셨을 것이다. 차오르는 계절을 감각하면서 당장 눈앞의 일들에 조급해지기도 하지만 성당 마당에 서서는 타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구나, 그런 생각들은 나를 좀 으쓱하게 하고 나아가 담대하게 한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성당 마당을 건너 카페로 왔고 이제 여름 장미에 둘러싸이신 성모님을 환한 마음으로 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