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저희 교구의 원로 신부님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사실 소식을 듣기 며칠 전부터 그 신부님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었던 터라, 신부님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깜짝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많이 편찮으셨다더니 이제 좀 편안해지셨겠구나’ 하는 생각만 잠깐 했을 뿐이었습니다.
사실 그 신부님과 저는 인연이 깊지 않습니다. 저와 나이 차이도 크게 나는 터라 은퇴를 하신 지 이미 한참 되셨고, 현역에 계실 때도 얼굴을 몇 차례 뵌 것이 전부일 뿐, 특별히 만날 일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뭔가 접점을 찾아보자면, 그 신부님께서 오래전에 사목하셨던 홍산 본당에서 제가 짧게나마 사목을 했다는 점 정도일 것입니다.
홍산 본당에서 지내는 동안, 그 선배 신부님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신자분들은 입을 모아 신부님이 ‘가난한 사람들을 잘 도와주셨던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가난해서 옷을 잘 사 입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제관에 있는 속옷까지 갖다주시던 분이라고, 일도 잘 못하면서 신자들의 농사일을 도우려고 논에 나가서 몇 시간씩 일하시던 분이라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공소 건물을 지을 때 신자분들과 함께 흙짐을 지고 시멘트를 개던 분이라고, 전혀 그렇게 생기지 않았는데도 정의구현사제단 활동을 하시다가 유치장에 들어가기도 하셨던 분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신자분들은 꼭 덧붙이셨습니다, 신부님은 아주 특이한 분이셨다고. 사제관은 항상 엉망으로 정리하셨고, 일을 열심히는 하셨지만 꼼꼼하게 일 처리를 잘하시는 편은 아니었다고 말입니다.
신학생 시절, 그 신부님을 모시고 살았던 제 동기 신부들이 있는데, 그들의 증언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들 ‘열심히는 하시는데, 일을 벌여 놓고 수습을 못 해서 항상 후임 신부를 고생하게 만드는 분’으로 신부님을 기억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제 마음속에 신부님의 이미지가 그려졌습니다. 생전에 깊게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었지만, 제 마음속에는 ‘대책 없이 일을 시작하기만 하는 특이한 신부님’의 모습이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그런 이미지를 가졌던 것은 저만이 아니었나 봅니다. 마지막으로 신부님을 떠나보내기 위해 교구 사제단과 신자들이 함께 주교좌 성당에 모여 장례미사를 봉헌하던 때, 주교님께서는 강론 시간에 신부님을 두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때로 신부님은 합리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일하셨다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앞뒤 재지 않고 투신하는 순간들이 있었고, 그래서 때로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셨다고 말입니다.
이때 다른 많은 신부님의 고개가 일제히 끄덕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걸 보니, 아마 모두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듯합니다. 주교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도 합리적인 분은 아니십니다.
순간 저는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졌습니다.
저는 대개 계획과 틀을 정해두고, 거기에서 어긋나는 법이 없게 일을 진행하는 편입니다. 유학 중에도 그렇게 학업을 진행해 나갔고, 본당에 있을 때도 후임으로 오는 신부님을 고려해서, 제가 손을 대야 할 부분과 후임에게 넘겨주고 가야 할 일을 구분해 두고 일을 해 나갔습니다.
저는 스스로 그런 저를 ‘나름대로 합리적인 신부’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할 때, 조금 피곤하게 느끼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적어도 누군가에게 어려움을 주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 일 처리 방법이 그러하다 보니, 계획성 없는 동료와 함께 일하는 것을 피하려 하고 심지어 그 동료를 속으로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누군가 무리한 일을 추진한 뒤 후임에게 그 일을 맡기고 떠나는 상황을 보면, 불만에 가득 차 속으로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하느님은 합리적으로만 움직이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것부터가 이미 불합리의 극치입니다. 그분 강생의 장소가 구유라는 사실도,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셨다는 사실도 결코 합리적인 선택은 아닙니다.
당신께서 빚어 만드신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어 당신 아드님의 목숨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것도,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라면 결코 하지 않을 선택입니다. 복음을 통해 전해진 예수님의 모습도 합리적이라거나 계산적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반대와 박해가 충분히 예상되는 상황 속에서도 그분께서는 진리를 선포하기를 꺼리지 않으셨고, 종교 지도자들이 싫어할 것을 알면서도 죄인이나 소외된 이들과의 만남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죄 없는 분께서 세상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스스로 제물이 된다는 것’은 사실 합리적으로 따져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행하셨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합리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저라면 아마 전혀 다른 길을 선택했을 것 같습니다. 안전과 위생을 고려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기의 몸으로 구유에 눕혀지는 것보다는,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았겠지요.
굳이 권력자들이나 종교 지도자들과 대립각을 세울 필요는 없으니,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을 너무 대놓고 하지는 않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3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짧으니,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바꾸어 가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천천히 그 일을 해 나가야겠다고 마음먹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세상의 어떤 것도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란, 대부분 안전한 선택이고, ‘나 자신과 나의 소유를 조금도 잃지 않으려는 마음’을 바탕으로 한 선택이니까요. 어쩌면 지난날 제가 추구했던 ‘합리성’은 저 자신을 지키려는 이기심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었나 묻게 됩니다.
요한 사도가 말하듯,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비합리성의 극치’이기에, 우린 이 말씀을 통해 어째서 하느님께서 그토록 비합리적이신지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계산적인 마음과 합리적인 선택만으로는 결코 온 마음을 다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어리석습니다. 눈먼 사랑은 그 상대방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가는 것밖에는,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리석은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장례미사는 끝이 났고, 저는 다시 신학교의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제가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진 것 같기도 합니다. 신학생들이, 신학교가, 세상이 예전처럼 딱딱하지 않고,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어쩌면 스쳐 지나가는 바람과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의 본성은 크게 변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나 아주 조금이라도 제가 변한 부분이 있다면, ‘비합리적인 사랑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 어느 노사제의 삶과 죽음의 일부’가 제 안에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결코 합리적이지 않은 하느님의 사랑이, 이제야 제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 이제 하느님의 품 안에서 편히 쉬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