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뎌 낸다는 것’에 대하여

신학 칼럼

‘견뎌 낸다는 것’에 대하여

관계 안에서 필요한 기다림을 배우는 일

2025. 0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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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은 유난히도 길고 더웠습니다찜통 같은 더위가 끝날 줄을 모르고 계속되었지요. 그래서 2학기를 시작하는 개강 피정을 앞두고 신학교에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8월 말이 되었는데도 기온은 내려갈 줄을 모르고, 낮 최고 기온은 여전히 35도를 웃돌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30년도 더 된 건물이라 신학생들의 침실에는 에어컨이 없었고, 한낮의 태양을 고스란히 받은 건물은 밤에도 식을 줄을 모르고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결국 한동안은 침실이 아닌, 그나마 에어컨이 놓여 있는 학년 휴게실에서 에어컨을 틀고 취침을 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리고 학생들을 맞아들였습니다.

 

신학생들은 대부분 에어컨이 있는 휴게실에서 잠을 청했고, 저희 교수 신부들은 불편하게 잠을 자는 학생들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어서 더위가 물러가기만을 바랐습니다. 그래도 에어컨을 틀고 자니 괜찮다며 학생들은 웃음 지어 보였습니다.

 

학기가 시작되고 한참이 지나고서야 더위는 조금씩 물러갈 기미를 보였고, 3주 정도가 지나자 신학생들은 모두 자신의 침대에서 잠을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바뀐 것은 잠자리만이 아니었습니다. 무더위로 인해 전례 시간에도 검고 긴 수단이 아니라 깔끔한 와이셔츠를 입어도 된다고 허용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거의 모든 신학생이 흰 셔츠를 입고 미사에 참석했습니다. 하지만 더위가 조금씩 물러가는 듯 보이자, 신학생들은 한 명 두 명 수단을 다시 입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더위가 조금 남아 있는 것 같은 요즈음이지만, 잠자리도 옷차림도, 신학교의 생활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입니다.

 

여름 막바지의 무더위를 신학생들과 함께 참고 견디며, 견뎌 낸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사실 예전과 달리 요즘에는 인내의 덕에 대해서 잘 말하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인내를 미련한 것으로, 타파해야 할 악습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날이 더우면 에어컨을 트는 것이 당연하고, 날이 추우면 보일러를 트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면 되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으면 되는 세상입니다. 요리하기 귀찮으면 전화 한 통화에 음식이 배달되고, 전화마저 귀찮으면 배달 앱을 통해 주문을 하면 그만인 세상입니다. 여름이면 뜨거워진 차에 올라타기 싫어서 핸드폰으로 시동을 걸어 에어컨을 켜 두고, 겨울에는 미리 시동을 걸고 히터를 켜 둡니다. 건조기며 세탁기, 에어컨이며 냉장고, 인덕션이며 로봇 청소기에 전등까지, 모조리 핸드폰을 통해 원격에서 마음대로 작동시킬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오늘날 불편함은 제거해야만 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불편함을 참아 견디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날 누구나 욕망하는 것을 그 즉시 가질 권리가 있다고느끼고 있으며, 실제로 욕망하는 것을 소유하면 행복하다고 모두가 말하고 있습니다. 부족함을 부끄러움으로 여기고, 인내를 가난한 자의 자기 위안으로 여기는 세상, 이런 세상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세상에서 인내해도 좋다고 여겨지는 단 하나의 가치는 돈을 벌기 위해 참고 일하는 것뿐입니다.

 

그럼 정말 인내는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일일까요? 불편함은 무조건 극복해야 할 대상일까요?

 

인내는 단순히 불편한 무언가를 참아 견디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나와 대상이 관계를 맺는 방식을 변화시켜 나가는 힘을 말합니다.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삶 안에서 대상과 나와의 관계는 즉각적(卽刻的)이고 즉시적(卽時的)입니다. 하지만 인내하는 삶을 통해서 우리는 대상과의 관계 안에서 필요한 기다림을 배우게 됩니다.

 

인내는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데, 하느님과의 관계 맺음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바라는 것처럼 즉각적이고 즉시적으로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여정 안에서 불타는 듯한 뜨거움과 기쁨을 느꼈던 사람일지라도, 분명 메마름과 건조함의 시기는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편리하고 즉각적인 삶에 익숙해진 사람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조차 편리하고 즉각적인 응답만을 찾게 될지도 모릅니다. 내가 기도를 한 만큼 합당한 보답을 주시는 하느님, 내가 낸 헌금만큼 큰 은총을 내려 주시는 하느님, 어쩌면 현대인이 원하는 하느님이란 돈을 지불하고 원하는 물건을 즉시 받을 수 있는 자판기와 같은 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살아 계신 야훼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40년의 시간을 광야에서 헤매야 했고, 요나는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을 보내고서야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을 만날 수 있었으며, 바오로 사도 역시 다마스쿠스에서 시력을 잃는 체험을 하고 나서야 참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노래하듯, 우리는 어둔 밤을 거치고 나서야 진정으로 그분을 만나 뵈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한 우리의 기다림 역시 그러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지 이천 년이 넘었습니다만, 여전히 세상은 고통과 악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세상을 지켜보며 어째서 하느님의 나라는 오지 않느냐고, 하느님은 정말 계시냐고 탄식 어린 물음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물론 그 힘은 인내의 덕을 통해서만 지니게 되는 것이겠지요.

 

제가 이렇게 목소리를 높인다 한들, 세상이 얼마나 바뀔까 싶기도 합니다. 세상은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빨리 변해 갈 것이고, 여전히 사람들은 더우면 에어컨을 켜고, 추우면 보일러를 돌릴 것입니다. 배가 고프면 배달 앱을 켜고, 무료하면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켜겠지요.

 

이런 세상에 익숙해진, 소위 현대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은 답답하게만 보일 겁니다. 핸드폰도 제대로 다룰 줄 모르고, 키오스크도 사용할 줄 모르고, 아무리 설명을 해 드려도 새로운 걸 제대로 배울 줄 모르는 세대라고 폄하해 버리기 십상이겠지요.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는 듯 보입니다.

 

문득 제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어머니께서는 예전부터 에어컨 바람을 싫어하셨고, 생태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지신 이후로는 특히 더 에어컨을 싫어하게 되셨습니다. 그래서 본가에는 지금까지 에어컨이 없습니다. 한여름에 어머니를 뵈러 가면 집 안은 항상 후덥지근합니다. 더위가 걱정되어 에어컨을 놔 드리겠다고 말씀을 드리지만, 어머니께선 선풍기를 틀어 주시며, ‘가만히 앉아 있으면 그래도 좀 시원하다고 매번 말씀하십니다.

 

어머니께서는 여전히 에어컨 없이 여름을 나십니다. 에어컨 없는 삶이 어머니껜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당연한 분께 어쩌면 하느님 나라를 향한 기다림 역시 당연하지 않을까.

신학생과 함께 늦여름의 더위를 참아 견디며, 저 자신에게 묻습니다.

이 더위를 참는 것이 내게는 당연한가?”

그것이 당연하지 않은 제게 어쩌면 하느님은, 더위를 식혀 줄 한 잔의 물보다, 땀을 식혀 줄 에어컨보다 중요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토록 간절하게 하느님을 찾았었다면, 저는 지금보다 훨씬 더 하느님께 가까이 가 있었겠지요.

 

주님, 저는 그 당연하지 않은 것이 당연하게 되기를 희망하며, 영원한 인내 안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Profile
대전교구 사제. 독일에서 카리타스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생을 양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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