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보통의 시간

영성과 신심

아주 보통의 시간

우리의 빈 그물을 들여다보시는 하느님

2025. 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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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라는 인사말

지금은 좀 더 다양해졌지만 처음 내가 좋아한 성경 구절은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요한 21,5)였다. 부활한 예수님께서 자기 생업으로 돌아가 일하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가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과 함께 꿈꾸던 세상은 폭력과 죽음으로 막을 내리고 실의에 빠진 제자들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먹고사는 문제가 눈앞에 닥쳤고 실의를 달랠 겨를도 없이 어구를 챙겨 그들은 바다로 나간다. 이제 그들의 어깨 위에는 일상의 무게가 어떤 것보다도 무겁게 내려앉는다. 어부는 물고기를 잡아야 하고 그 물고기는 자신과 다른 가족들의 하루하루를 위해, 이제 그리 빛날 것도 특별할 것도 없을 듯한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꼭 필요하다.

처음에는 이 말이 부활 이후의 말씀치고는 아주 소박하다고 느꼈다. 갯바위 낚시꾼들을 구경하다 괜히 옆으로 가서 뭐 좀 잡힙니까?” 하고 물어보는 평범한 장면이 상상됐다. 2000년 후의 신자인 내가 상상해도 마음이 저릿해 오는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형, 그 고통을 온전히 겪어낸 제자들을 찾아가 이처럼 심상한 말씀을 하시다니. 나는 한동안 이 말을 사극 인물 같은 톤으로 대화에 써 보기도 했다. 집사람이 퇴근해 돌아오면 하루 잘 보냈냐는 말 대신 그래, 뭘 좀 잡았느냐?” 하고 묻는 식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예수님의 혜량이 그 단순한 말에서 느껴졌다. 상처받고 낙심하며 돌아간 제자들이 다시 자기 일상을 재건하는 순간, 그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존재가 할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인 인사가 그 말에는 있었다. 그건 인간의 먹고사는 일에 대한 예수님의 존중이었고 노동으로 일구어지는 일상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었다. 그 생각이 들자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라는 말 자체로 콧날이 시큰해지는 위로가 되었다. 그 뒤로 만선을 이루게 해 주신 기적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힘 있는 선물이었다.

 

1년 주기의 교회 달력은 대림, 성탄, 사순, 부활을 주요 절기로 삼아 나뉘고 나머지는 연중 시기로 채워진다. 주님 세례 축일이 지난 지금이 바로 연중 시기’, 영어로는 보통의 시간Ordinary Time’이다. 특정한 전례나 기념 없이 하루하루를 펼쳐 나가는 이 시기를 나는 좋아한다.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어 사시며우리와 함께한 시간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드러나는 인간의 일상은 오래전 성경 속이나 현재나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은 힘들고 비루하고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고 싸우고 적대하며 사랑했다가 다시 서로를 곤란하게 만드는, 잘못과 죄와 그에 대한 반추와 반성과 절규를 계속하며 살고 있다.

그래도 나는 예수님께서 그런 인간의 일상을 덧없는 것으로 여겼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분이었다면 제자들이 고기를 잡는 바닷가에 가서 걱정과 연민을 담아, 뭘 좀 잡았느냐고 묻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며 아주 단순하게 물었다. 오늘의 양식은 해결되었느냐고, 저녁에 식구들은 굶지 않을 것 같으냐고, 너희는 지금 배는 채우고 일터에 나와 있느냐고.

 

작은 것들이 필요한 사람들

예비 신자 교리가 시작되어 교실에 모인 사람들은 세대가 다 달랐다. 가장 연세가 많은 분은 여든을 바라보고 계셨고 엄마와 함께 온 중학생 예비 신자도 있었으며 국적이 다른 ‘A’도 있었다. A는 스무 살이 조금 넘은 듯한 인상이었고 몸집이 아이처럼 작았다. 아시아계였지만 정확한 출신을 물어볼 기회는 없었다. 어느 날 A가 교재를 가지고 오지 않아 책을 함께 보게 된 것을 계기로 우리는 가까이 앉게 되었다. 이후에도 종종 곁눈질로 내 교재를 살피며 수업을 들어서 나는 A가 한국어를 잘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진도가 어디쯤인지를 수녀님 말씀이 아니라 눈치껏 짐작해 가며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세례를 받으러 오게 되었을까? 처음에는 궁금했지만, 나중에는 그렇지 않았다. 나와 다르지 않은 이유일 테니까. A는 나만큼이나 말수가 없었고 수업 중간에 나누어 주는 간식을 건네면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녀님이 신청서를 한 장씩 나누어 주었다. 교적을 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 다큐멘터리에서 어떤 인물의 거짓말을 밝혀내기 위해 성당 기록을 뒤지던 장면이 떠올랐고 앞으로 내 삶을 증언할 또 하나의 중요 서류가 만들어지는구나 싶었다. 일종의 주민 등록부나 학교의 생활 기록부과 같은 그 서류를 위해서는 출생부터 혼인 상황에 이르는 개인 정보를 모두 적어야 했다. 혹시 부담을 느낄까 싶으셨는지 수녀님은 신청서를 보는 사람은 당신뿐이니 솔직히 적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시간이 흐르고 A가 슬며시 자기 서류를 내밀며 이거 뭐예요?” 하고 물었다. 미혼, 기혼, 이혼 등의 한글이 적혀 있고 A는 그중 별거를 짚고 있었다. 나는 얼른 강의실을 둘러봤고 조그마한 소리로 “Divorce”라고 하며 이혼란을 가리켰다. A는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면 별거이혼을 어떻게 설명하지? 그때 그 둘의 확실한 차이는 이혼 서류가 있느냐 없느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법원? 법원 갔어요?”

내가 한국말로 나지막이 묻자, A는 잠시 생각했다. 슬며시 걱정이 들었다. A가 법원을 다녀와 결혼 생활을 다 정리했다고 알게 될지, 아니면 아직 해결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알게 될지 긴장됐다. “법원, 서류, 도장.” 하고 나는 다시 손짓을 해 보였고 A법원하고 끄덕이며 서류 모양을 그려 보였다. 우리는 뜻이 통해 같이 웃었지만, 그렇게 해서 쳐진 이혼란의 동그라미는 아주 많은 시간으로 무겁게 채워져 있는 듯했다. 하지만 새 삶을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시작점일 거였다.

 

A와의 인연은 성지 순례길에서도 이어졌다. 우리는 절두산 순교성지로 가서 미사 드리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비롯한 순교 성인들이 모셔진 작은 방에서 기도했다. 3월의 그곳에는 바깥에 모여 앉아 있어도 좋을 만큼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성당에서는 여러 프로그램을 준비했는데 그중 하나가 보물찾기였다. 모두 흩어져 보물을 찾는데 그날따라 나무둥치와 수풀 사이에 있는 쪽지가 내 눈에 속속 띄었다. 처음에는 보이는 대로 집었다가 나중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유유히 지나쳤다. 출발점으로 돌아가는데 아직 보물을 찾고 있는 A를 만났다. 나는 부러 A에게 뛰어갔고 슬며시 웃으며 보물쪽지를 내밀었다. A는 기분 좋게 그중 하나를 가져갔다. 내심 A에게 가장 근사한 선물이 갔으면 하고 바랐는데 당첨된 건 비누 세트였다. 소박하지만 일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기는 했다. 우리는 바로 그런 작은 것들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우리의 하루를 허투루 보지 않는 하느님

처음 기도를 드릴 때 나는 아주 사소한 바람을 담기도 했다. 교리 수업 쉬는 시간에 먹는 곡물 과자가 너무 맛있어서 하나 더 먹고 싶다고 떠올렸더니 봉사자가 정말 우연히 뚝 떨어뜨리고 간 적도 있다(개인적으로 정말 놀랐다). 카페에서 일하는데 옆에서 너무 주변을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으면 예수님 저 사람 좀 나가게 해 달라고 빈 적도 있고, 신간이 나왔을 때는 내일은 조금 더 팔리게(부수까지 정해서) 해 달라고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세례와 견진을 받고 시간이 흐른 지금 나의 기도는 조금 덜 정확하고 조금 덜 사사롭다. 그렇다고 하루하루의 일상 대신 뭐 그리 대단한 대의가 기도 속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다. 다만 기도의 대상이 되는 다른 이의 범위가 풍선처럼 점점 부풀어, 한 번도 본 적 없는 친구의 직장 동료나 북토크에서 만난 독자의 가족도 기도에 등장하게 되었다. 뉴스로만 들은 누군가의 사연과 소설을 쓰기 위해 읽은 책의 인물들까지 내 기도에는 더 많은 타인의 일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느낄 때 나는 하느님과 닮아 가는 중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하루를 허투루 보지 않는 하느님, 뭘 좀 잡았느냐?” 하고 걱정하며 빈 그물을 들여다보시는 하느님, 그 모든 일상에 대한 빛나는 연민을 불러일으키며 인간들의 삶 속에 머무르시는 하느님. 그러니 우리의 연중은 아주 다행히도 그저 보통인 하루하루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특별하고 안전하며 무엇보다 깊은 이해로 지지받는 일상 말이다.

 

Profile
2009년 <한국일보>로 등단해 《너무 한낮의 연애》(2016), 《경애의 마음》(2018), 《대온실 수리 보고서》(2024) 등의 소설과 《식물적 낙관》 등의 산문집을 냈습니다. 작고 단순하고 환해지기 위해 분투 중이며, 밤마다 가톨릭 책을 읽다가 잠에 들어 가족들에게 ‘재야 신학자’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60여 종의 식물들과 함께 살아가는 식집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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