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을 만난 이들: 요한 복음 속 이야기> 시리즈의 아티클로, 이 글은 “슬픔이 향기로 뒤덮일 때까지”에서 이어집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요한 19,38).
아리마태아 출신이라는 사실을 제외하고 우리가 요한 복음에서 읽을 수 있는 아리마태아 요셉에 관한 정보는 위 문장이 전부다. 마음 한편에 믿음이 자리하더라도, 연약한 인간은 이를 타인에게 드러내는 데 너그럽지 못하다. 오늘 우리가 만날 이는 이러한 인간상을 온전히 담고 있는 인물, 아리마태아 요셉이다.
우리가 놓치기 쉬운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다. 아리마태아 요셉은 네 복음서에 모두 등장해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는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만났던 니코데모, 사마리아 여인, 왕실 관리는 요한 복음에만 등장하고,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마르타와 마리아조차 요한 복음을 제외하면 루카 복음에만 등장했다(루카 10,38-42 참조).
예수님의 공생활이 끝나고 그분께서 무덤에 안치되시는 일화에서 잠시 등장하는 인물에 불과하지만, 아리마태아 요셉이 맡은 역할이 초대 교회에서 얼마나 중요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중요한 일을 했던 요셉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네 복음서(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를 대조하며 그의 정보를 비교하는 일은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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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 복음 |
마르코 복음 |
루카 복음 |
요한 복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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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마태아 출신 |
아리마태아 출신 |
유다인들의 고을 아리마태아 출신 |
아리마태아 출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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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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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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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숨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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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에게 시신을 내 달라고 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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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에게 ‘당당히 들어가’ 시신을 내 달라고 청함 |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 달라고 청함 |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게 해 달라고 청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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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망 있는 의회 의원 |
의회 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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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고 의로운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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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의 결정과 처사에 동의 안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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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나라를 열심히 기다리던 사람 |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던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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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아마포로 감쌈 |
아마포를 사 와서 감쌈 |
시신을 내려 아마포로 감쌈 (이후 향료와 향유는 무덤에 모신 뒤 여인들이 준비) |
니코데모와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모시고 유다인들의 장례 관습에 따라 (니코데모가 가져온) 향료와 함께 아마포로 감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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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를 깎아 만든 자기의 새 무덤에 모시고 무덤 입구에 큰 돌을 굴려 막아 놓음 |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모시고 무덤 입구에 돌을 굴려 막아 놓음 |
바위로 깎아 만든, 아무도 묻히지 않은 무덤에 모심 |
정원에 있는 새 무덤에 모심 |
위의 도표는 네 복음서 각 권의 내용을 바탕으로 요셉에 관한 언급을 정리한 것이다. 우리는 흔히 아리마태아 요셉을 존경받는 최고 의회 의원, 부유하고 의로운 인물, 빌라도에게 당당히 나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청한 강직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들은 모두 요한 복음에서는 확인할 수 없으며, 공관 복음에서만 추론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인쇄술이 극도로 발달해 모든 복음서를 한데 모아 놓고 읽을 수 있는 우리는 이 인물을 네 복음서 안에서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지만, 성경이 매우 귀했던 초기 교회 신자들, 특히 요한 복음만을 접했을 가능성이 큰 요한 공동체의 신자들은 지금과 다른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도표 안에 굵게 표시된 글씨는 아리마태아 요셉에 대해 요한 복음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정보이다. 요한 복음에는 공관 복음에서 발견할 수 없는 고유한 정보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유다인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숨김’이라는 내용이 눈에 띈다. 네 복음서 전체에서 요셉을 언급하는 모든 대목 가운데 유일하게 부정적인 뉘앙스를 띤다. 이는 빌라도에게 ‘당당히’ 들어가 예수님의 시신을 ‘내 달라고’ 청했다는 마르코 복음의 내용과 색채가 사뭇 다르다. 요한 복음의 저자는 왜 이러한 아리마태아 요셉의 두려움을 우리에게 전하는 것일까.
아리마태아 요셉의 믿음과 두려움
사실 요한 복음에서 믿음과 두려움의 공존은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다음 구절들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군중 사이에서는 예수님을 두고 수군거리는 말들이 많았다. “그는 선한 사람이오.” 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아니오. 그는 군중을 속이고 있소.”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유다인들이 두려워 그분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요한 7,12-13)
그의 부모가 대답하였다. “이 아이가 우리 아들이라는 것과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었는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나이를 먹었으니 제 일은 스스로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의 부모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이렇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하면 회당에서 내쫓기로 유다인들이 이미 합의하였기 때문이다. (요한 9,20-22)
이처럼 요한 복음에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믿음을 고백하지 못하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렇다면 아리마태아 요셉이 그토록 두려워한 것은 무엇일까? 두 번째 구절을 보면, 믿음을 고백하면 회당에서 쫓겨난다는 내용이 분명히 드러난다. 요셉에게도 이와 같은 두려움이 있었을까. 하지만 요셉에게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요한 복음에서 이러한 믿음과 두려움이 한 번 더 언급되는데, 이 대목에서 바로 요셉이 지닌 두려움의 본질을 유추할 수 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가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분에 관하여 이야기한 것이다. 사실 지도자들 가운데에서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지만, 바리사이들 때문에 회당에서 내쫓길까 두려워 그것을 고백하지 못하였다. 그들이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보다 사람에게서 받는 영광을 더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요한 12,43)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싹은 요셉 안에서도 분명히 자라고 있었지만, 사람들에게서 받던 영광을 잃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그 숨을 막아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한 것이다. 최고 의회 의원으로서 누리던 존경과 사랑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그에게 그 어떤 두려움보다도 컸을 것이다.
음지에서 양지로 나아가다
요한 복음은 우리에게 그가 예수님의 제자였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가 ‘언제’, ‘어디서’ 제자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전해 주지 않는다. 그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뒤인 요한 복음 19장에서야 처음으로 복음서에 등장하지만, 이전에 그가 예수님을 언제 만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인지, 예수님의 어떤 가르침에 감명을 받았는지는 철저히 감추어져 있다.
오히려 그분을 먼저 찾아간 이의 모습은 예수님의 제자라고 표현되지 않은 니코데모를 통해 드러난다(요한 3,1-2 참조).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붙잡지 못한 경비병들을 꾸짖을 때 그분을 합법적으로 변호하려 했던 이도 니코데모였다(요한 7,50-52 참조).
이 장면에서도 아리마태아 요셉의 발언은 없다. 그가 이 자리에 있었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만일 있었다면 그는 여전히 두려움에 짓눌려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철저히 베일에 가려진 아리마태아 요셉의 모습은, 자신의 믿음을 끝내 드러내지 못하고 살아온 그 가련한 모습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비록 미약할지언정 믿음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마음 안에 간직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 약한 불씨로 그를 주님 부활의 도구로 만들어 주셨다.
그가 음지에서 양지로 나아간 결정적인 순간은 역설적으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였다. 유다인들에게는 죽은 뒤 시신이 묻히지 않은 채 방치되는 것이 가장 큰 수치였다. 이 시신은 머지않아 까마귀와 각종 해충에 노출될 것이다. 만약 어떤 죽음이 그러한 모습으로 마무리된다면, 유다인들은 이를 신적인 처벌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아리마태아 요셉은 그분을 차마 그렇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유다인들에게는 안식일에 시신을 내리고 모시는 일이 허락되지 않았기에, 서두르지 않으면 그분은 안식일 내내 십자가에 매달린 채 남겨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로마인들은 십자가로 처형받은 이들의 시신을 쉽게 넘겨주지 않았다고 전해지지만, 요셉은 이를 따질 여유가 없었다. 그분을 안식일 내내 밖에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것이 그가 두려움을 넘어 빌라도에게 서둘러 간 이유였을 것이다. 만일 아리마태아 요셉이 서둘러 빌라도에게 가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거룩한 몸은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상상만으로도 아찔한 일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가 극복한 두려움은, 그분의 영광스러운 부활이 일어나는 굳건한 토대가 된다.
요셉과 니코데모는 어떻게 협력했을까?
요한 복음에서만 전해지는 또 하나의 정보가 있다. 예수님을 모실 때 요셉이 니코데모와 협력했다는 것이다. 안식일까지 남은 시간이 거의 없었기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역할을 분담했을 것으로 보인다. 요셉이 빌라도에게 시신을 내 달라고 청하러 가는 동안, 니코데모는 백 리트라에 이르는 향유를 준비했다. 빌라도가 과연 허락할지조차 불확실한 상황에서, 이처럼 엄청난 양의 값비싼 향유를 준비한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모든 불확실과 두려움, 조급함이 뒤섞인 그 시간 동안 결국 그들은 예수님의 몸을 새 무덤에 모시는 데 성공했다. 정원에서 시작된 그분의 수난은(요한 18,1 참조), 정원에 있는 새 무덤에 묻히심으로 마무리되었다(요한 19,41 참조). 이 무덤은 공관 복음이 전하듯 아리마태아 요셉의 소유였을 가능성이 크다. 니코데모와 역할을 나누어 움직여야 했을 만큼 긴박한 그 상황에서 별도의 빈 무덤을 새로 마련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믿음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살아온 아리마태아 요셉은 자신의 무덤에 그분을 모시며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분을 자신의 손으로 보내 드린 그는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 두려움으로 얼룩진 그 무덤을 나와, 참된 최고 의회 의원으로 거듭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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